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花 * 궁 안에 잠들어 있는 꽃 (2)
연못의 정자 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이랑과 마찬가지로 놀라 보이는 남자가 말없이 서로 마주하고 있었다.
“…….”
“괜찮으세요?”
긴 침묵을 견디지 못한 이랑이 눈을 깜빡거리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그건 내가 해야 하는 말인 거 같은데.”
여기서 ‘괜찮으세요?’라는 질문을 한 것은 어이없게도 이랑의 쪽이었다.
누가 봐도 그녀가 도움을 받고 있다는 걸 알 법한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표정은 정체를 모를 남자의 쪽이 더 위태로워 보였다.
마치 자신이 물에 빠질 뻔했다는 듯.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다시 의미 없는 침묵이 시작되었고, 그 시간 동안 이랑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릴 필요가 있었다.
물에 빠지지 않은 자신과 그런 자신을 붙잡고 있는 이의 손으로 보아, 이 남자가 자신을 구해줬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여기서 말하는 상황 파악이란 ‘도대체 이 남자는 누구인가?’에 관한 문제였다.
짙은 검은색의 머리와 대조되는 새하얀 피부를 가진 남자는 아직도 아무 말 없이 이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름대로 혼란스러워 보이는 남자의 눈빛으로 판단하건대, 아마 그 역시도 지금 이랑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게 눈앞에서 어떤 여자가 떨어질 뻔했는데 이게 ‘불의의 사고’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고의’로 벌인 자살 행각인지 제대로 판단을 해둬야 하는 문제였다.
나름대로 심각한 생각을 하느라 복잡해 보이는 남자와는 달리, 철없는 이랑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된 건지 눈을 반짝이며 ‘관찰’에 들어가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괜찮아?”
자신을 붙잡고 있는 남자를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든 이랑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 때문인지, 남자가 살짝 당황해하는 거 같아 보였지만 그녀는 그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만두지 않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마도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럼 다행이지만.”
무표정이던 남자가 괜찮다는 이랑의 말에 다행이라는 듯 피식 웃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쪽은 괜찮아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나는 멀쩡한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냥 예의상 물어본 거였어요.”
그녀와의 알 수 없는 대화에 조금 전의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남자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흐음…….”
스스로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하는 이랑의 눈에 그의 표정이 들어올 리가 없었지만, 그만큼 그녀는 궁금했다. 자신 못지않게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그 남자의 정체가.
지난 십 년간의 생활을 통해 그녀의 뇌 속에 학습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자기 자신. 유시후. 호위. 궁녀.’
그래서 지금 이랑은 방금 만난 이 생명의 은인에 대한 정체를 그 네 개의 선택지 안에서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일단 첫 번째인 ‘나’는 아니었고, 두 번째인 ‘유시후’도 절대 아니었다. 이건 바보가 아닌 이상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의 궁녀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성별이 다르니까. 그렇다면 네 개의 선택지 안에서 남는 건 단 한 가지뿐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혹시…….”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너는 누구냐.”
이랑이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자신이 내린 결론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그 말을 도중에 끊어버린 걸로 보아 그 역시 그녀 못지않게 궁금하던 참이 분명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저는…….”
영희궁 외부의 사람들과 대화는커녕, 만나는 일조차 하늘의 별 따기인 이랑에게 있어서, 이것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라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긴 시간 동안 남아도는 시간을 사용할 곳은 ‘공부’가 거의 전부였기에 그녀는 꽤 다양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타인과 많은 접촉을 해 본 적은 없어 실전 경험은 적어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이론적으로 잘 알고 있는 이랑이었다.
순간 얼굴에 비친 ‘당황함’을 재빨리 지워버린 그녀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당당하게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소이랑'이라고 합니다. 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완벽해.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하는 인사에서부터 자기소개,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까지 아주 유연하게 이어, 스스로 생각해도 매우 조리 있는 말솜씨였다고 생각하는지 이랑의 표정에서는 뭔가 의미 모를 뿌듯함이 보였다.
