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외전 5화.
“오늘은 피곤하니까 건너뛸까?”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도훈이 은하를 뒤에서 안으며 말했다.
“정말 그래도 돼요?”
“……당신이 너무 피곤하다면 할 수 없지.”
그러면서 도훈의 목소리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말을 할 거면 티를 내지나 말든지.
리훈이를 낳고 3개월 정도 금욕 생활을 했을 때 빼고, 두 사람은 지금도 거의 매일 잠자리를 가졌다.
은하의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가졌던 3개월의 금욕 생활이 오히려 도훈의 성욕을 더 왕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왕성한 성욕이 은하의 감퇴된 성욕도 다시 끌어 올려 버렸다.
아무리 피곤해도 도훈이 만져 주면 오히려 피곤이 풀린 듯했고 잠도 한결 잘 왔다. 그래서 은하는 오늘도 도훈과의 잠자리가 기대되었지만, 괜히 도훈을 놀리고 싶어졌다.
“그럼 정말 오늘은 그냥 자요. 솔직히 너무 피곤해…….”
“진심이야?”
“네…….”
은하가 도훈의 팔에서 벗어나며 침대에 먼저 누웠다. 도훈은 진심으로 당황한 듯 보였다. 그동안 은하가 거부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더 그런 듯했다.
“그래……. 그럼.”
도훈은 할 수 없다는 듯 은하 옆에 얌전히 누웠다.
“편하게 자. 오늘은 정말 안 건드릴게.”
“네.”
은하는 웃으면서 도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도훈이 당혹한 표정으로 은하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바짝 붙어 있으면 내 말에 책임질 수가 없는데…….”
“근데 나도 도훈 씨랑 이렇게 안고 자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는데…….”
“뭐야, 당신.”
“바보예요? 나도 당신이랑 하는 거 좋단 말이에요.”
“난 당신이 오늘 너무 피곤해하니까…….”
“난 매일 피곤한데? 그래도 당신이 안아 주는 게 좋아요.”
“……당신은 정말 너무 사랑스러워.”
도훈이 은하의 이마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입술에도 입을 맞췄다.
“으음…….”
키스가 깊어지는 만큼 두 사람의 겹쳐진 몸에 점점 열기가 고조됐다. 역시나 피곤함도 사라지는 이상한 마법이었다.
“참, 피임해야 돼요. 나 오늘 배란기야.”
“아…….”
도훈은 아쉬움을 담아 은하의 귓불을 입술로 핥아 내리며 속삭였다.
“그러지 말고 오늘 우리 둘째 만들까?”
“네?”
“이제 리훈이도 돌도 됐고, 슬슬 동생 생각도 나는 건 사실이니까.”
도훈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은하의 몸을 파고들었다. 은하의 성감대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고 움직이니 은하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으읏……. 도훈 씨.”
순식간에 밀려드는 야릇한 감각에 은하가 도훈의 머리를 붙잡으며 신음 소리를 흘렸다.
“왜 대답이 없어……?”
한참을 은하의 아래에서 희롱하던 도훈이 고개를 들고 번들거리는 입술로 은하에게 재차 물었다.
“언제는 둘째 낳자더니, 이제는 마음이 변한 건가?”
“으읏……. 그러는 당신은……. 둘째 안 낳겠다더니 마음이 변했어요?”
은하가 가까스로 대답했다. 농담에 농담으로 응수한 것이다.
그리고 사실이기도 했다. 도훈은 은하가 리훈을 낳을 때 너무 힘들어 보인다며 둘째는 생각도 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난 당신이 힘들까 봐 그런 거고. 당신만 원한다면 언제든 둘째 생각이 있지. 리훈이도 동생이 있는 게 훨씬 나을 테고.”
“그렇긴 한데……. 읏.”
도훈이 다시 아래를 공략하자 은하의 대답이 절로 끊어졌다. 숨 고르기도 바쁜 탓이었다.
“그렇긴 한데, 뭐지?”
도훈도 그제야 은하의 마음을 더 듣고 싶다는 듯 잠시 행동을 멈췄다. 하지만 은하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은하도 둘째를 원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끝내 입을 열었다.
“그냥……. 지금은 그냥 피임해요. 네?”
“당신이 원한다면 그래야지…….”
“서운해요?”
