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하긴, 오빠처럼 일 잘하는 포토그래퍼도 없죠.”
“그건 아닌데. 비록 세훈이랑 이혼했다고 해도 인연은 인연이니까 도울 수 있을 때 돕자 싶어서.”
은하가 칭찬하자 성우가 어색한 듯 설명을 덧붙이며 말을 이었다.
“잘 지냈어? 행복해 보이긴 하네.”
“그래 보인다니 다행이네.”
불쑥 끼어드는 도훈의 목소리에 세 사람 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도훈이 그들 뒤에 서 있었다.
“도훈 씨…….”
“왜 이렇게 안 오나 했더니 얘기 중이었네. 제수씨……. 그동안 잘 지내셨죠?”
도훈은 하리를 보는 게 마냥 마음 편하진 않았다. 배다른 동생이라고는 하나 동생의 이혼한 처였고, 동생이 이혼한 계기는 어쨌거나 자신이 진실을 밝혀냈기 때문이니까.
그래도 우연히 만났는데 인사까지 못 할 사이는 아니었다. 이렇게도 보게 되다니 역시 세상이 좁다는 생각만 할 뿐.
“네. 아주버님. 오랜만이에요.”
“성우랑 같이 일하신다고요?”
도훈이 그제야 성우에게 눈길을 주며 물었다. 성우 역시 도훈의 눈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그렇게 됐다.”
“잘했네. 네가 도와주면 좋지.”
도훈의 호의적인 발언에 성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비웃는 게 아니라 조금 시시해서였다.
은하와 결혼을 두고 갈등했던 두 사람은 아직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괘씸하고 화가 났지만, 은하가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누리는 걸 보고 성우도 마음이 많이 정리된 상태였다. 이제 도훈에게 가졌던 감정도 제법 가라앉았고.
“뭔가 어색한 분위기이긴 하지만, 다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서로 다 오랜만인 듯한데.”
문득 도훈이 제안했다. 성우는 놀라서 도훈을 쳐다보았다.
이제 보니 도훈도 제 마음과 비슷하려나 싶었다. 한때 감정이 상했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옅어진 느낌. 굳이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의미가 없겠다 싶은 마음이랄까. 부부 싸움만 칼로 물 베기가 아니라 친구 사이도 그런 모양이었다.
성우는 도훈의 제안이 반갑지는 않았지만 또 나쁘지도 않았다. 어차피 하리와 둘이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이기도 했으니까.
“오, 저는 좋아요!”
하리가 먼저 승낙했다. 도훈이 성우를 보며 다시 한번 의견을 물었다.
“넌?”
“그래, 그럼.”
성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은하는 이 상황이 좋으면서도 어안이 벙벙해서 도훈을 쳐다보았다. 하리까지는 그렇다 쳐도, 도훈과 성우는 분명 사이가 안 좋은 걸로 알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그냥 보내면 당신이 서운할 거잖아. 두 사람 다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까.”
“도훈 씨…….”
은하가 감격 어린 목소리로 도훈을 불렀다.
“나 역시 안 내키는 것도 아니고.”
조금은 건조하게 대답했지만, 결국은 자신도 싫지 않다는 얘기였다. 은하는 그걸로 충분했다. 어쨌거나 서로 다 좋은 거니까.
그렇게 모인 넷의 식사 자리는 제법 화기애애했다. 은하는 내심 너무 어색하면 어쩌지 걱정했으나 쓸데없는 기우였다. 모두 하리의 덕이었다. 하리의 연예계 얘기로 이야기 거리가 넘쳐 났으니까.
게다가 특유의 푼수 끼와 친화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여서 분위기를 한결 부드럽게 만들었다. 은하를 빼고 세 사람은 가벼운 와인까지 곁들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괜찮겠어요?”
“형님은 제가 겨우 와인 몇 잔 가지고 취할 사람으로 보여요? 걱정 말아요.”
하리가 마신 와인은 몇 잔이 아니고 한 병은 족히 넘었다. 그런데도 하리는 볼만 살짝 붉어졌을 뿐, 정말 멀쩡했다. 술을 제법 좋아하는 듯했다.
이렇게 활달하고 술도 좋아하는 그녀가 그동안 세훈의 아내로 제일가에서 참고 살았을 걸 생각하니, 왜 지금 그녀의 얼굴이 더 빛나는지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분위기 메이커인 하리가 빠지자, 세 사람 사이에 바로 어색함이 감돌았다. 은하가 무슨 말을 꺼낼까 고민하는 사이 성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최도훈. 난 아직 널 다시 친구로 받아들인 거 아니다.”
“오빠…….”
꽤나 의미심장한 말에 은하가 놀라서 성우를 불렀다. 안 그래도 두 사람 사이가 틀어진 것이 저 때문이라는 미안함이 가득한데, 성우의 선전 포고 같은 말에 사이가 더 나빠질까 걱정이 된 것이다.
“은하 너는 가만히 있어. 이건 도훈이와 내 문제니까.”
“계속해 봐.”
도훈은 건조한 표정으로 와인 잔을 돌리며 성우의 말을 경청했다.
“은하가 힘들어 보이면 언제든 네게서 은하 벗어나게 만들 거고.”
“그럴 일은 없어.”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그런 일이 없도록 나도 바랄 뿐이야.”
도훈이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정색하며 성우를 바라보았다. 성우의 도발이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두 사람의 팽팽한 기 싸움에 은하만 안절부절못했다.
“오빠……. 난 정말 지금 행복해요…….”
