소설리스트

궁안에 잠들어 있는 꽃-5화 (5/44)

五花 * 궁 안에 잠들어 있는 꽃 (4)

영희궁의 작은 정원.

오늘도 여전히 자리에 앉아 새하얀 종이와 싸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는 이랑이었다.

비어 있는 종이를 한시라도 빨리 검은 글자들로 가득 채워야만 직성이 풀릴 거 같다는 듯 있는 힘껏 붓을 쥔 그녀의 손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움직이고 있었고, 그러한 종이 위의 결과물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던 유시후였다.

“거기 맞춤법 틀리셨어요.”

“아. 여기? 응.”

“그리고 여기 문장도 좀 어색한 거 같아요.”

평상시의 유시후라면 ‘또 이런 쓸데없는 걸 쓰고 계십니까.’라고 말했을 법도 했지만, 최근 들어 틈만 나면 사라지는 이랑의 곁을 일일이 따라다니며 감시하느라 지쳐, 차라리 이런 무료한 시간이 낫겠지 싶은 그였다.

게다가 며칠 전의 침입에 가까운 일도 있었으니까……. 물론 당사자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영희궁 안에도 봄기운이 번지며 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만개하고 있는데 자신이 모시는 왕후님은 책상에 앉아 의미 없는 편지를 쓰고 있다니.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러고 보니 이랑님, 곧 있으면 18살이 되시네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러고 보니 그러네.”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랑이었지만, 이미 혼자만의 과거 회상에 빠진 유시후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랑 님이 이 궐 안에 들어온 날은 아직도 기억이나요. 추운 겨울이었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만해, 유시후. 아저씨 같아.”

관심 없는 듯 보였지만 나름 다 듣고 있었나 보다.

간만에 분위기 잡고 추억 회상 좀 해보겠다는데 그냥 넘어가지 않고 방해를 해오는 이랑을 한 번 흘끗 바라보던 유시후가 반격에 나섰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랑님, 18살이나 되셨으면서 키가…….”

그녀가 ‘키’에 관해서는 유난히 민감하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유시후였기에 그가 평소에도 잘 써먹는 말 중 하나였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 하얀 종이를 가득 채우기 전에는 놓지 않을 거 같던 붓을 던지듯 놓아버린 이랑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나 아직 성장기야. 그리고 이 정도면 보통이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네. 네.”

키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일단 의기소침해지는 이랑이 금세 풀이 죽어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옆에서 키득거리며 웃고 있는 유시후가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도저히 편지를 쓸 기분이 들지 않는 이랑이 결국 포기한다는 듯 두 손을 놓고 하늘을 올려다보다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10년. 이제 딱 10년이야, 유시후.”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러게요. 엄청나게 긴 10년이었죠.”

그동안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유시후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생각해보니 그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누구를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누구긴 누구야. 하늘 같으신 우리 전하시지. 매일 편지만 썼지 직접 만난 적은 없었어. 아니,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못 했었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진짜 엄청나게 날 싫어하나 봐. 안 그래?”

뭔가를 말하려다가 이랑의 한숨 섞인 말에 말을 멈추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하는 유시후였다.

그 역시 궁금했다.

도대체 이 나라의 하늘 같으신 왕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인지. 그동안 자신도 그 전하라는 사람은 이랑을 싫어하는 거라고 생각해왔었다. 아니, 싫어하는 것보다 더 높은 단계인 아예 관심이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글쎄요.”

그다지 시원치 않은 대답이었다.

유시후가 그러든지 말든지 잠시 고민에 빠져있는 듯 보이던 이랑이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다시금 불안해지는 유시후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잠깐. 나 방금 엄청난 걸 생각해내고 말았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불안해지네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지금 내가 싫어서 내 부탁 안 들어주는 거 맞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추리를 해낸 결론이라는 듯 뿌듯하기까지 해보이는 이랑이었지만, 유시후의 생각은 달랐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전혀 다른 방향으로 감을 잡으신 거 같은데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후후. 유시후는 그냥 얌전히 두고 봐. 곧 있으면 엄청 놀랄 테니까.”

유시후가 불안해하든 말든.

이랑의 입가에는 이미 ‘작전 성공’ 후에나 볼 수 있을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흥. 내가 언제까지고 당하고만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걸?”

뭔가 이번만큼은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른다는 기분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 이랑이었고, 그런 이랑의 모습에 다시금 불안해지는 유시후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아……. 이런 일 보면 늘 뒤처리는 제가 하게 되니까. 제발 사고만 치지 말아주세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흐음……. 문이 잠겨 있군.”

