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花 * 궁 안에 잠들어 있는 꽃 (3)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괜찮아. 지금까지는 완벽하니까.”
유시후가 지금 이랑의 모습을 본다면 분명 화를 내며 난리를 치겠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제 그녀가 일찍 잠이 들어버린 바람에 짧게 끝난 유시후의 설교는 아침이 되기 무섭게 잊지 않고 연장이 되었고, 그 바람에 정신없는 아침을 맞이해 머리가 복잡한 이랑이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고. 뭐 때문에 나갔느냐, 어떻게 나갔느냐, 나가서 뭘 했느냐, 누굴 만났느냐……등의 추궁에 대한 그럴싸한 변명을 늘어놓느라 그녀의 머릿속 용량은 기준치 초과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가 끝나기 무섭게 또다시 탈출을 시도하고 있는 이랑이 학습능력이 없는 건지, 아니면 끈질긴 건지…….
하지만 이랑이 처음 시도해본 자신과 친분 없는 ‘운동’ 이상의 체력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이번 탈출방법이 두 번은 못 할 짓이라고 판단 내렸을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제 조금. 조금만 더 가면…….”
오늘은 기필코 전해 주리라. 폐위희망서!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내가 얼마나 정성 들여가며 썼는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던 이랑은 주위의 시선을 의식 못 하고 있었지만, 그 많은 시선 중에서도 특별한 이의 시선이 섞여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흐음…….”
나름대로 담 위를 우아하게 걸어가는 고양이의 모습에서 착안해낸 탈출 방법이었지만, 안정성이 너무나 떨어진다는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양팔을 벌리고 균형을 유지하며 조심조심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보는 이들의 애간장을 녹이고 있는 그녀는 금방이라도 담 위에서 떨어질 듯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시하루님. 그만 들어가셔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또 위험한 짓을 하고 있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예?”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니야.”
그의 옆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는 대신 한 명의 재촉에 살짝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던 시하루가 손을 들어 보이며 말없이 대신의 말을 거절했다.
그러고는 물러가라는 듯 고갯짓으로 명령하고 다시 무언가에 시선을 고정하더니 결국에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게 헛것이 아니란 판단에 이르렀는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거기 올라가서 뭐하는 거야?”
이랑이 반사적으로 유시후에게 들킨 줄 알고 깜짝 놀라는 바람에 애써 유지하고 있던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재빨리 낮은 자세를 잡은 덕에 떨어지는 사고는 피할 수 있었지만.
“어? 꽃따리 오빠. 안녕하세요.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는 정신이 없어서 감사 인사도 못 했네요.”
저번에 미처 하지 못해 안 그래도 신경이 쓰였던 감사 인사를 하고 나니 속이 이렇게 후련하다는 듯한 이랑이었지만 순간 균형을 잃어 휘청거린 이랑 때문에 놀란 시하루는 얼굴이 파랗게 질릴 정도로 놀라 보였다.
“그나저나 유시후는 지금쯤 나를 찾느라 뼈 빠지게 일하고 있을 텐데 오빠는 일 안 하고 뭐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안 되죠.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보탬이…….”
“글쎄, 설교를 들어야 하는 입장은 내가 아니라 너 같은데 말이야.”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는 자신에게 맞춰 옆에서 따라 걷기 시작한 그가 너무도 신경이 쓰여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이랑이었다. 이건 또 색다른 감시 방법이었다. 사람을 정신적으로 몰아붙이는 정신공격.
일단 더 나아가기를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약간 자존심 상한다는 표정으로,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보기보다는 안 무겁거든요? 저 하나 올라갔다고 무너질 담이 아니라고요.”
“아니, 그 문제가 아니라.”
“그럼 뭐가 문제?”
애당초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이랑의 태도에 그는 어디서부터 지적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뭐냐……. 차라도 한 잔 할래?”
일단은 그녀를 내려오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결국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를 말을 내뱉은 그는 이미 완전히 이랑의 대화에 끌려가고 있었다.
잠시 아무 말 없이 자신에게 차 한 잔의 여유를 권한 시하루를 바라보던 이랑이 곧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도와주겠다는 듯 손을 뻗는 시하루였지만, 그의 도움을 무시하기라도 하는 듯 쉽게 폴짝하고 뛰어내리는 이랑이었다.
“아니, 무슨 여자가 이렇게 겁이 없어.”
“헤헤. 내가 키는 작아도 용감해요.”
칭찬이 아닌데 멋대로 칭찬으로 받아들이고 실실 웃고 있는 이랑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시하루가 따라오라는 듯 앞장서기 시작했다.
