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겁도 없이 결혼-68화 (68/72)

특별외전 1화.

♩♪♬

이른 새벽, 조용한 피아노 선율의 알람 소리가 방 안의 적막을 깨웠다. 은하는 얼른 눈을 뜨고 협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의 알람부터 껐다.

새벽 4시였다.

“으음…….”

최대한 빨리 끈다고 껐는데, 도훈이 뒤척였다. 새벽에 들어와서 곯아떨어진 사람인데, 어째 미안했다.

“몇 시야?”

“더 자요. 아직 새벽이야.”

“당신은 왜 일어나?”

“훈이에게 가 보려고요.”

“이 새벽에?”

“……가끔 자다가도 보고 싶더라고요.”

은하가 일부러 입꼬리를 늘려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거짓말은 도통 늘질 않았다. 그나마 도훈이 비몽사몽이라 크게 꼬투리 잡지 않았다.

“돌잔치 때문에 그래?”

“그것도 그렇구요…….”

언제 크나 했는데 리훈이가 곧 돌이었다. 원래는 조용히 지나갈 생각이었는데, 이학이 집에서라도 지내자고 하는 바람에 괜히 바빠진 참이었다.

“그래도 훈이만 예뻐하면 질투 나.”

“내가 언제요. 얼른 더 자요.”

“응…….”

그러면서 도훈은 은하를 놓아주지 않았다. 상반신을 세워 앉은 은하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이대로 오늘은 불가능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은하가 반쯤 포기하려던 찰나. 다행히도 도훈은 곧바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은하는 조심조심 도훈의 팔을 떼어 내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휴……. 하마터면 오늘 아침 시간은 날릴 뻔했어.”

은하는 안방에서 나오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리훈의 방을 찾는 것도 잊지 않았다.

11개월 차에 접어든 리훈은 이제 밤에도 혼자서 잘 잤다. 백일 전후로 밤중 수유를 끊고, 6개월 차가 되자마자 혼자 재워 버릇했더니 적응이 된 듯했다.

공갈 젖꼭지도 떨어뜨리고 입을 헤벌리고 자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은하는 리훈의 볼에 뽀뽀를 했다.

리훈의 침대에는 ‘최리훈’이라는 큰 명패가 붙어 있었다. 도훈이 직접 만들어서 붙인 명패였다.

최리훈. 아주 예쁜 이름이라고는 볼 수 없었지만 의미는 있는 이름이었다. 리틀 도훈이라서 리훈이니까.

하지만 어른들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은하와 도훈의 의견도 분분했다.

‘난 리훈이 좋은데. 리틀 도훈. 뭔가 정말 내 주니어가 생긴 것 같아서 마음에 들어.’

‘저도요. 하지만 어른들은 그런 거 잘 좋아하지 않잖아요. 지훈이는 어때요?’

‘뭐, 지훈이도 괜찮긴 한데……. 확실히 뭔가 부족한 느낌이야.’

도훈은 툴툴대면서도 은하의 의견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어른들께는 ‘지혜로울 지’의 한자를 써서 지훈이라는 이름으로 짓겠다고 조심스레 의견을 전달했다.

그런데 이학이 어이없어하며 그들을 나무랐다.

‘우리를 무슨 구닥다리로 아는 게냐? 리훈이 더 마음에 드는데 왜 지훈이라고 불러?’

‘할아버님…….’

‘리훈, 리틀 도훈이 아니냐. 재벌가라고 그런 이름 짓지 말라는 법도 없고.’

‘그래. 그렇게 해. 나도 마음에 든다.’

그렇게 일준까지 찬성해서 정식으로 리훈으로 출생 신고를 마쳤다.

‘원래는 작명소에서 지으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장차 큰 인물이 돼야 한다고요?’

도훈이 이학을 놀리듯 질문했는데, 이학의 대답이 모두를 놀라게 했다.

‘너만큼만 하면 큰 인물이지 않겠냐? 리틀 도훈인데 도훈이만큼은 하겠지.’