“아니야. 리훈이 키우면서 당신이 많이 힘들어서 그런 거 다 알아. 유모라도 붙이면 한결 나을 텐데 꼭 자기 손으로 키우고 싶다고 하니까, 내가 당신 고집을 어떻게 말리겠어.”
분명 조금은 서운할 텐데도 도훈은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은하를 안는 데 더 열중했다. 때론 부드럽게, 때론 과격하게 은하의 몸을 어루만지면서 은하에게 다른 생각은 한 치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 도훈의 손길에 은하의 몸은 사르르 녹아 버리는 기분이었다. 언제나처럼 뜨거운 두 사람의 열기가 방 안을 가득 메웠고 은하는 금세 절정에 올라 허우적댔다.
그럼에도 도훈은 은하를 놓아주지 않고 몇 번이나 더 절정을 맞게 했다.
“언제든 당신이 갖고 싶을 때 가지자. 난 언제라도 좋으니까.”
“…….”
모든 행위가 끝나고 도훈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은하도 더는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자꾸만 거짓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아서.
“도훈 씨……. 실은요.”
“응?”
“둘째 얘기에 제가 대답을 못 하는 건 리훈이 키우느라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저……. 공부가 하고 싶어요.”
“공부?”
“네. 미국에서 휴학하고 돌아가질 못했잖아요.”
“아……. 그렇지. 하지만 다시 미국으로 보내 달라고는 하지 마. 그건 불가능해.”
아무리 유학 형식으로 간다고 해도 몇 년은 떨어져야 할 텐데, 도훈은 그렇게 은하와 떨어져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리훈을 키우는 건 또 어쩌고.
도훈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걸 보고 은하가 웃으면서 그를 달랬다.
“당연히 저도 그렇게까지는 욕심 안 내요. 그냥……. 서울에 있는 학교에 편입해서 다시 공부하면 안 될까요?”
“편입?”
“네. 알아보니까 편입 학원도 꽤 많이 있고, 연말에 학교마다 편입생을 뽑더라고요. 도훈 씨가 허락해 주면 편입 시험 준비해 보고 싶어서요.”
“설마 그래서 요즘 자주 서재에 있었던 거야?”
“네. 사실 전공 서적을 좀 봤어요. 너무 생소하면 또 안 될 테니까.”
도훈은 그제야 최근 들어 달라진 은하의 낯선 행동을 이해했다.
은하는 요즘 들어 자주 서재를 들락거렸다. 또한 둘이 있을 때도 예전에는 잘 하지 않던 휴대폰을 자주 응시하곤 했었다.
사소한 변화긴 했지만 도훈의 입장에서는 크게 느껴지곤 했었다. 혹시라도 결혼 생활에 지쳐서 나오는 행동인가 걱정했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편입 시험을 준비하고 싶어서 그런 거였다니.
그러게, 왜. 은하가 공부가 하고 싶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까.
도훈은 자신의 둔함을 인정해야 했다.
“진작 말하지 그랬어? 난 것도 모르고……. 괜히 당신이 달라진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혹시 내가 반대할까 봐 걱정했어?”
“아뇨. 내가 자신이 없었어요. 지금도 이렇게 욕심내는 게 잘하는 건지 모르겠고요.”
솔직히 아이를 키우면서 공부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원한다면 언제든 사람을 불러 도움을 받을 순 있었으나 그래도 웬만해서는 직접 신경 쓰며 리훈이를 키우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두 가지 다 잘해 낼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던 것이었다.
지금도 도훈이 둘째 이야기를 하니까, 굳이 다시 공부하지 말고 둘째를 낳은 뒤 두 아이를 잘 키우는 것도 보람되지 않을까 싶어 흔들리는 중이었다.
“내가 눈치가 없었네. 아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내 욕심에 둘째 이야기까지 꺼냈으니.”
“그건 아니에요. 나도 둘째 너무 낳고 싶은데…….”
흔들리는 은하의 마음을 읽은 도훈이 얼른 그녀를 다독였다.
“둘째는 언제든 또 낳을 수 있잖아. 당신 아직 젊은데, 뭐. 나도 공부가 먼저라고 생각해. 그리고 당신은 잘할 거야. 내가 많이 도와줄게.”
“고마워요. 이해해 줘서.”