그렇게 스스로 뿌듯함을 느끼는 듯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 멍하니 정신 줄을 놓고 있던 남자가 피식 웃어버렸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니 그건 됐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런데 누구세요?”
하지만 그 웃음도 잠시.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저도 제 소개를 했으니 그쪽도 소개를 해주시는 게 도리죠.”
자신이 이름을 밝혔으니 당신 역시 나에게 이름을 알려주는 게 예의가 아니냐는 듯한 이랑의 질문에 잠시 표정을 굳히는 남자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왜요? 제 이름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눈앞의 남자가 순간적으로 인상을 쓴 게 자신의 이름이 이상하기 때문에 나온 반응이라고 오해를 한 건지 이랑이 살짝 눈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묻자 남자가 당황한 듯 보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니, 그게 아니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그쪽 이름도 알려주세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내 이름은 알아서 뭐하려고?”
어째서인지 그냥 이름을 알려주면 끝나는 상황이건만 말하기 싫어서 버티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이랑이 아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럼 그쪽은 뭐하려고 저의 이름을 물어 본 거였어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야 그건…….”
그에게 있어서 눈앞의 여인은 당최 예측할 수 없는 여인임이 틀림없었다.
확실히 더 이상 그가 이랑에게 할 말은 없었고, 이 대화에서는 완벽한 패배자였다.
잠시 어떠한 이유로 고민하는가 싶던 그가 무거웠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나는 시하루라고 한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시하루! 반드시 기억해 둘게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서 뭐하려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의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고개를 돌려, 방금 이랑이 떨어질 뻔한 연못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잠깐 바라보던 연못 위에 비친 분홍빛의 물체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을 향해 다가갔다.
정자의 끝을 몇 발자국 앞에 둔 그는 뭔가 발견했다는 듯한 잠깐 고개를 밖으로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곧 ‘설마…….’ 란 표정으로 이랑을 돌아보다가 난간에 올라 조심스럽게 몸을 굽혔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이랑은 그제야 조금 전 자신이 한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 짓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저기요. 위험한데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었나 보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일단 진정하시고. 내려오세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난 지금 냉정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네가 말할 자격이 있느냐는 듯한 말에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는 이랑이었다.
입이 열 개여도 아무 말 할 수 없는 처지임을 자신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의 샐쭉한 표정에 웃으면서도 아슬아슬하게 난간에 한쪽 다리를 걸치고 한 손으로는 나무 기둥을 붙잡은 채 몸을 숙여 무언가를 하고 있는 그.
그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곧 그의 손에는 이랑이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연꽃이 들려 있었다. 아마도 비교적 작은 체구의 이랑보다는 긴 팔을 이용해 그녀가 실패했던 연꽃을 따는 일에 성공했나 보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설마 이거 때문이야?”
자신의 손에 들린 연꽃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이랑을 바라보며 그가 묻자, 잠시 뜨끔한 듯 보이던 그녀가 고개를 완강히 저으며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설마 제가 그 별것도 아닌 예쁘고 화려한 꽃 때문에 위험한 짓을 했겠어요? 전 절대 그런 경솔한 짓을 하는 어린애가 아니라고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정말 별것도 아닌 거 맞아?”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크흠. 그 부분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죠.”
손까지 휘이 내저으며 그 부분은 넘어가자고 말하는 이랑을 바라보던 그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커다란 연꽃을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줄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우와. 고마워요.”
조금 전까지 관심 없다는 듯이 말할 때는 언제고, 준다는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벌써 두 손을 내밀고 기다리는 그녀였다.
순식간에 ‘이 사람 좋은 사람 같아.’라고 판단을 내린 이랑.
