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외전 3화.
도훈은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바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리훈이 태어나고 나서 새로 생긴 버릇이었다. 데시벨이 높은 초인종 소리를 듣고 리훈이가 자다가 깨거나 놀랄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부엌에서 집안일을 보던 고용인이 놀라서 달려왔다.
“아니, 부사장님. 이 시간에는 어쩐 일이세요?”
“집사람은 어디 갔습니까?”
“안에서 훈이 재우고 있어요. 방금 밥 먹이고 지금 낮잠 재울 시간이라서요.”
“그럼 조용히 해 주세요. 제가 직접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 네.”
“아, 그리고 집사람 아직 식사 전이죠?”
“네. 훈이 재우고 드신다고요.”
“이거 초밥인데요. 이 사람 나오면 식사 가능하게 세팅 좀 부탁드릴게요. 하나는 아주머니 거예요.”
“어머, 제 것까지. 감사합니다.”
도훈은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넘기고 리훈의 방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은하는 리훈을 재우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도훈은 그런 은하가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가서, 점심 먹고 좀 자. 내가 할게.”
“어머. 도훈 씨!”
은하는 졸다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 바람에 리훈이 깨서 으앙 울음을 터트렸다.
“어, 미안……. 쉬이……. 더 자.”
도훈이 리훈을 토닥이며 달랬다. 다행히 리훈은 금세 또 눈을 감았다.
“정말 웬일이에요, 이 시간에? 저는 꿈꾼 줄 알았어요.”
은하가 이번에는 목소리를 낮춰 도훈에게 물었다.
“당신과 리훈이 보고 싶어서.”
도훈이 은하에게 입을 맞추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은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아무 일도 없어. 그냥 오후 약속이 취소돼서 시간이 좀 남길래.”
“그럼 회사에 가서 좀 쉬지. 집에 왔다 가기에는 정신없잖아요.”
“회사에서는 쉬지도 못해. 집에 와야 숨 좀 돌리지. 꼬물대는 리훈이도 보고 사랑스러운 당신도 보고.”
리훈을 토닥이고 있는 도훈을 뒤에서 은하가 안았다. 그러고는 도훈의 등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토닥였다.
“고생 많아요, 당신. 힘들어도 쉬지도 못하고.”
“내가 할 소리를 당신이 하는 것 같은데? 당신이 더 고생이 많지.”
“제 일인걸요. 힘들긴 한데 그만큼 보람도 있어요.”
“그럼 다행이네. 당신에게는 늘 고맙고 미안해.”
도훈이 등에 기대 있는 은하를 돌려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꽤 진하게 들어와서 은하가 놀라워하며 도훈을 밀어냈다.
“리훈이 봐요.”
“보면 어때. 엄마 아빠가 이렇게 사랑하는 사이구나 하겠지.”
“밖에 고용인 아주머니도 계시고…….”
“뭘 생각하는 거야. 그냥 키스만 하는 건데?”
“아니, 그게 아니라…….”
은하도 뭐 딱히 다른 생각을 한 건 아니었지만 도훈이 놀리니 부끄러웠다. 도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은하를 바짝 더 끌어안고는 중얼거렸다.
“나야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 가능하지만.”
“놀리지 말아요.”
은하가 뾰로통해지며 도훈을 쳐다보았다. 그때 시끄러웠는지 리훈이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으앙…….”
두 사람은 픽 웃으면서 다시 리훈이를 재우는 데 집중했다. 사실 은하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고, 도훈이 나서서 리훈을 토닥였다.
슈트도 갈아입지 않고 불편한 자세로 리훈을 재우는 걸 보니 은하는 절로 웃음이 났다.
“왜 웃어?”
“행복해서요.”
은하의 한 마디에 도훈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정말 행복이 별거 아니구나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
리훈의 돌잔치는 토요일에 진행됐다.
4월이라 날씨가 애매할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너무 덥지도 바람이 많이 불지도 않아서 야외에서 식사를 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본가는 아침부터 시끌벅적했다. 은하는 아침 일찍 도훈과 함께 리훈을 데리고 본가에 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돌상을 차리더라도 집안 식구끼리 하는 간단한 식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학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손 크게 뷔페도 부르고 정원도 장식을 달아 꾸미는 등 잔칫집 분위기를 제대로 냈다.
“돌상은 이쪽으로. 식사 테이블은 이쪽에다가 할게요. 그리고 저기 앞으로는 꽃 장식 좀 하고 이쪽은 리훈이 사진으로 좀 꾸미고.”
“네. 사모님.”
선주의 주도하에 사람들이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이학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자마자 은하가 놀라서 선주에게 다가갔다.
“제가 할게요. 괜히 신경 쓰시게 해서 죄송해요.”
“아니다. 여기서 하는 행사인데 당연히 안주인인 내가 신경 써야지. 아버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아……. 네.”
“넌 가서 메이크업부터 받고 리훈이 옷 갈아입혀. 컨디션 조절시키고.”
“네……. 알겠습니다.”
선주는 세훈이 감옥에 있는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거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그러다 세훈이 풀려난 뒤로 예전의 활력을 되찾았다.
