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겁도 없이 결혼-69화 (69/72)

특별외전 2화.

“부사장님. 이하리 씨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세요.”

오전 10시. 약속대로 하리가 찾아왔다.

하리는 그동안 배우 쪽으로 아예 자리를 잡았다. 제주도에서 찍은 드라마가 대박이 나면서 인지도가 많이 상승한 것이다.

단역이었지만 개성 있는 인물이었는 데다 평소 성격과 비슷해 시너지가 났고, 입소문이 나면서 조연급까지 올라갔다.

“안녕하세요. 아주버님.”

“어서 오세요. 제수씨.”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예전 호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다른 호칭으로 부르기에는 애매하기도 했고, 서로 상관없다는 주의였다.

제주도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그렇게 어색하더니. 그때 이후로 제법 편해져서 그런지, 아니면 일로써 만나서 그런지 어색함도 많이 줄어들었다.

“아주버님이 저를 직접 찾을 줄은 몰랐어요.”

“업계에서 꽤 유명해지셨더라고요.”

“그러게요. 이 바닥이 원래 로또 같은 데가 있잖아요. 저는 별로 기대도 안 했는데.”

하리는 성격답게 인기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떴다고 유세가 없어서 그 점은 좋았다.

“오늘 제수씨 만난다고 하니까 집사람이 더 들떠 하더군요.”

“형님이야 원래 성격이 소녀 같잖아요. 리훈이는 잘 크죠?”

“그럼요. 하루 종일 기어 다니고 집 안을 어지르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말은 타박해도 도훈의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역시 도훈은 자상한 아빠구나 싶었다.

도훈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자 하리는 문득 세훈이 떠올랐다. 아무리 이복형제라지만 어떻게 이렇게 다를까.

“참, 세훈 씨는 해외로 갔다면서요?”

“네.”

그사이 여러 번의 재판을 받은 세훈은 결국 법정 구속 판결을 받고 1년여를 실형을 살았다. 그러다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어 보석으로 풀려났다.

아무리 치명적인 실수를 한 손자라도 이학도 더는 모른 척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선주가 가진 패물을 다 팔아서라도 어떻게든 빼내겠다고 할 때는 말릴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이학은 세훈을 집안에 들이지는 않았다. 자숙을 하고 공부를 더 하라는 의미로 미국으로 보내 버린 것이다.

“거기서는 사고 안 치면 좋겠네요.”

“…….”

하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도훈이 그런 하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리는 정말로 세훈에 대한 미련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만큼 힘들었단 얘긴가…….

세훈과 정략결혼이었는 데다 어쨌거나 제 집안 치부를 다 보고 나간 여자다 보니, 하리에게 자꾸만 빚진 기분이 드는 건 도훈도 어쩔 수 없었다.

“저희 측 제안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생각이야 해 봤는데……. 고민은 되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오늘 도훈이 하리와 만난 건 광고 계약 건 때문이었다.

한때 업계 최고의 식품 기업이었던 제일푸드는 세훈의 일로 바닥을 찍었다가 이제 2~3위까지 치고 올라왔다.

세훈을 퇴출하고 모든 비리를 끊어 내겠다고 선언한 이학의 발 빠른 판단과, 이후 도훈의 공격적인 경영 전략이 먹힌 덕분이었다.

그러다 요즘 뜨는 하리를 제일푸드의 하반기 광고 모델로 쓰자는 의견이 나왔다. 솔직히 모델로서 하리만 보면 꽤 괜찮은 선택지였다.

아직 신인이라 광고비도 싸고, 이제 막 이슈를 받고 있으니 화제 몰이도 될 터였다. 게다가 원래 먹는 걸 좋아해서 팬들이 찍어 준 먹방 콘텐츠도 몇 개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제일가와 이혼으로 헤어진 사이라는 건데……. 요즘 노이즈 마케팅도 하는 마당에 그게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람과, 그래도 하리로 인해 세훈의 일이 자꾸 거론되는 건 안 좋다는 입장이 팽팽히 나뉘었다.

결국 공은 도훈에게 넘어왔고, 그동안 공격적인 마케팅을 해 왔던 도훈은 꽤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재벌가가 이혼한 며느리와 잘 지내는 선례는 많지 않은 데다, 그런 이미지가 기업에 나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결국 하리에게도 의견을 구하기로 하고 그녀에게 모델 제안을 넣었다. 그리고 오늘이 그 대답을 듣는 날이었다.

“그래도, 저에게도 꽤 좋은 제안이라 한번 해 보려고요.”

“정말이십니까?”

“네. 요즘 솔직히 광고 제안도 많이 들어오는데 제일푸드가 가장 파격적으로 대우해 주셨더라고요.”

“다행이네요.”

도훈은 하리에게 광고 제안을 하면서 지금 하리의 모델 비에 2배를 더 쳐주었다. 그 점이 하리를 움직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안 좋게 끝낸 시댁인 만큼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텐데,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그 정도 가십은 상관없다는 하리의 태도가 도훈으로서는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럼 나머지 얘기는 회의실에서, 계약 진행과 함께 나누실까요?”