솔직히 영희궁 밖에서 사람을 만나는 건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10년이란 세월이 그렇게 짧은 것도 아니고 그동안 영희궁에서 나오지 않던 왕후란 사람이 이렇게 궐 안에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나면 자신에게 좋은 건 없었으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나저나 시하루는 어디 소속이에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
손안에 한가득 들어오는 연꽃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감상에 젖어 있던 이랑이 나중에 또다시 밖에 나왔을 때를 대비해, 나름 영희궁 밖의 사람과 친분을 쌓아보고자 대화를 시도했는데 어째 시하루라는 남자의 표정은 놀람이 아닌,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순간 자신이 말을 잘못했나 하고 생각에 빠진 이랑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호위무사 아니에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
이미 ‘뭐?’만 연속으로 두 번인 시하루였으니, 그가 당황해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이미 이랑은 그가 호위무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거 같았으니까.
당황하는 시하루와 달리 이랑은 대화를 할 상대를 찾았다는 기쁨 하나만으로 들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그럼 유시후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유시후 알아요? 영희궁 부대의 대장. 나름 유명하다고 하던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미안. 모르겠는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역시. 유시후의 말이 거짓말이었어. 유명은 무슨.”
속아서 분하다는 표정의 이랑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곧 한 대 치기라도 하려는 듯 주먹이 쥐어졌다.
시하루가 건네준 연꽃을 안고, 가만히 서 있던 이랑이 임무를 완수한 그가 정자의 바닥에 털썩 앉자, 그것을 바라보더니 조용히 그 옆으로 다가가더니 그를 따라 바닥에 앉았다.
이랑이 갑자기 자신의 옆에 딸 달라붙어 앉자 순간 놀란 남자였지만 딱히 뭐라 그것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다거나 불만의 말은 하지 않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보아하니 친한 사람인 거 같은데, 처음 보는 내 말을 더 믿는 건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음……. 그렇네요. 하지만 유시후는 평상시에도 거짓말 많이 하니까.”
자신의 옆자리에 자리 잡고 앉은 그녀에게 한마디 할까 하다가 그냥 넘어가고 마는 그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사람 못 쓰겠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그래도 나쁜 의도는 아닐 거예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도대체 어느 쪽인 건데?”
거짓말쟁이라고 뭐라 하던 이랑이 시하루가 함께 맞장구를 쳐주려고 하자 바로 말을 바꿔 그래도 착한 사람이라고 옹호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쪽 편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던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까의 이야기로 되돌아가 그녀에게 물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나저나 내가 소속되어 있는 곳은 알아서 뭐하려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나중에 또 나오면 내가 찾아가려고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나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네.”
연꽃의 하얀 잎을 손으로 장난치듯 만지작거리고 있던 이랑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을 하자 순간 고민에 빠진 시하루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왜?”
혼자 너무 깊이 고민한 듯한 흔적이 그 짧은 침묵에서 느껴졌다.
그의 반문에 이랑이 뭐라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더는 어떠한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음. 왜냐하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소이랑 님!”
아주 순식간이었다.
간만에 대화 좀 통하는 사람 만났다고 좋아라, 들떠 있던 이랑의 표정이 공포에 질린 듯 굳어버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 또 누가…….”
조용했던 정원 안에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에 시하루가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돌렸다.
또 다른 누군가의 등장에 기대하는 듯 보이는 시하루와는 달리 잔뜩 겁을 먹은 듯 시하루를 방패 막으로 딱 달라붙는 이랑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방금 그거 네 이름 아니야? 누가 너 찾나 보던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유시후다! 어떻게 벌써 들킨 거지?!”
우왕좌왕. 계속 ‘어쩌지. 어쩌지.’ 중얼거리며 왔다 갔다를 반복하고 있는 이랑이 눈에 거슬린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던 시하루란 이름의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여는 거 같았지만, 지금 그녀의 귀에는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봐…….”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큰일 났어. 큰일 났다고.”
몰래 밖에 나온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혼날 일인데, 밖에서 사람을 만났다는 걸 들키기라도 하면 더욱더 혼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니, 사실 그것보다도 어쩌면 앞으로 자유시간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이랑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번 건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텐데.”
일단 ‘나왔다.’라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니, 그 점에 대해서는 벌을 받기로 하고, ‘누군가를 만났다.’라는 죄목은 어쩌면 잘 얼버무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저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미안해요! 나 먼저 갈게요. 그래도 나중에 또 봐요. 꼭!”
