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궁안에 잠들어 있는 꽃-2화 (2/44)

二花 * 궁 안에 잠들어 있는 꽃 (1)

“흐음……. 이거 고민되네…….”

이랑은 지금 고민이 가득해 보였다.

탁자 위에는 색색의 고운 종이들이 놓여 있었고 그 종이들을 진지하게 하나하나 다 만져보기까지 하며 감정을 하고 있던 그녀는 결정 못 하겠다는 듯 결국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인 ‘연노랑’ 색의 종이를 집어 들었다.

“좋았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던 그녀는 곧 옆에 놓인 붓걸이에서 작은 붓 하나를 집어 들고는 본인이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나무 위로 능숙하게 올라가 자리를 잡는 것으로 모든 준비를 끝냈다.

자, 이제 필요한 건 그 목석과도 같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도 남을 글솜씨이다.

“이랑마마. 이랑마마!”

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이쪽에는 안 계십니다.”

기껏 공을 들이면서까지 마음을 비웠건만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이랑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쪽도 찾아보세요. 빨리. 분명히 이 어딘가 계실 겁니다.”

“그럼 저는 반대쪽으로 가겠습니다.”

나름대로 체계적이기까지 한 궁인들의 수색방법이었다.

이랑이 어렸을 때야 얌전하고 말을 잘 들어 나름 편하게 그녀의 곁을 보필하던 궁인들이었지만, 이미 그것은 지나가 버린 과거에 불과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가 꼬인 건지 모를 정도로 이랑은 사춘기를 잘못 보낸 건지 겉모습은 여전히 어린 날의 착한 아이의 모습이지만 내면은 변해 있었다.

그렇다고 말을 안 듣는다는 건 아니었지만, 어느샌가부터 자기주장이 강해지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언변에 겨를 수 있는 이의 수는 줄어들었고, 그 결과 이 좁은 영희궁 안에서 그녀를 이길 이는 없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문제가 있다면 지금 그 유일한 ‘한 사람’이 일이 있어 잠시 영희궁을 비웠다는 것.

어쩌면 자신들이 모시는 왕후님께서는 이미 이러한 사실을 눈치를 채시고 일을 벌이신 게 아닌가 싶은 그들이었다.

“빨리 유시후 님을 모셔와야겠어요.”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초반에는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 일단 이곳저곳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목청껏 그녀의 이름을 외치기나 했지만, 인간이란 적응하는 생물이었으니.

이제는 각자 위치를 맡아가면서까지 포위망을 좁히는 건 물론이요, 어느 정도 실질적인 서열을 파악할 수 있는 안목까지 갖추게 되었다.

“귀찮아지겠어.”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나무 위에 올라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그녀는 가까워져 오는 소음 따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나무에 올라오기 전에 미리 밧줄에 묶어 두었던 작은 나무판자를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조금 전에 자신이 선택한 연노랑의 종이를 그 판자에 대고는 다른 한 손에 들린 붓을 집어 들었다.

“이랑 마마! 수업 들으셔야죠!”

아무리 그들이 긴 시간 동안 그녀를 찾아내는 수색능력이 발전했다지만, 그만큼 이랑의 숨는 능력까지 발전하고 말았으니, 아직까지는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이랑이었다.

주위 소음이 들리든 말든, 그녀의 손에 들린 붓은 움직임을 멈출 생각을 않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에서 간절함이 묻어나오면 묻어나올수록, 연노랑 색의 종이 위를 춤추듯 움직이는 붓 역시 의미가 다른 간절함을 종이에 새기고 있었다.

“…….”

끊길 생각을 않던, 그녀를 찾는 이들의 외침이 어느 순간부터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편지에 신경을 쓰느라 그러한 사실에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던 이랑은 어느 순간 ‘불안’을 감지하고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확인했다.