궁궐 안에도 많은 궁과 기타 부속기관들인 건물들이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작은 궁으로 알려진 ‘영희궁(英姬宮)’은 그 규모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구석에 있기 때문에 들어가고 나오는 출입구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영희궁의 유일한 출입구 앞.

누군가의 선(先) 방어로 인해 굳게 잠긴 문 앞에 한 남자가 뭔가를 들고 난감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떻게 들어가지…….”

시하루는 지금 이 짜증이 나는 상황에 어찌해야 할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사람을 불러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게 가장 당연하고 정상적인 방법이었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그 꼬맹이란 녀석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킬지도 몰랐으니 그 방법만은 피하고 싶었다.

안 그래도 저번에 만났을 때 왕후 자리를 때려치울 거라나 뭐라나 하는 말을 하며 자신을 찾기 위해 영희궁에서 나왔다고 하던데, 지금 이 시점에서 자신이 그녀가 애타게 찾고 있던 그 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얼씨구나 하고 폐위시켜 달라 할 게 분명했다.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지난 십 년간 부인을 나 몰라라 하다가 이제 와서 관심을 갖는 나쁜 놈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또 그러고 싶지는 않은 시하루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는걸…….”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랴, 변명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그도 지금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행동하는 건지 스스로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 해야 하는 일정들을 끝내기 무섭게 꼬맹이가 떠올랐다.

혹시 정체를 들킬 일을 염려해 일부러 군복차림으로까지 갈아입는 치밀함까지 보이며, 깨닫고 보니 어느새 영희궁 앞에 서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좋아……. 평범한 등장을…….”

‘평범한 등장’을 추구하면서도 이미 문으로의 정상적인 입장을 깔끔하게 포기한 그의 걸음은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다른 곳에 비해 비교적 낮은 담벼락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조금은 평범하지 않아도 괜찮겠지.”

아마도 이 나라를 다스리는 대단하신 왕께서는 뭔가 매우 꼴사나운 행동을 취하실 생각인 듯했다.

**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유시후, 비켜!”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앞을 보세요!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놀면서까지 잔소리하지 마.”

심심해 죽겠다는 이랑을 위해, 그리고 아까 이야기에 잠깐 올라왔던 그녀의 키 성장을 위해 유시후가 작은 공 하나를 어디선가 가져와서는 같이 놀아주던 중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정말…….”

이랑의 뒤를 대충 쫓아다녀 주고 있던 유시후가 영희궁 안에 들어온 시하루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워낙 공에 집중하고 있던 이랑은 유시후가 잠시 자리를 옮기든 말든 데굴데굴 굴러가는 공을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유시후를 발견한 시하루가 살짝 인상을 쓰더니 그냥 손짓으로 잠시 물러가 있으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잠시 혼자서 잘 놀고 있는 이랑에게 시선을 주더니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비켜주는 유시후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꼬맹이가 잘도 돌아다니네.”

신이 나게 놀고 있던 이랑이 갑작스럽게 자신을 겨냥하는 꼬맹이라는 공격적인 말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며 쫓던 공을 잊고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 꽃따리 오빠.”

‘꽃따리’라는 별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순간적으로 인상을 찌푸렸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 ‘그냥 넘어가자.’라고 생각한 시하루가 한숨을 내쉬며 들고 온 무언가를 탁자 위에 턱 하니 올려놓고는 어느새 다가온 이랑에게 풀어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여기에는 무슨 일이냐.’ ‘어떻게 들어왔나.’

기타 등등. 반가움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이랑이었지만 인사보다는 호기심이 먼저였다.

빛의 속도로 풀어헤친 상자 속에 가지런히 들어 있는 다과들을 발견한 이랑이 조금 전 그가 자신에게 ‘꼬맹이’라고 말했던 것에 대한 불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눈 녹듯 스르르 풀려서는 생글생글 웃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꽃따리 오빠는 얼굴만 예쁜 줄 알았는데 마음씨도 곱네요.”

남자의 자존심으로 듣고 넘길 말에서 약간 어긋난 거 같은 ‘칭찬’에 시하루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지만, 곧 그냥 좋은 거겠지 싶어 하며 피식 웃고 넘겨버렸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런데 뭐하러 온 거예요? 꽃따리 오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냥 지나가는 길에.”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진짜 말이 짧네요.”

이쯤 되니 이랑이 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존댓말을 듣고 싶어 하는 건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한 번쯤 져준다는 마음으로 말을 높여 줄 수도 있겠지만, 그 역시 쉽게 올려다봐 줄 정도로 약한 자존심이 아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뒤에 든든한 배경이라도?”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있지.”