목소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불안에 떨던 그녀가 마음을 정리한 건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의 외침에 가까운 작별인사를 하고 언제라도 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의 손에 들린 연꽃이 신경이 쓰이기라도 하는 듯 잠시 내려다보더니 곧 큰 결심을 한 듯 슬퍼 보이는 표정으로 그 꽃을 앉아 있던 시하루에게 내밀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야. 필요 없어?”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니 그게 아니라.”
아까 계획한 대로의 ‘누군가를 만났다.’라는 죄목을 없애기 위해서는 이럴 수밖에 없었다.
갖고 싶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 꽃을 가지고 돌아갔다가는 유시후에게 추궁당할 게 분명했으니 괜히 의심을 살 필요는 없었으니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기껏 주셨는데 죄송해요.”
갑자기 나타났다가 제멋대로 인사를 하고는 떠나버린 이랑 때문에 정신이 없는 남자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시하루 님.”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언제부터 있었냐.”
그렇게 얼마 동안 정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던 남자는 곧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어떤 이의 존재에 그제야 이랑이 사라지고 없는 곳을 멍하니 바라보던 시선을 떼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만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알았다.”
자신에게 다가와 시간이 얼마 없음을 강조하는 남자를 향해 ‘알았다’고 대답하며 금방이라도 말을 듣고 행동에 옮길 줄 알았던 시하루의 시선은 아직도 빈 정원을 맴돌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제 말이 말 같지가 않으세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럴 리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멋대로 나가시다니요! 얼마나 위험한지 말씀드렸었잖아요!”
괜히 우물쭈물거리다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모습을 유시후에게 보일 바에는 차라리 스스로 자진출두를 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한 이랑은, 오늘 처음 만난 ‘시하루’라는 남자에게 다급히 작별인사를 하고는 유시후를 찾아가 이리 훈계를 듣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나간다고 말했으면 못 나가게 막았을 거면서…….”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당연하죠.”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
아무리 그녀가 위치상으로는 이 나라의 왕후라지만, 유시후는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곁에서 보필하고 잔소리를 늘어놓고 또 훈계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에게는 꼼짝도 못 하는 이랑이었다.
그녀를 찾으러 가기 전에 이미 한바탕 혼나 기운이 빠진 궁인들이 저 멀리 떨어진 문가에서 고소하다는 듯 이랑이 혼나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저기 있잖아…….”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직 제 말 안 끝났습니다.”
영희궁에서 나오기 전. 혹시 잡힐지 모른다는 가정하에 세워뒀던 몇 가지 변명들이 있었지만, 말을 할 시간도 주지 않은 유시후 때문에 이랑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정말. 오늘은 일단 얼른 들어가셔서 씻고 일찍 주무세요! 아시겠어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응.”
밤을 새워 훈계를 들어도 이상할 상황이 아니었는데 예상외로 유시후의 잔소리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평상시의 그 어떠한 잔소리들보다도 짧았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아……. 피곤하다.”
아무래도 영희궁보다 넓은 세상을 경험한 이랑이 피곤함을 느끼고 꾸벅꾸벅 졸고 있다 보니 더는 잔소리를 늘어놓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방에 들어오기 무섭게 옷을 갈아입고는 침대를 향해 몸을 날린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일 힘 따위 남아 있지 않는다는 듯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숨 가빴던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래도 좋은 사람을 만나 거 같아서 다행이야.”
아까 낮에 정원에서 잠깐 만난 시하루를 떠올리며 실실 웃던 이랑이 중요한 걸 잊었다는 듯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러고 보니 어디 소속인지 못 들었네! 다음에 어떻게 찾아가지?”
자신을 찾는 유시후의 목소리가 들려 반사적으로 도망치느라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것에 안타까워하며 이랑은 다시 드러누웠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뭐……. 또 만나겠지. 어차피 나나 그 사람이나 이 궐 안에 있다는 건 변하지 않으니 말이야.”