궐의 구석에 위치한 영희궁에서도 가장 구석에 있는 작은 공간에 자리 잡고 있던 덕분에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춘 그녀는 한 번 주변을 쓱 훑으며 아직 눈에 띄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아직 수업까지는 여유가 있는데, 조금 더 기다려드릴까요?”

“어떻게 벌써 돌아온 거야.”

분명 오늘은 참석해야 하는 회의가 있어 반나절 동안 영희궁을 비워야 할 거 같다는 말을 들었건만 어째서 지금 이곳에 그가 있는 것인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이랑이었다.

“여기저기서 호출이 들어와서 말이죠.”

“……대단한데, 유시후? 찾는 속도가 빨라졌어.”

“칭찬 감사합니다. 툭하면 도망가는 분을 모시다 보면 이 정도는 보통이죠.”

아래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한숨을 내쉬던 이랑이 여전히 시선은 종이에 고정한 채, 하던 일을 계속 했다.

스스로 내려와 주기를 기대했던 유시후가 기회를 준다는 듯 잠시 아무 말 없이 아래에서 기다렸지만 꿈쩍도 않는 이랑이었다.

“어떻게, 제가 올라가는 게 나을까요?”

“아니. 그러지는 마.”

“그럼 더 기다려야 하는 건가요?”

“그럼 나야 좋지.”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의견에 적극 찬성 한다는 뜻을 보이는 이랑을 올려다보던 유시후가 웬일로 알겠다는 듯 피식 웃으며 정말 시간을 주려는 건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섰다.

“그러죠 뭐. 그럼 기다리는 동안 이 상태에서 훈계를 좀 늘어놓겠습니다.”

“잠깐만.”

“……지금 거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수업 빠지시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생각이 바뀌었으니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하는 이랑이었지만, 그녀의 말은 싹둑 잘라버리고 이미 훈계에 들어간 유시후였으니 한 번 시작된 그의 잔소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저라 해도 이렇게 나오시면 화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화 안 내는 것처럼 말한다?”

“제 말의 뜻은 평상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화를 낼 거라 말씀드린 겁니다.”

“평상시보다 더한 게 있어?! 그러고도 인간이야?”

오늘은 평소보다 강도가 높은 협박이 그녀의 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결국, 춤을 추던 손이 멈추고, 자연스럽게 인상을 찌푸린 얼굴로 아래에 있는 이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 작은 영희궁에서도 자신을 왕후 취급 안 하는 이의 화나 보이는 눈빛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아, 진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틈을 안 주네.”

이랑은 과연 유시후가 자신을 왕후로 생각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의심이 들 때가 있었다. 아니, 가끔이 아니라 자주.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시는 건 좋은데 좀 더 고상하게 지내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나무 위 같은 특이한 장소가 아닌 평범한 장소에서.”

“…….”

오늘도 별다른 반항 없이 순순히 내려와 준 이랑이었지만, 그녀의 손에 들린 까만 글자들이 가득한 연노랑의 종이를 본 유시후는 다시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이랑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고만 그였으니 뭔가 일이 터질 게 분명했다.

“유시후는 정말 못됐다니까.”

“글쎄요. 진짜 못된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요.”

자신도 편하게 일을 하고 싶다는 듯 말하는 유시후였다.

“심각할 정도로 쫓아다니고 있잖아.”

가끔 이랑은 생각했다. 눈앞의 남자는 ‘유시후’ 라는 예쁜 이름을 갖고 있었고, 그에 어울리는 예쁘장한 얼굴을 갖고 있음에도 속은 꽉 막혀 있는 게 단점이라는 것을.

“저는 마마님을 보좌하는 게 임무니까요.”

그렇게 싱긋 웃으면서 말하지 마. 더 무서우니까.

“세간(世間)에서는 그런 걸 ‘보좌’라고 안 하는 거 같더라고. 아니, 그냥 알아두라고.”

보좌는 무슨.