그녀는 특유의 뻔뻔함으로 은하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대하고 있었다. 물론 은하도 끊을 수 없는 가족 관계인 만큼 딱 그 정도 선에서 서로 인사하고 지내는 중이었다.
그런 선주가 적극적으로 나오니 은하도 달리 불만은 없었다. 아직 앙금이 남아 있어서 편하진 않지만, 도와주면야 고마운 일이긴 하니까.
그리고 은하는 선주의 마음도 알 것 같았다.
선주 나름대로 이 집에서 살아남는 방법일 것이다. 이렇게 도훈의 엄마 노릇이라도 해야 이학에게 인정받고 이 집에서 버텨 낼 수 있을 테니까.
“축하한다. 은하야.”
“아빠!”
결국 집 안 꾸미기는 선주에게 맡기고 메이크업을 받고 옷까지 갈아입고 나왔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니 은표가 와 있었다.
요즘 서로 바빠서 만나지를 못했던지라, 은표의 모습만 봐도 은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은표가 대표로 취임한 이후, 하늘식품은 조금씩 정상화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 제일푸드와 기획한 콜라보 제품이 히트를 치면서 은표는 더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도 바쁘다면서 어떻게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그래도 첫 손자 돌잔치인데 할아버지가 와 봐야지. 사돈, 안녕하십니까?”
“아, 네.”
마침 야외에서 안으로 들어가려던 선주와 은표가 딱 마주쳤다. 은표가 사람 좋은 미소로 먼저 인사를 건네자, 선주는 어색해하며 인사를 받았다.
“그럼 얘기 나누세요.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네. 사돈.”
선주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은표랑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이렇게 대놓고 만난 적도 처음이라 당황한 듯했다.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는 선주를 보며 은하 역시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쨌거나 선주와 세훈은 아빠를 죽이려던 사람들이었으니까.
“왜 또 우리 딸 표정이 어두워질까? 아빠는 괜찮대두. 회장님도 최 서방도 다들 너무 잘해 주지 않니.”
아무래도 여러 사건이 있었던 만큼 두 집안은 거의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업 때문에라도 은표는 이학과 일준과는 몇 번 대면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이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챙겨 주는 덕에 은표는 그 일을 묻어 두고 잘 지내는 중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은하는 가끔 은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건 내 선물이다.”
그때 은표가 분위기를 전환시키며 기분 좋게 말했다. 은하도 얼른 감정을 털어 내고 은표가 건네주는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그냥 오셔도 되는데, 뭘 이런 걸 사 와요.”
“그냥 오긴. 우리 리훈이한테 뭐든 못 해 줄까. 근데 내가 뭘 알아야지. 반지 팔찌야 기본인데, 다른 것도 더 해 주고 싶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서 이것저것 샀어.”
그제야 은하도 쇼핑백을 확인했다. 정말로 쇼핑백 안에는 옷이며 장난감이 한가득이었다.
“고마워요. 아빠. 근데 건강은 좀 어떠세요?”
“괜찮아. 그때는 좀 과로해서.”
은표가 멋쩍어하며 웃었다. 하지만 은하는 웃지 않았다.
“그러게, 아빠 너무 빨리 일을 다시 시작한 것 같아요. 그때 내가 말렸어야 했는데.”
은하의 얼굴에 또다시 근심이 어렸다.
식물인간 상태로 몇 달을 누워 있다 일어난 사람이니, 아무리 건강해졌다고 해도 항상 조심해야 했다.
그런데 대표로 취임한 후 무리를 한 모양이었다. 며칠 전에 출근도 못 하고 바로 병원에 갔다는 얘기에 심장이 다 덜컥 내려앉았더랬다.
안 그래도 혼자 사는 은표가 마음에 걸렸었는데. 은하는 리훈을 돌보느라 바빠서 아빠를 더 자주 챙겨 드리지 못해 미안할 뿐이었다.
“그런 말 마라. 일하니까 오히려 살맛 나. 그리고 최 서방이 소개해 준 김 박사님과도 계속 연락하면서 건강 체크하니까.”
“아버님 오셨습니까?”
그때 도훈이 은표를 아는 체하며 다가왔다.
“잘 왔네, 최 서방. 은하가 또 잔소리를 늘어놓지 뭔가. 이 좋은 날 웃지도 않고.”
“그랬어요?”
은표가 마치 아들에게 하듯 은하의 행동을 이르자 은하는 어이가 없었다. 도훈도 같이 맞장구를 치면서 살뜰히 은표를 챙겼다.
“은하가 리훈이 키우면서 안 그래도 잔소리가 늘었더라고요.”
도훈이 은하에게 눈짓하며 웃어 보이자 은하도 더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회장님께서 뵙고 싶어 하세요. 들어가서 같이 이야기 나누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세. 그럼.”
은표는 은하에게서 벗어나서 다행이라는 해맑은 표정으로 도훈을 따라나섰다. 두 사람의 훈훈한 모습에 이번엔 은하도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은하야!”
그때 자신을 부르는 또 다른 목소리에 은하가 고개를 돌렸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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