그 말에 도훈도 은하도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리훈을 잘 키워야겠다는 책임감도 생겼다.

은하는 리훈이가 잠자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는 곧바로 서재로 향했다. 사실 그녀가 일찍 일어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닫힌 문을 한 번 더 살펴본 뒤, 책상 맨 아래 서랍에 감춰 두었던 전공 서적을 꺼내 들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도 아니고, 한 번 훑어보는 건데도 머리가 많이 굳은 게 느껴졌다.

그래도 오랜만에 하는 공부라서 그런지 어려워서 낑낑댈지언정 생각보다 재밌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보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도훈이 나타났다.

“당신 여기서 뭐 해?”

“아, 여보……!”

은하는 얼른 문제집을 덮고 옆에 놓아두었던 소설책을 폈다. 찰나였지만 빠르게 태세를 전환하여 도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냥 책 좀 읽었어요. 한 번 깨니까 잠이 안 와서요.”

그제야 시간을 보니 벌써 6시가 넘어 있었다. 원래는 6시 전에 책을 덮고 아침을 준비했어야 했는데, 오늘따라 집중이 잘돼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씻고 준비해요. 아침 차릴게요.”

“아침은 됐고.”

도훈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은하에게 다가왔다. 은하는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혹시라도 들킨 건가 표정이 어두워지려는 찰나, 도훈이 은하를 부드럽게 껴안고는 코로 심호흡을 했다.

“음……. 당신 냄새.”

“씻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더 좋아. 너무 변태 같나.”

도훈이 농담하자 은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근데 당신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

“네?”

“그냥……. 요즘 뭐랄까, 당신이 좀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아뇨, 그런 거 없어요.”

은하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공부를 다시 하고 싶다는 말을 아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기대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스스로도 잘 해낼 수 있을지 아직은 확신할 수 없어서 더 그랬다.

“그럼 됐어.”

도훈은 어떤 말도 보태지 않으며 그저 믿어 주었다. 은하가 고마워서 옅은 미소로 바라보자 도훈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웃지 마. 지금 당장이라도 침대로 다시 가서 당신 안고 싶어지니까.”

“도훈 씨…….”

“눈 떴는데 당신이 없어서 한참 찾았어. 리훈이 방에도 없고.”

“미안해요. 난 그냥 잠이 안 와서…….”

도훈은 피곤할 때면 유독 은하를 안고 잤다.

그 버릇을 아는지라 안 그래도 오늘은 쉴까 고민했었는데……. 괜히 욕심을 부리다 도훈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게 했나 미안한 마음이 올라왔다.

“너무 피곤해도 잠이 안 온다는데, 리훈이 보랴 돌잔치 준비하랴. 몸이 축난 거 아니야?”

“아니에요.”

“그래서 입주 고용인 쓰자니까.”

“당신도 참. 누가 들으면 정말 제가 다 하는 줄 알겠어요. 낮에 아주머니 오셔서 도와주시잖아요. 입주는 당신도 나도 불편하니까…….”

“당신이 힘들지 않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아주머니 가시고도 집안일이며 훈이 돌보는 거며 할 일이 한참인데. 내가 매번 일찍 와서 도와줄 수도 없고.”

“괜찮다니까요.”

은하가 웃으면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도훈이 체념하며 은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럼 아침밥이라도 하지 마. 그 시간에 더 자.”

“그것도 제 기쁨인걸요. 제가 해 주고 싶어서 해 주는 거라고요.”

은하가 도훈의 품에서 벗어나며 그의 볼에 뽀뽀를 했다. 도훈은 좋으면서도 당황해서 은하를 내려다봤다.

“이건 무슨 의미?”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요.”

“이럼 반칙인데.”

도훈이 은하를 바짝 끌어안고는 입을 맞췄다. 매일 하는 모닝 키스가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설레고 흥분됐다.

“으음……. 당신 몸은 왜 이렇게 달지?”

“당신은 어떻고요?”