안심하게 하기는커녕 자신을 협박하는가 하면, 오히려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느냐고 따져 물으려던 이랑이 곧 생각을 접은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찌 되었든 오늘도 이렇게 그녀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 유시후였으니, 이제 남은 건 그녀를 이대로 별탈 없이 이미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책과 스승에게 던져주고 오는 거뿐이었다.

“빨리 방으로 돌아가세요. 그래야 저도 남은 회의에 참석하죠.”

“수업 지겹단 말이야.”

“자꾸 지겹다. 지겹다 하지 말고 좀 즐겨보세요.”

“재미없는 걸 어떻게 즐겨? 유시후도 매일 나 호위하는 거 즐기라면 즐길 수 있겠어?”

“전 절대 못 하지만. 이랑님이라면 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죽어도 못 한다는 진심이 우러나오는 목소리에 괜히 또 짜증이 날 거 같은 이랑이었다.

찰나의 고민 없이 튀어나온 대답도 한몫했다.

“과제는 다 하셨어요?”

“언제 다 했는데.”

“……그러고 보니 또 책 한 권 떼셔서 다른 거로 넘어갔다고 들었는데…….”

“아……응. 그런데 그것도 곧 끝 날거야.”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는 이랑이었지만 이번에는 지적하지 않는 유시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그녀가 매일 같이 있는 수업을 안 듣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해도 막상 공부할 때는 엄청난 집중력을 보이기도 했고, 또 머리가 나쁘지는 않은지 무언가를 배우는 속도가 매우 빠른 그녀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머리가 나쁘지는 않은지’가 아니라 그 반대였다.

오히려 ‘천재’에 가까울 정도. 그렇기에 그녀가 더더욱 수업을 지루해하고 안 들으려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 유시후였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내가 여기서 이렇게 쓸데없는 공부를 하고 있을 동안, ‘그곳’의 아이들은 분명 엄청난 걸 배우고 있겠지? 나도 얼른 가고 싶다. 빨리 여기를 나가고 싶어.”

공부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그녀는 흥미를 잃으면 태도부터가 달라졌다.

"……또 쓰고 계셨어요? ‘자진 폐위희망서’?"

대화를 ‘공부’에서 다른 것으로 전환하고자 노력하던 유시후의 시선이 이랑의 손에 들린 종이에 고정되었다.

오죽하면 이랑이 그걸 눈치를 챌 정도로. 유시후는 힐끔거리는 게 아니라 정말 대놓고 종이에 시선을 박고 있었다.

여전히 걱정스럽다는 표정과 함께, 마치 그녀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종이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줄인 것처럼.

“슬슬 질리실 때도 된 거 같은데 말이죠.”

이미 처음이 아니었다. 이랑이 자신의 남편이자 이 나라 왕에게 자신을 폐위시켜달라는 문서를 올리기 시작한 건.

왕후가 자신을 스스로를 폐위시켜 달라고 말한 역사적 기록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사건은 또 아니었다. 물론 그것은 남녀평등, 인권보호, 자유의사 및 기타발언 허용 등 자유로운 국가, 천유국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궐 밖에서는 ‘이혼’이라는 것이 더는 어색한 단어가 아니었고, 마을별로 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에서는 따로 이혼을 원하는 부부들을 위한 부서가 만들어져있기도 했다.

그 정도로 개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노력하는 나라 천유국이니 왕후라고 이혼소송을 못 할 것도 없었다. 물론 이 나라 통치자의 자존심에는 아주 약간의 흠집이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매일 한 통씩 보내는데……. 왜 반응이 없는 걸까?"

거의 하루에 한 통씩 편지를 보냈건만 되돌아오는 답변은 없었고 위에서는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십 년 동안 아리따운 나를 이리 내버려뒀으면 이제 됐잖아? 양심이 있으면 이제 그만 얌전히 나를 폐위시키고 너는 네 사랑 찾고, 나는 내 사랑 찾아 떠나게 해주던가! 나도 이제 18살이라고! 언제 한 가정을 꾸려 나가? 안 그래, 유시후?”