“아. 나 알아요.”
“뭘?”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제는 그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걱정부터 드는 그였다.
“책에서 읽었어요. 남자가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작업을 걸기 위해 하는 가장 흔한 대사라고요.”
“꿈도 야무져.”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시하루가 자신의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랑이 전부터 뭔가 이상했었다는 표정으로 그를 향해 물었다.
“저기요……. 생각해보니까 이상해요.”
“뭐가?”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이 대화가요.”
“그래. 나는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이랑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고 있던 시하루는 다음으로 오는 이랑의 뜬금발언에 그 뜨거운 차를 쏟고 말았다.
“말 길이가 짧아요.”
“뭐?”
지금 누가 누구한테 하는 소리냐는 듯한 그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랑은 잠시 이걸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듯 보였다.
“아. 나 진짜……. 이것만은 내 입으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특별히 꽃따리 오빠한테만 알려줄게요. 하지만 특급 비밀이니까 절대 말하면 안 돼요. 알았죠?”
“그래.”
“제가 이래봬도 사실은 이 나라 왕후랍니다.”
하루는 절대 잘난 척이라던가 정신이 나간 게 아니라 강조까지 하는 이랑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아……. 그렇구나…….”
무미건조한 그의 반응을 제멋대로 ‘놀라움’과 ‘경악’으로 받아드린 이랑이 고개를 돌리고 실실 웃기 시작했다.
“아. 하지만 괜찮아요. 솔직히 그렇게 신경 쓰고 있지도 않으니까. 편하게 말 놓으세요.”
“어……. 고마워.”
인심 썼다는 말투에 시하루가 저도 모르게 감사를 표하기까지 했다.
솔직히 높은 지위를 갖고 있으면 뭐하나? 쓸 수가 없는 그냥 이름뿐인 지위.
그냥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게 편한 이랑이었다.
“……아. 그런데 아까 네가 말한……. 그……. ‘꽃따리 오빠’? 그건 뭐지?”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신경 쓰였다는 듯 화제전환을 시도하는 시하루.
“아. 요즘 꽃같이 예쁜 남자들이 대세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오빠는 나한테 꽃 따다 준 오빠니까. 꽃따리 오빠. 어감 좋지 않아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시하루가 눈앞에 앉아있는 이랑이란 여인에 대한 탐구에 들어간 사이, 정작 관찰 대상이 그녀는 눈앞에 놓인 다과를 폭풍 흡입하기 시작했다.
“제가 영희궁에서만 지내서 잘 몰랐는데 궐이 장난 아니게 넓네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요.”
“뭘 찾는 건데? 도와줄게.”
그냥 내버려두면 또다시 위험한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 그녀의 목적성사에 보탬이 되어보겠다 말하는 그였다.
“정말요? 그럼 여기서 10대 후반~20대 초반의 남자들이 많은 곳이 어디예요?”
도와준다고 해서 신이 나서 말한 이랑이었는데, 어째 눈앞의 남자의 표정은 신은커녕, 오히려 정신적으로 피곤해 보였다.
“…… 그 구체적인 연령조건의 이유가 궁금한데?”
“찾으려면 나랑 비슷한 연령대를 찾아야지요.”
“뭘?”
도와준다고 해놓고 왜 그렇게 쓸데없는 질문이 많으냐는 듯한 표정.
“새로운 낭군님. 처음에는 전하를 만나기 위해 중앙의 본궁을 찾으려고 했는데요, 아직은 그 정도의 용기가 나지 않아서 말이에요.”
“…….”
다시 모든 움직임 정지.
순간 아무 말도 없는 시하루의 반응에 설마 이제 와서 도와줄 수 없다는 등의 말을 들을까 걱정이 되는 이랑이었다.
“…… 너 아까 이 나라 왕후라고…….”
지금 자신이 나누고 있는 대화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는 그는 차분히 하나하나 풀어나갈 생각으로 대화의 초반부로 되돌아갔다.
“때려치울 거예요.”
“……뭐?”
“더 이상은 답답해서 못 하겠거든요.”
“하지만…….”
“이미 천유국(國)은 수십 년 전부터 이혼(離婚)이 허가되었어요. 초기에는 귀족들만이 할 수 있었지만, 점차 확대되어 평민들도 할 수 있게 되었고요. 물론 왕실에서의 전례는 없었지만, 저도 이 나라 사람인데 안 될 이유는 없지 않겠어요?”
다른 나라와 달리 평등하며, 백성들의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려 노력하는 나라. 그것이 ‘천유국’이었다.