장난스럽게 물은 질문이었는데 ‘있다’란 대답이 들려오자 이랑이 놀란 듯 눈이 커졌다. 그러나 곧 말도 안 된다고 생각을 한 건지 피식 웃으며 어디 말해보라고 약을 올리기 시작했다.

사실 배경은 무슨, 시하루 그 자체가 곧 권력이었지만 끝까지 정체를 숨기고 싶은 그였다.

여기서 ‘내가 왕이다.’라고 말하면 이랑이 ‘어머, 그래요? 정말 만나 뵙고 싶었어요.’라는 부드러운 전개가 진행되지 않을 거라는 불안한 생각이 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사실은 거짓말이었다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그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전하.”

할 수 없이 자신을 마치 제3인을 소개하는 듯 말하기로 한 그는 ‘전하’라는 말을 듣기 무섭게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버린 이랑의 반응에 조금 전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듯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혹시 전하의 호위무사?”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래.”

마침 입고 있는 의상도 군복이었으니 급하게 만들어낸 말치고는 나름대로 이야기가 잘 흘러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잘됐네요.”

그런데 예상외로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실실 웃고 있는 이랑이 상당히 거슬리기 시작하는 그였다.

현재 그녀의 반응은 그가 예상했던 것 중에 없는 반응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잠깐만 기다려 봐요.”

뜬금없이 잠시 기다려 달라 말하고는 자리를 떠나 버리는 이랑. 그녀의 말대로 그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차를 마신 지 한 5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 지났을까, 한 손에 뭔가를 들고 저 멀리서 달려오는 그녀가 보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럼 이거 전하께 전해줄 수 있어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뭔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음……. 편지요.”

편지라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편지라는 이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계속 그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가 피식 웃기 시작했다.

잠시 아무 말 없던 그가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편지를 그에게 넘겨주며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반드시 전해줘야 해요? 약속이에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알았어. 약속할게.”

흔쾌히 승낙의 답을 해주는 시하루 덕분에 그동안 ‘어떻게 하면 이 편지를 왕에게 전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했던 시간이 빠르게 잊히고 안도감이 몰려오는 이랑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우와. 진짜 다행이다. 제가 몇 년 동안이나 편지를 보냈는데 읽는 건지 안 읽는 건지도 모르겠고, 답장이 없어서 직접 건네주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썼었는데……. 진짜 고마워요. 꽃따리 오빠.”

몇 년?

시하루의 표정이 살짝 의아하다는 듯 찌푸려졌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니 잠깐, 난 그런 편지는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만 가봐야겠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응. 응. 얼른 가서 전해드리고~.”

방방 뛰는 이랑이 귀여운 것인지 시하루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편지. 편지. 편지라……. 편지라 이거지?’

편지를 보낸 사람은 있다는데, 정작 자신에게는 그 편지란 것들이 도달한 적이 없다.

분명히 이건 문제가 있었다. 편지라는 걸 태어나서 처음 받아본 건 아니었지만, 왠지 그 종이 한 장은 그에게 있어서 색다른 의미가 있는 듯 보였다.

시하루가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영희궁의 문을 나서니 커다란 나무의 뒤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남자 한 명이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조금 전에 다짜고짜 옷을 바꿔 입으라고 명령을 받아 얼결에 받아 입은 옷은 너무도 눈에 띄는 화려한 차림이었기 때문에 30분을 넘게 나무 뒤에 숨어서 눈치를 보고 있던 시하루의 호위 중 하나인 이안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시하루님……. 뭔가 좋은 일이라도…….”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했고, 가끔이지만 괜찮은 미소도 지을 줄 아는 그였지만, 표정을 굳히고 좋은 일 없으니 자신에게서 관심 끄라고 말하는 시하루의 반응에 이제는 익숙한 듯 이안이 한숨을 내쉬며 멀찍이 거리를 둔 채 뒤따르기 시작했다.

아까 거의 강제로 바꾼,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이 화려한 옷을 당장 갈아입고 싶다는 표정을 역력히 드러내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있으신 거 같은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없대도.”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제가 하루 님을 곁에서 모신 지가 얼마인데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말은 바로 하자. 네가 날 언제 모셨어.”

순간 상처받았다는 이안의 표정을 본 시하루가 마치 지뢰를 밟았다는 듯 움찔거리다 ‘알았으니 그만해라.’라고 말하며 그를 대충 달랬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래서 무슨 좋은 일이신데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거 참 끈질기네.”

아무 말 없이 시하루를 따라가던 이안이 용기를 내어 다시 한 번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없다.’라고 대답한 것치고는 뭔가 입가를 씰룩거리며 웃음을 참고 있는 듯 보이는 시하루의 상태가 상당히 궁금했나 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꼬맹이가……. 꼬맹이가……. 나한테 편지를 줬단 말이다…….”