도훈이 은하의 마음을 응원한다는 듯 그녀를 끌어안고는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공부가 하고 싶으면 그냥 하겠다고 선언했으면 됐을 텐데, 저를 배려하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도훈은 미소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은하가 원하는 학교의 편입 시험은 12월에 치러졌다.
1년여를 준비했는데 시험은 단 몇 시간이었다. 그래도 시험을 치고 나오니 속이 다 후련했다.
“은하야!”
“여보!”
한창 바쁜 시기라 기대도 안 했는데 도훈이 대학교까지 찾아왔다. 은하는 얼른 도훈에게 달려갔다.
오랫동안 준비한 시험을 끝마친 후련함에 누군가와 수다를 떨고 싶었는데, 마침 도훈이 찾아오니 너무 좋았다.
특히 사람들이 힐끗거릴 정도로 멋진 옷차림을 하고 저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백마 탄 왕자가 따로 없었다.
“시험 잘 봤어?”
“잘 모르겠어요.”
“당연히 잘 봤겠지. 당신이 누군데.”
도훈이 은하를 꼭 안아 주며 대꾸했다.
“그러다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럼 더 좋고. 바로 둘째 만들 거니까.”
도훈의 장난에 은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나저나 당신이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오늘 바이어 미팅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시험을 보는데 그깟 미팅이 중요해?”
“당연히 중요하죠. 당신은 당신 일을 해야죠. 나는 내 삶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고.”
“걱정 마. 내 일에 지장 안 가게 정리하고 온 거니까. 가자. 고생했어.”
“네.”
은하는 도훈의 팔에 팔짱을 끼며 함께 차로 걸었다. 시험을 본 곳과 주차장이 조금 떨어져 있다 보니 두 사람은 나란히 교정을 걷게 되었다.
제대로 된 데이트도 없이 바로 결혼을 하고, 또 바로 아이를 가졌다 보니 이런 소소한 행위가 참으로 소중한 기분이었다.
“기분이 이상해요.”
“뭐가?”
“당신과 캠퍼스를 걷는 기분이요. 마치 대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아.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그때부터 사귀었다면 우리 어땠을까요? 그래도 결혼했을까요?”
“글쎄…….”
스무 살, 대학교 1학년 때 그를 만났다. 물론 교정에서는 아니었지만 그에게 첫눈에 반한 건 사실이니까.
그때처럼 이상한 상황이 아니라 좋은 기회로 그를 만나 제대로 사귀었다면 지금쯤 어떻게 돼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결혼도 다 때가 있다는데……. 그때 만나서 사귀었다면 우린 헤어졌을 수도 있겠다. 그렇죠?”
“그럴 리가……. 내가 당신을 절대로 놓치지 않았을 거야.”
도훈의 확고한 대답에 은하가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자 도훈이 정색하며 덧붙였다.
“당신이 대학에 다니는 거, 다시 생각 좀 해 봐야겠어.”
“왜요?”
“너무 매력적이니까. 지금 여기 지나가는 학생들 중에서도 당신이 단연 최고야.”
“말도 안 돼.”
“정말이야. 당신이 정말로 이곳 대학생이 되면 나만 피곤하게 생겼어.”
도훈의 진지한 말에 결국 은하는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버렸다.
“아……. 당신 그렇게 웃지 말라니까. 그럴 때마다 너무 안고 싶다고 했잖아.”
그럼에도 은하가 아랑곳하지 않고 환하게 웃자, 도훈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머. 도훈 씨.”
“당신이 먼저 내 마음에 기름을 부었으니까.”
그러고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득하게 입을 맞췄다. 은하는 좋으면서도 내심 사람들이 신경 쓰여서 얼른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사람들 다 봐요. 저 사람들 여기서 뭐 하냐고…….”
“아마 다들 부러워하겠지. 선남선녀라고도 생각할 테고.”
도훈의 너스레에 은하도 그만 다시 웃고 말았다.
“이리 들어와, 추워.”
그때 도훈이 코트 자락을 열어 은하를 품 안에 쏙 안았다.
“따뜻해요.”
“난 행복해.”
“사랑해요.”
“내가 더 많이.”
“리훈이 보고 싶어요. 얼른 가요.”
“그래.”
도훈은 은하를 꼭 끌어안고 차를 향해 걸었다.
하늘에서는 두 사람의 행복을 기원하듯 어느덧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특별 외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