“제가 그 긴 시간 동안 영희궁 안에서 가만히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거든요.”
“무슨 뜻이야?”
또다시 긴 설명을 해야 할 거 같다 생각한 이랑이 의자를 앞으로 당겨 앉으며 자세를 고쳤다. 그리고 좀 더 심도 있는 대화가 시작되려고 할 참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랑 님! 도대체 어디 계세요!”
즉각 반응을 보이는 이랑.
그녀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지금 당장에라도 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그녀의 눈은 다급하게 탈출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아까 나 도와준다고 했던 거 절대 잊으면 안 돼요.”
도망치기 바쁘면서도 다짐을 받아내고 있는 이랑이었다.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시하루였지만, 그의 표정은 곧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복잡한 표정으로 변했다.
과연 도망치는 발 하나는 빠른 이랑이 그의 시선에서 사라지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정원 안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던 주범이 사라지고 나니 남는 건 고요함 뿐. 거기에 너무도 바람같이 흘러간 ‘대화’(사실은 통보)에 정신이 없는 시하루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뒤에서 가만히 서 있다가 멍하니 방금 이랑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곁으로 다가온 측근 한 명이 식어버린 차를 버리고 새로운 차를 따라주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나……. 방금…….”
정신 줄을 놓고 있던 그가 시선은 여전히 문에 유지한 채 조용히 말을 꺼내자, 이랑의 빈자리를 정리하겠다는 듯 분주하던 측근이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차이셨네요. 시하루 님. 그것도 뭐 한번 제대로 시작해보기도 전에.”
고개를 푹 숙인 시하루를 엄청나게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쯧쯧……. 그러게 좀 잘하지 그러셨습니까. 도대체 십 년 동안 뭐하신 겁니까?”
“연회(宴會)?”
“네.”
‘연회(宴會)’.
그것은 축하, 위로, 환영, 석별 등을 위해 여러 사람이 모여 베푸는 잔치. 즉 누군가를 축복해줘야 한다거나 위로, 또는 다 함께 슬퍼해 줘야 하는 문화의 하나라는 거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잘 알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축복보다도 연회 하면 따라오는 다른 부가적인 무언가가 떠오르고 있었다.
“침 닦으세요. 무슨 생각하는지 얼굴에 다 드러납니다.”
“씁……. 그게 또 드러났군……. 아니,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솔직히……. 생각해 봐. 연회(宴會)라면 그거잖아? 딱 떠오르는 게 그거밖에 없는 거잖아? 그거.”
“그게 뭔데요.”
이미 다 알고 있는 눈빛이었지만 오늘도 유시후는 이랑에게 스스로 입으로 자폭하기를 권유하고 있었다.
“나, 나도 가도 될까? 미리 말해두는데 절대로 먹을 거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야.”
“그러면 뭐 때문이신데요?”
“당연히 순수하게 축하해주려는 마음이지. 아, 축하 연회 맞나? 아니면 위로라던가. 기타 등등.”
절대 자신은 연회음식이 탐이 나는 게 아니라는 말을 쓸데없이 여러 번 강조를 한 이랑이었지만, 이미 그녀의 속마음 파악이 끝난 유시후였고, 어떤 방법으로 안 된다고 설득을 하면 좋을지 궁리 중이었다.
솔직히 같은 궁이라지만 이리 무시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영희궁의 식단은 이랑의 만족을 채우기에 한참은 부족했다.
그렇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먹는 거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녀의 식탐을 어떠한 방법으로 잠재우면 좋을까 고민하던 유시후는 결국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 ‘전·하’의 생신 연회인데도요?”
“역시 집 밥이 최고지.”
예상대로 더 이상 함께 참석하겠다는 고집을 부리지 않는 이랑이었다.
사실 아주 순간적으로 그동안 벼르고 벼르던 폐위희망서를 그 연회에 참석해 깜짝 선물처럼 건네줄까도 생각했지만, 그랬다가는 만인의 눈앞에서 왕의 차이는 꼴이 되었으니 아무리 급해도 그건 아니지 싶은 이랑이었다.
“유시후는 참석할 거지?”
‘천유국’에서는 왕의 연회에 꼭 직책 높은 귀족들만 참석하라는 법은 당연히 없었다. 궁 안의 모든 이들이 함께 왕의 생일을 축하해준다. 이것이 관례.
물론 장소의 크기상 모든 이들이 같은 자리에서 합석할 수는 없었지만, 병사들은 그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서 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거기에 유시후는 영희궁을 대표하는 대장이므로 거의 의무참석.