한 번 궁금한 게 생기면 알아낼 때까지 달라붙는 게 이안의 성격임을 잘 알고 있던 시하루가 한숨을 내쉬며 결국 입을 열었다. 최대한 말에서 ‘기쁨’이나 ‘설렘’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힘겹게 꾹 참으면서.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감격하는 듯한 시하루와 달리 그의 말을 들은 이안이 무섭다는 듯 재빠르게 그에게서 멀어지며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런, 그럼 그 편지 그냥 버리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왜.”

감격으로 인해 상승해있던 시하루의 기분이 찬물을 끼얹는 듯한 이안의 발언에 하강 곡선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안 역시 자신이 무슨 지뢰라도 밟았다는 듯 잠시 주춤거렸지만 이내 마음을 정리한 것인지 뭔가 결심한 눈빛으로 시하루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잇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보나 마나 제대로 된 편지는 아닐 거 같아서요. 분명 시하루 님은 의도하지 않았다지만 그쪽에서는 악(惡)감정이 가득할 텐데 편지를 보냈다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안.”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네?”

그러나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중간에 싹둑 끊기고 말았다.

어디 사는 성질 더러운 누구에 의해 말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옷 벗어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네?!”

이안이 놀라 펄쩍 뛰며 뒤로 물러서자 아까와는 달리 얼굴에 짜증이 가득한 시하루가 그를 바라보며 천연덕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뭘 놀라. 그럼 너 내 옷을 입고 돌아가려고 했나?”

말에서 가시가 느껴지는 게 다시는 자신의 주군이 기분이 좋을 때 멋대로 끼어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이안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그럼 제 옷을 돌려주셔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내가 벌거벗고 본궁까지 돌아가는 게 나을까 네가 그러는 게 나을까.”

조심스럽게,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다시 붙여보는 이안이 불쌍할 만도 한데 정작 시하루는 그런 거 모른다는 듯 말도 안 되는 협박을 하며 매몰차게 그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제가 낫겠네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잘 알고 있네.”

결국, 오늘도 이안이 먼저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며 상의를 주섬주섬 벗기 시작했고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시하루가 잠시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편지에 시선을 고정하더니 궁에 가서 읽기는 너무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듯 조심스럽게 겉봉을 뜯어냈다.

마치 조금이라도 찢어지면 안 된다는 듯 세심한 그의 손길에 의해 안에 고이 모셔져 있던 종이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잔뜩 긴장해 있던 시하루가 깊게 심호흡을 한 뒤 편지를 촤르륵 하고 펼쳐 읽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시, 시하루 님?”

한편, 이미 상의를 탈의한 이안이 지금이라도 좋으니 제발 그의 마음이 바뀌기를 간절히 바라는 눈빛으로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편지의 내용이 자신이 예상한 대로 악감정을 가득 담은 저주들과 시하루를 향한 욕들이 분명할 거란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주군의 기분이 더 나빠지기 전에 빨리 움직이는 게 좋았다. 안 그럼 괜히 불똥이 튈 테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안!”

갑자기 바빠진 이안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는데 아직 편지에 얼굴이 가려져 표정으로 판단할 수 없는 시하루가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놀란 이안의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리고 긴장된 표정으로 시하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봐라…….”

무슨 생각인지 이랑이 그에게 써줬다는 편지를 이안에게 넘기는 시하루.

그의 행동에 가장 답답한 건 이안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자신에게 보여줘서 뭘 어쩌려고?

그래도 일단 주군의 명령이니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 그리고 사실 편지 내용이 궁금하기도 했었다. 편지를 집어들은 이안은 조심스럽게 내용을 훑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나름대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봤지! 이래도 그 꼬맹이가 나한테 악감정이 있을 거라 생각할 건가?”

말도 안 되는 그 편지의 내용을 몽땅 읽은 이안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시하루의 얼굴에 꽃들이 활짝 만개해 있는 상태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그런가 보네요.”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괜히 안 좋은 말을 했다가 그의 기분을 거스른다면 그 보복이 또다시 자신에게 올 거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안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이안. 잠깐만 기다려라. 내가 먼저 들어가서 옷 갈아입고 네 옷 갖다 줄 테니까.”

지금 당장 벗으라고 엄포를 놓더니 기껏 상의까지 탈의했건만 언제 그런 명령을 했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잽싸게 자신의 궁으로 들어가 버리는 시하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안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뭔가 짜증이 나는데 말을 못 하겠네.”

그러고는 아직도 자신의 손안에 들려 있는 그 편지를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 내려가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안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말도 안 돼. 이렇게 나올 왕후님이 아닐 텐데…….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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