“말씀 좀 가려서 하세요. 주위 시선 좀 의식하시고요.”

“말 좀 해봐. 나 어디 이상해?”

“왜 저한테만 물어보시는 건데요!”

타인의 문제에 엮이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유시후가 안 그래도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동의를 구하는 이랑의 질문에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구해줄 구원자를 찾다가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별다른 뜻 없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기 시작했다.

“예. 예. 이랑 님의 말씀이 다 옳아요.”

“그렇지? 유시후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지금 내 생각이 틀린 게 아니지?”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유시후였다. 며칠 전부터 그에게 슬그머니 찾아오고 있던 ‘불안’이라는 그림자가 이제는 확실히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는 거 같았다.

일단 상황을 피하고자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침착하게 다시 생각해 보니 분명 조금 전의 이랑의 질문에는 ‘당신의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라고 똑 부러지게 지적을 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자신이 방금 저지른 실수에 경악하며, 앞으로 이랑의 입에서 나올 말에 벌써 겁을 먹은 유시후였다.

하지만 이랑도 나름 머리 회전이 빨랐기에 현재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걸 입 밖으로 내뱉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자, 유시후도 바쁘다며. 빨리 가자.”

분명 유시후 역시 조만간 자신이 어떤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안 그래도 심했던 간섭과 경계의 정도를 더 높일 게 분명한데, 무심코 계획에 대해 발설했다가는 실행하기도 전에 모든 게 무산되고 말 테니까.

그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엄청난 계획에 주체할 수 없는 미소로 표출된 것을 빼고는 완벽하게 유시후를 속였다고 생각하는 이랑이었다.

‘좋아. 나도 이제 가만히 못 있어. 안 읽어? 그럼 직접 전해주러 갔다 오겠어.’

처음 궁에 들어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영희궁 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 이랑이었기 때문에 왕이 머물고 있는 중앙의 본궁까지 가는 길을 알 리가 없었다. 이건 그녀에게 있어서 거의 모험과도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섣불리 왕을 찾아감으로써 그녀가 얻을 불이익보다도 지금 이랑은 불투명한 자신의 미래가 더욱 불안한 상황이었다.

세상은 만만하게 보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음……. 어디지……."

일단 몸이 안 좋으니 방에서 좀 쉬겠다는 말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는 것까지는 계획대로 되었다.

그리고 계획 중에서 가장 힘들 거라 예상한 몰래 방에서 나와 가장 경비가 허술해진 문을 통해 영희궁에서 벗어나오는 것까지도 일이 너무 술술 풀리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했다.

전에도 말했듯 영희궁은 출입구는 하나이기 때문에 그만큼 그곳에 병사들이 집중되어 있었고, 가장 경비가 삼엄한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곳의 경비만 뚫으면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기도 했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찾아오니.

사실 그동안 평소보다 더욱더 수업을 안 듣고 숨어버리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영희궁 궁인들에게 ‘언제 또 이랑마마가 도망갈지 모른다.’라는 불안감이 싹튼 상태였으니, 과연.

조용한 이랑의 방에, 걱정된 궁녀 한 명이 안으로 들어갔고, 곧 이랑이 없어졌다는 걸 알기 무섭게 궁인들은 영희궁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출입구를 지키던 병사들까지 그 수색에 동원되었다.

그동안 일부러 나무 위 같은 높은 곳에 숨었던 탓인지 이제 그녀를 찾는 궁인들의 시선은 정면이 아닌 하늘을 향해 있었고, 구석구석을 뒤지기보다 영희궁 안에 있는 나무들을 상대로 집중적인 수색이 이루어졌으니, 덕분에 쉽게 비어 있는 문을 통해 빠져나올 수가 있던 그녀였다.

모든 건 그녀의 계획대로.