정작 왕후란 여인은 남편의 생일 연회에 참석할 수 없는데 그녀의 호위무사는 의무참석이라니 상당히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닌가 싶다.
“……맛있는 거 꼭 싸올게요.”
이랑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하는 유시후였다. 안타깝게도 그 말로는 현재 이랑의 기분을 풀 수 없었지만.
“국화 화전 싸와. 노란색이 잘 돋보이는 거로.”
“…….”
삐뚤어진 기분은 주위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끼친다.
이랑의 주문에 어이없다는 듯 봄의 화사한 꽃들이 만개한 주위 배경을 쓱 훑어보는 유시후였다.
“……지금 삐치셨다고 일부로 그러는 거죠. 지금 이 계절에 국화꽃이 어디 있습니까. 말이 되는 주문을 하세요.”
“화전 먹고 싶어. 화전!”
“노력해볼게요.”
순간 스쳐 지나가는 이랑의 얼굴에서 ‘이겼다!’라는 미소가 보였지만, 차마 반항하지 못하겠는 유시후였다.
*
“전하의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조용한 영희궁과 너무나 대조되는 분위기의 연회장. 신경을 쓴 듯 보이는 장식들과, 푸짐한 음식. 그리고 덤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함께 만들어진 미소들이 오가는 편안한 자리였다.
이상한 점이 있다면 이 축하연의 대상은 자리에 없었고, 사람들은 그 자리에 없는 이를 위한 축배를 들고 있었다는 것.
한 장소가 아닌, 여러 장소로 나뉘어 축하연을 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모든 장소에 왕이 참석할 수는 없었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대상 없는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뭐야. 유시후. 뭐 찾아?”
“국화꽃 화전……. 없겠지?”
아까부터 맛있어 보이는 진수성찬을 눈앞에 두고 뭔가를 찾는 사람처럼 두리번거리고만 있던 유시후가 얼마나 이상해 보였던지 그의 동료 중 하나가 고민 끝에 말을 걸어 온 것이었다.
“……요즘 네가 많이 힘든가 보구나.”
은근히 그래도 이랑의 당부가 머릿속에 박혀 있던 모양이었다.
자신도 말이 안 되는 주문이라는 거 알고 있으면서도 유시후의 눈은 바쁘게 연회 음식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랑 님이 어떻게든 드시고 싶다고 난리시잖아.”
“큭. 이랑님 귀엽잖아. 그럼 모든 게 용서가 되지 뭐.”
“말 함부로 하지 마라. 그래도 일단은 왕후님이시니까.”
유시후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기들끼리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약간은 무게를 잡고 있던 그도 곧 그들의 생각에 동감이 되는 건지 어느새 함께 따라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웃고 있는 얼굴과는 반대로, 현재 그의 마음은 도저히 눈에 들어올 생각을 않는 화전의 행방에 착잡해지는 중이었으니…….
“유시후. 이렇게 좋은 기회에 안 마실 거야?”
그의 동료 중 한 명이 들고 있던 잔을 그에게 건네며 말하자,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한 잔 하고 갔다가는 이랑 님의 언변(言辯)에 따라갈 수 없어. 맨정신으로도 간당간당하는데.”
“애 돌보느라 시달리는구나……. 쯧쯧. 아직 결혼도 안 한 놈이. 그러고 보니 넌 이랑 님이 입궁하셨을 때 같이 들어왔었지? 정말 궁금하다니까. 너와 이랑 님 사이의 관계가. 분명 뭔가가 있어.”
“관계라고 하니까 생각난 건데, 그 소문 진짜야?”
‘그러고 보니’라는 말을 시작으로 안 그래도 최근 궐 안의 화제로 떠오르고 있는 이야기에 대한 진실을 듣고자 하는 그들이었다.
“……무슨 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전부 헛소문일 거야.”
딱 잘라 말하는 유시후의 답에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는 듯한 표정의 그들이었다.
“하긴 아무리 왕후라고 해도 완벽하지는 않잖아? 그…….”
“대비마마께서는 정말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다니까.”
계속되는 동료의 대화에도 그는 여전히 화전만을 찾고 있었다. 그렇게 유시후는 탁자들을 이리저리 탐색 중. 그리고 그들의 동료는 잔치 중.
하지만 열심히 먹고 마시던 그의 동료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허리를 굽히며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전하!”
“전하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역시 무인이어서 그런지 목소리는 크군.”