“그래. 알아. 그러니까 이렇게 마주 보고 이 녀석과 밥이라도 먹지.”
이번에는 성우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도훈도 다시 여유 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은하가 당황하여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분명 팽팽한 기 싸움을 한다고 느꼈는데, 지금 모습은 또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은하의 오빠로서.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명심하지. 그리고 오빠 노릇만 해. 혹시라도 선을 넘는 건 용납할 수 없으니까.”
“그건 봐서.”
서로 할 말만 하고 와인도 각자 마셨지만 은하는 그제야 깨달았다. 두 사람이 이런 식으로 화해하고 있다는 것을. 예전만큼 서로를 적대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비로소 은하는 한시름 놓고 둘을 바라보았다.
***
제주도에서 돌아오고 난 뒤 시간이 금방 흘렀다. 은하도 그사이 본격적인 출산 준비를 하느라 바쁘게 보냈다.
은하가 막달에 접어들어 예정일을 일주일밖에 남겨 두지 않은 날이었다.
“아무래도 무리야. 예정일이 바로 다음 주잖아.”
“그래도 가야죠. 아빠가 다시 회사에 나가는 날인데.”
은하가 자신의 외출을 탐탁지 않아 하는 도훈을 설득했다. 평소라면 은하도 자중했겠지만 오늘은 아빠 은표가 다시 하늘식품에 출근하는 날이었다.
건강을 회복하고 처음으로 일선에 나서는 날이기도 하고, 정식으로 다시 대표 자리에 앉는 날이니 비록 몸은 무겁지만 은하도 가서 축하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예정일 다가올수록 더 많이 움직이랬어요. 자연 분만 하고 싶으면.”
“그러게 제왕 절개 하라니까 말을 안 듣고.”
도훈은 아쉬움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은하가 진통으로 고통받을 생각만 해도 자신이 다 아픈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냥 처음부터 제왕 절개를 하자고 했는데 은하가 자연 분만을 고집했다.
골반이 작은 것도 아니고 콩알이의 위치나 몸무게도 자연 분만을 해도 좋을 만큼 아무 문제가 없는데, 진통 때문에 제왕 절개를 하는 건 아닌 것 같다며 도훈을 설득했다.
아이를 낳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도훈도 달리 방법은 없었다. 그나마 가족 분만실을 예약해 아이를 낳을 때 같이 있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밖에는.
“일단 시도는 해 보고요. 자연 분만도 제가 원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지만……. 조건이 좋다잖아요.”
‘신골’이라고 해야 하나. 한마디로 은하는 신이 내린 골반이었다. 그래서 병원에서도 굳이 제왕 절개를 권하진 않았다. 그리고 이제 자신도 엄마니까……. 아이를 낳는 고통 정도는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조금은 안일한 생각도 하는 중이었다.
“그래. 난 당신 선택에 따를 거니까. 아버님 회사 가는 것도 어차피 당신 선택일 테고.”
“고마워요.”
은하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도훈의 뺨에 뽀뽀를 했다. 마지못해 허락한 도훈은 은하의 뽀뽀 세례에 어이가 없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은하가 먼저 뽀뽀를 한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을 때 나오는 애교였다.
“그렇게 좋아?”
“네.”
냉큼 대답하는 은하의 행동이 귀여워서 도훈의 굳은 얼굴도 금세 풀리고 말았다.
“나도 답은 해야지.”
도훈은 은하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는 볼이 아니라 입술에다가 쪽 소리가 나도록 제 입술을 맞췄다.
“이따가 직접 데리러 오고 싶은데, 아무래도 시간이 안 될 것 같아.”
은표의 취임식은 오전 11시. 도훈은 9시부터 회의가 있어서, 회의가 끝나고 회사에서 바로 하늘식품으로 이동해야 취임식에 늦지 않게 참석이 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은하가 혼자 이동해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어차피 아빠 회사에서 볼 건데, 뭘 데리러 와요. 그냥 택시 타고 갈게요.”
“안 돼. 택시도 위험해. 기사님이라도 보낼 테니까 절대 무리하지 마.”
“알았어요. 그럼.”
은하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훈의 말대로 섣불리 혼자 움직였다가 혹시나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괜히 무리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
“그럼 취임식에서 봐요.”
“그래.”
도훈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은하의 이마에 뽀뽀를 하고는 출근을 했다.
***
취임식은 조용히 진행됐다. 찬우의 꾐에 빠져 배신했지만 후회하고 있는 꼭 필요한 인물 몇몇은 다시 불러들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새로 채웠다.
처음 하늘식품을 시작할 때처럼 초라한 모습에, 말이 취임식이지 그저 사장과 직원들이 얼굴을 보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은하는 은표가 건강해져서 다시 회사에 나온 것만으로도 감격에 겨웠다.
“아빠, 축하해요.”
“그래. 고맙구나. 근데 뭘 몸도 무거운데 여기까지 쫓아와. 아빠가 어련히 알아서 할까.”
은표는 은하가 와 준 게 좋으면서도 딱 봐도 출산이 임박한 딸이 걱정스러워 한 소리를 했다.
“축하드립니다. 아버님.”
시간 맞춰 나타난 도훈도 진심으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고맙네. 이게 다 우리 은하와 자네 덕이네.”
“별말씀을요. 아버님께서 다시 한번 날개를 펴실 수 있도록 제가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은표가 고맙다는 듯 도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은하는 아빠와 남편이 나란히 서 있는 것만 봐도 좋아서 활짝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 문득 아래에서 이상한 느낌이 났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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