이쯤 되니 슬슬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기 시작하는 이랑의 눈빛은 당당해야 할 텐데, 늘 반짝거리던 이랑의 눈빛이 이번만큼은 빛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명랑과 긍정의 선도 주자였던 이랑에게서 지금은 ‘혼란’이라는 단어 외에는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너무 넓어…….”

첫째로 막상 영희궁을 나가니 그동안 자신의 궁이 얼마나 좁은 거였음을 실감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나게 넓은 궁의 규모가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고, 둘째로는 여기저기서 각자 자신들의 맡은 바 임무를 다 하느라 정신없게 움직이고 있는 궁인들의 존재였다.

그들 역시 이 시각에 그동안 본 적 없는 여인이, 그것도 단 한 명의 호위를 거느리지도 않고 달랑 혼자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에 분주하게 움직이면서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그녀에게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네.”

불안하다는 듯 흔들리는 시선과 계속해서 주위를 둘러보는 그녀의 행동에서 길을 헤매고 있다는 것쯤 쉽게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 누구도 쉽사리 그녀에게 말을 걸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저 여인의 정체란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아까부터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던 그녀가 차라리 유시후를 꾀어서 길잡이로 데려올 걸 하고 생각하다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불안하게 움직이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

하늘을 담고 있는 맑고 깨끗한 넓은 연못이 딸린 정원에 시선을 빼앗겨 버린 이랑이 조심스럽게 그 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갔다.

“우와. 무슨 연못이 이렇게 넓어!”

그녀가 머물고 있는 영희궁에도 연못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연못’이라기보다는 ‘웅덩이’에 가까운 규모였고, 몇 마리의 붕어들이 한가로이 헤엄치고 있을 뿐이었다.

눈을 반짝거리며 길을 헤매고 있던 불안감은 어디로 던져버렸는지 모를 그녀는 그 연못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마침 연못의 한쪽에 운치 있는 정자 하나가 있었으니 신이나 그곳을 오른 이랑이 난간에 털썩 앉아 고개를 숙여 연못을 내려 보다가 또 다른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게 연꽃인가? 책에서 본 거랑 똑같이 생겼다!”

도감 속 사진으로 만 본 연분홍빛의 연꽃은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장신구에도 응용되는 그 모양은 그녀를 기쁘게 했지만,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꿈에 그리던 연꽃이란 존재를 가까이서 볼 기회였다.

고민에 빠진 이랑이었다. 눈앞의 호기심이냐, 아니면 보이지 않는 자신의 미래를 향한 걸음이냐.

“……잠깐인데 뭐.”

조심스럽게 정자의 난간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아래 연못에 있는 연꽃을 보기 위해 몸을 기울이는 이랑이었다.

분명 곁에 유시후가 있었다면 위험하다고 주의를 받을 상황이었지만, 한 가지에 몰두해 버린 그녀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실제로 보니까 더 예쁘잖아. 역시 그림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뒤쪽에 피어 있는 하얀색의 연꽃을 발견하기 무섭게 잔뜩 흥분한 이랑이 몸을 좀 더 앞쪽으로 숙이기 시작했고, 상체가 난간을 기준으로 더 앞으로 쏠리니 그때쯤 그녀는 느꼈을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었는지를.

“어, 어. 잠깐. 잠깐만!”

그냥 이대로 빠지는가 보다 하고 이랑의 마음은 거의 포기상태에 있었다.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며 몸이 서서히 기울어지는 게 느껴졌고, 질끈 감긴 두 눈 때문에 물에 빠질 낙하 시점을 모르는 그녀였지만, 몇 초가 지나도록 몸에 어떠한 느낌도 없다는 것에 놀란 그녀는 조심스럽게 두 눈을 떴다.

“…….”

“…….”

분명 그녀가 마지막까지도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것은 새하얀 색의 예쁜 연꽃이었건만, 어째서인지 지금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건 그녀 못지않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짙은 검은색 머리의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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