“하아……. 이러면 나 출근은 어떻게 하라고?”

말투는 원망이었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이었다. 아직 시간이 있다 판단한 도훈이 은하의 품을 파고들며 조금 더 밀어붙일 때였다.

리훈의 방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은하가 웃으면서 도훈을 밀어냈다.

“이제 그만 놔주시죠, 부사장님. 이러다 지각하겠어요.”

“저 녀석은 배 속에 있을 때도 그러더니 태어나도 눈치가 없네.”

“훈이 뭐라고 할 생각 말아요. 당신이 아침부터 너무 밝히는 탓이니까.”

“뭐?”

“얼른 씻고 나와서 훈이 좀 봐 줘요. 아침 차릴게요.”

은하는 도훈을 놀리듯 가슴을 톡톡 두드리고는 웃으면서 서재를 빠져나갔다.

***

도훈이 씻고 나오자 리훈은 거실에서 혼자 놀고 있었다.

“벌써 이유식 먹인 거야?”

“네. 이유식이랑 분유도 조금 먹였어요.”

“어쩐지.”

표정이 밝더라니.

리훈은 순한 편이었다. 그래서 배고픔과 축축함만 해결되면 혼자서도 잘 놀았다. 도훈이 다가가자 아빠를 알아보고 기어 왔다.

“이리 와. 옳지.”

도훈은 리훈을 품에 안고 가만히 토닥여도 보고 손가락을 얼굴에 대 보기도 했다.

벌써 11개월이나 됐는데도 아이는 항상 신기했다. 웃기도 어찌나 잘 웃는지, 도훈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방긋방긋 웃어 댔다.

“밥 다 차렸어요. 훈이 이리 주고 아침 먹어요.”

“그래.”

도훈은 아쉬워하면서도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어 식탁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은하는 이제 음식 솜씨가 점점 늘어서 못 하는 요리가 없었다. 밑반찬은 고용인 아주머니가 와서 해 주고 있었지만, 메인 요리는 늘 직접 하곤 했다.

처음에는 샌드위치나 빵으로 차리던 아침도 은하의 요리 솜씨가 좋아지면서 한식으로 바뀌었다.

도훈도 한식을 부담 없이 먹는 게 한결 속이 편했기에 점점 익숙해지는 중이었다.

“아침부터 너무 진수성찬인데.”

“놀리지 말아요. 그래 봤자 어제 끓여 놓은 죽만 데운 건데요. 아무거나 차려 줘도 잘 먹어서 고맙죠.”

“정말 맛있어서 잘 먹는 거야.”

도훈은 진짜로 맛있게 먹었다. 늘 아침을 굶던 사람이 빵과 커피도 아니고 한식을 이렇게까지 잘 먹는 걸 보면 은하는 항상 감격에 겨웠다.

“돌잔치는 너무 걱정하지 마. 어른들 의견도 너무 귀담아들을 필요도 없고.”

“네…….”

말이 쉽지, 실제로 그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본가에서 하는 돌잔치다 보니까 은하 마음대로 꾸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참, 오늘 하리 씨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요?”

“응.”

“얘기 잘됐으면 좋겠어요.”

“서로에게 피해가 가지 않아야 하니까……. 당신 얘기는 전해 주지.”

집을 나서며 도훈이 은하의 이마에 부드럽게 뽀뽀를 했다.

“당신과 리훈이 두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네. 요즘처럼 회사 가기 싫은 적 처음이야.”

“그래도 가야죠. 이제 리훈이까지 먹여 살리려면 더 많이 일해야 해요.”

은하가 짐짓 진지하게 얘기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도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알았어. 다녀올게.”

“네. 다녀오세요. 리훈아, 아빠 다녀오세요, 해야지.”

은하가 웃으며 리훈의 손을 잡고 같이 흔들어 주었다. 도훈은 기분 좋게 집을 나섰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주소|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역로3길 40-36 B동 710호 (신내동)

전화|02)906-7768 / 팩스|02)906-7769

값 100원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와이엠북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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