“네, 아주버님.”

도훈과 하리는 흡족하게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

계약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도훈은 점심시간에 맞춰 하리와 그녀의 새로운 매니저까지 식사를 챙기며 성의를 보였다.

“그럼 맛있게 식사하십시오.”

“같이 드시는 게 아닌가요?”

“저는 또 다른 일정이 있습니다. 계산하고 갈 테니까 편하게들 식사하세요.”

도훈은 같이 대동한 홍보실장에게 두 사람을 부탁하고는 계산을 하고 음식점을 나왔다.

그런데 차에 타려고 보니 웬 아기가 주차장 쪽으로 아장아장 걸어오는 게 보였다.

넓은 잔디밭처럼 꾸며진 곳이긴 하지만, 주차장인 데다 중간중간 줄로 구역이 표시돼 있어 꽤 위험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슬아슬하던 아기는 몇 걸음 못 걷고 그만 넘어져 울고 말았다.

도훈이 얼른 다가가 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바지를 털어 주었다.

“씩씩하기도 해라. 울지 말고 엄마 찾아보자.”

그때 아이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잠시라도 아이를 놓쳤다는 생각에 하얗게 질린 표정이었다.

“어머, 현오야! 엄마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여자는 아이를 번쩍 안더니 도훈에게 연신 인사를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이가 걷기 시작하니 도통 걷잡을 수가 없네요.”

“아이가 귀엽네요. 몇 개월인가요?”

“이제 15개월 됐어요.”

“우리 아이도 곧 돌인데 이렇게 되겠네요.”

“그럼 이제 시작이시네요. 엄마가 많이 힘들겠어요.”

“그렇겠죠. 아무래도.”

“그래도 아빠가 이리도 자상하니 많이 도와주시면 좀 나을 거예요.”

웃으면서 도훈의 사기를 북돋아 준 아이 엄마는 남편이 부르는 소리에 다시 건물 안쪽으로 사라졌다. 도훈은 집에 있는 리훈과 은하 생각이 절로 났다.

그때 전화를 받으러 잠시 떨어졌던 영철이 곤란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부사장님. 오후에 만나기로 하신 김 의원님께서 급하게 국회에 들어가 봐야 하신다고……. 다음에 뵙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어떡할까요?”

“잘됐네요.”

“네?”

“집에 좀 들러야겠어요.”

“집에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아뇨. 아내와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요.”

“아…….”

영철은 당황했지만, 이내 얼굴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밖에 모르던 도훈이 가정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니 적응이 안 되면서도 한편으로 기특하기도 했다.

“그럼 가셔야죠.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아, 식사는 하고 가죠.”

“네? 댁에서 사모님과 하실 생각 아니신가요?”

“집에서 먹으면 은하가 차리고 치우고 신경 쓸 게 한두 개가 아닐 것 같아서요. 밥은 간단히 먹고 가서 은하랑 리훈이 얼굴만 실컷 보고 오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역시……. 알겠습니다. 그럼 식사할 만한 곳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대신 빨리 먹을 수 있는 곳으로 가죠.”

“그럼 부사장님 대학생 때 자주 가시던 우동집은 어떻습니까? 이 근처이기도 하고, 빨리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거 좋네요.”

영철의 말에 차에 올라타는 도훈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

도훈은 우동을 빠르게 먹고 은하를 위해 초밥집에 들러 정식을 따로 포장한 다음 집으로 향했다. 아무리 고용인 아주머니가 있다고 해도, 리훈이 돌보느라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을 것 같아서였다.

“연락은 안 하십니까?”

“이런 날이 어디 많은가요? 이럴 때 서프라이즈 같은 거 저도 한번 해 보려고요.”

도훈의 농담 섞인 말에 영철이 미소를 띠었다.

“왜 웃으세요?”

“부사장님이 확실히 변하신 것 같아서요.”

“제가요?”

“예전에는 많이 날카로우신 편이었죠. 연애도 결혼도 관심 없으시고. 걱정도 많으셨고.”

도훈은 그제야 자신이 아버지를 닮을까 전전긍긍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아직도 그런 생각은 문득문득 들어요.”

사실이었다. 언제 불쑥 제 감정이 바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닥치지도 않는 미래를 생각하며 불행하고 싶진 않았다.

지금은 은하와 이렇게 행복하니까 그걸로 충분하다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까지는 은하가 너무 좋아서 다른 데 눈 돌릴 틈이 없네요.”

“아마 평생 그러실 겁니다.”

“그럴까요?”

“그럼요. 제가 본 부사장님은 누구보다 가정적이고 사모님과 아드님에게 애정이 넘치시는 분이니까요.”

그냥 하는 말일지라도 도훈에게는 꽤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이 될 수 있도록 도훈은 언제나 지금처럼 은하와 리훈이를 아끼리라 다짐했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주소|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역로3길 40-36 B동 710호 (신내동)

전화|02)906-7768 / 팩스|02)906-7769

값 100원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와이엠북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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