계속해서 누워 있다 보니 서서히 몰려오는 잠에 빠져들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는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구겨지지 않도록, 곱게 접은 이랑이 옆에 놓인 작은 상자 안에 그것을 넣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직 포기한 게 아니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물론 오늘은 당황해서 직접 건네주지 못했지만, 기필코 언젠가는 왕을 만나 전해주리라.’
유시후가 알면 불같이 화를 내며 날뛸 좋지 못한 계획과 생각을 하며, 잠이 드는 이랑이었다.
그렇게 이랑이 잠이 든 지 몇 시간 정도가 흐른 늦은 밤.
그 궁의 주인이란 여인은 벌써 잠들어 버려 모르고 있었지만, 낮에 그녀의 행방불명 사건 이외에는 조용했던 영희궁에 그 고요함을 깨버리고도 남을 존재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새하얀 연꽃을 들고 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자, 잠시만요. 잠시만!”
조용하기만 하던 영희궁이 문을 지키는 병사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유시후 님! 유시후 님!”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방 안에서 엄청나게 쌓인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던 유시후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상태로 여전히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일단 정신없이 유시후의 방 안에 들이닥친 병사가 책상 위에 놓인 종이문서들을 바라보더니 일개 호위무사가 뭐 저리 많은 문서를 정리하고 관리하는지 볼 때마다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무슨 일입니까?”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물어오는 유시후의 질문에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긴박한 상황이었는가를 떠올린 병사의 얼굴이 다시 사색이 되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지금 밖에…….”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랑 님이 또 무슨 문제를 일으키셨나요.”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붓을 내려놓는 유시후가 이미 각오했으니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병사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이쯤 되니 이랑의 난동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라는 게 예상되는 유시후였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어느 정도 면역되었으니 말해보세요.”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그……. 밖에. 밖에…….”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이미 영희궁 안에 발을 들여놓은 어떤 이의 존재에 유시후의 걸음이 자동으로 멈추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말도 안 돼. 저 인간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도대체 날 얼마나 더 세워둘 참이냐.”
유시후의 머릿속은 지금 혼돈 그 자체였다.
지금 영희궁에 있는 남자가 자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과 동일인물이 맞는 건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시하루 님.”
틀림없었다.
아직도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가 진짜일 리 없다고 믿고 싶은 유시후였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고 있었다.
분명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이는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처음 뵙겠습니다. 전 이 영희궁을 총괄하고 있는 유시후라고 합니다.”
자동적으로 예의를 갖춘 그의 짧은 자기소개를 듣던 시하루가 고개를 돌려 유시후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 나 너 알아.”
팔을 꼬고 삐딱하게 그를 바라보며 시하루가 재미있는 걸 떠올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의 유시후에게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유명하시다며.”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예?”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누가 그러더라고.”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유시후를 가만히 바라보던 시하루가 이제 귀찮다는 듯 그를 지나쳐 영희궁의 더욱더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자. 이게 절차는 끝났지?”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잠시만요. 시하루 님!”
주위에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혀 망설임 없어 보이는 시하루의 걸음은 곧 어느 방 앞에서 멈추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확인할 게 있어서 그러니 잠깐이면 돼.”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하지만…….”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시끄럽다.”
가볍게 무시하며 문을 열고 들어가 버리는 시하루를 막기 위해 어떻게든 손을 써보려는 유시후였지만 들어가기 무섭게 문을 닫아버려 차마 밖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이들을 뿌리치고 방안에 들어서는 데에 성공한 시하루가 방의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이랑이 누워 있는 침대 곁으로 천천히 다가와 가만히 잠이 든 이랑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이 꼬맹이가 왕후란 말이지?”
그렇게 내려다보기만 하던 그가 침상의 끄트머리에 가볍게 앉더니 짜증난다는 듯 말했다.
아이콘을 끌 수 있습니다. 끄기“아까워라. 나한테 이렇게 예쁜 부인이 있었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