자신은 신경 쓰지 말라는 말과 함께 자리를 옮기는 시하루였지만, 이미 이 작은 연회장 안에 지금 자신들이 즐기고 있는 축하연의 대상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빠르게 퍼져 나간 상태였다.
잔뜩 경직된 병사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아직도 화전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유시후만이 정신없이 이 탁자 저 탁자를 배회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를 쉽게 찾을 수 있던 시하루는 곧 자신을 향한 형식적인 인사들을 대충 받아주며 유시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가 있으면 꼭 곁에 있을 법한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뭘 저렇게 찾고 있는 거지? 연회 음식이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아, 아닙니다. 이랑 님이 국화꽃 화전을 구해오라고…….”
“국화? 차로 마시려고 말린 거라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전이라……. 꽤 계절감각 없는 주문이네.”
시하루가 피식 웃으며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귀엽네. 나름 성질 부리는 거잖아.”
주위의 병사들이 그런 시하루의 표정과 어딘가 즐거워 보이는 목소리에 약간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기 시작하자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간 그가 시녀 한 명을 불러서 뭐라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
“……분명 엄청나게 난리 치실 텐데…….”
서서히 뒷일이 걱정스러워지는 유시후는 불안하다는 표정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예상 보복방식들이 줄지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화전 못 구해왔다고 밥을 안 드시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럼 내가 또 고생해야 하는데? 아니야. 고작 이런 걸로 식사를 거르실 분은 아니야. 그럼 이 핑계로 수업을 거부하시면? 내가 또 같이 수업을 들으면서까지 감시를 해야 하잖아! 이랑 님 수업시간이 내 유일한 휴식시간이나 마찬가지인데!”
결국에는 자신은 공부하기 싫다는 발언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는 유시후였다.
그렇게 혼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유시후의 앞에 붉은색의 보자기로 둘러싸인 무언가가 턱 하니 모습을 드러내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이 정체불명의 물체를 놓은 이에 대한 탐구에 들어갔던 유시후는 그 대상의 존재를 깨닫기 무섭게 뒷걸음질부터 치고 말았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은 안 보여도 될 텐데 말이지. 나 일단은 이 나라 왕이야.”
의도는 편하게 생각하라고 한 말 같았지만, 단순히 말의 의미만을 생각해보면 또 그런 거 같지도 않는 대사였다.
일단은 놀라서 인사를 올릴 타이밍은 놓쳤고, 그렇다고 이제야 인사를 올리는 것도 뭐해 어정쩡하게 서 있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유시후였다.
“가져가라. 국화꽃은 없지만, 진달래라면 마음에 들어 할 거야.”
스스로 만족스러운 듯 붉은 보자기로 싼 상자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시하루였지만, 유시후는 그런 배려가 오히려 불편한 듯 보였다.
유시후의 머릿속은 지금 엄청나게 복잡해져 있었다.
이랑은 넓다고 말한 궁궐이지만, 사실 이 궐은 작은 세계와도 같았다. 많은 사람이 지내고 있는 만큼 많은 눈이 있었고, 그 눈들이 받아들인 정보를 단시간에 전달할 수 있는 많은 입이 있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이 궐 안에 비밀이란 없었고, 그만큼 ‘소문’이란 것이 많았으며 소문은 많으면 많을수록 왜곡되기까지 했다.
지난 십 년 동안 그 소문이란 것에 이름을 올릴 일이 없던 이랑이었지만, 최근에 들려오는 소문들 대부분에는 그녀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이는 그동안 왕후를 찾지 않던 왕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온 것인지 갑작스럽게 이랑이 머무는 영희궁에 발걸음 했던 일이 바깥으로 새어나가며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영희궁의 철통과도 같은 방호벽에 정작 소문의 주인공 중 하나인 이랑의 귀에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소문을 들을 때마다 항상 뭔가 불만인 듯한 표정을 짓는 유시후였다.
지금도 자신의 앞에 놓인 보자기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그였으니.
‘도대체 왕은 무슨 생각인 걸까.’
반면에 최근 들어 즐거워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있는 시하루는 피식 웃으며 자신은 볼일을 끝냈으니 이만 가보겠다는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어차피, 아직 그 꼬맹이는 내가 왕이란 걸 눈치채지 못한 거 같으니까.’
뭔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으면서…….
‘다음에는 이쪽에서 찾아가지 뭐.’
그런 즐거워 보이는 시하루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유시후는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났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시하루가 놓고 간 물건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건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집어 들고는 재빠르게 연회장을 빠져나가며 연신 중얼중얼 시끌벅적한 주위에서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설마, 저 왕. 이랑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니겠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이러면 곤란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