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도훈이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은하의 손을 잡았다. 은하가 놀라서 도훈을 돌아보았다.
“앞으로는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을 거야. 위험한 곳만 아니라면 어디든 데려가 줄게.”
도훈의 애틋한 눈빛과 목소리가 은하의 마음을 간질였다. 제 손등 위로 포개진 도훈의 손도 참으로 따뜻했다. 이제는 무뎌진 자신의 어릴 적 감정까지 다독여 주는 도훈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정말이에요? 바쁜 걸로 치면 대한민국 일 퍼센트 안에 드는 사람이 그럴 시간은 되겠어요?”
은하는 도훈의 손을 만지작거리다 괜히 장난기가 발동하여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도훈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안 그래도 늘 바쁘게 일하느라 미안해하는 중이었는데, 은하가 그동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많이 서운했구나 생각하는 듯했다.
“앞으로는 꼭 약속하지. 일 년에 두세 번은 휴가를 받아서 콩알이와 당신과 함께 어디든 가겠다고.”
“네. 알겠어요.”
은하가 표정을 풀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도훈이 정색하며 다시 대답했다.
“정말이야.”
“알아요. 실은 저도 농담해 본 거예요. 도훈 씨가 너무 당황하니까 더는 놀릴 맛이 안 나네요.”
진심이었다. 더 놀렸다가는 얼굴빛이 너무 안 좋을 것 같아서 그만 놀리려던 참이었다. 도훈이 몇 번이나 은하의 안색을 살피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난 또……. 당신이 그동안 많이 서운해한 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
“당신과 사랑하면서 한 번도 서운한 적 없었어요. 바쁘지만 생각해 주려고 애쓰는 거 알고 있으니까.”
은하가 사랑스럽게 웃었다. 운전만 아니었다면 이대로 안고 싶을 만큼.
도훈의 마음을 눈치챈 걸까? 은하가 도훈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운전에 집중하세요. 위험해.”
“고마워. 이해해 줘서.”
“저야말로 고맙죠. 원하는 곳은 다 데려간다는 말 꼭 지켜야 해요! 완전 기대 중이니까.”
괜히 도훈을 마음 쓰게 한 것 같아서 민망한 은하가 이번에는 제대로 들뜬 표정을 지었다. 사실 도훈과 어디를 가든 다 행복한 여행일 터였다. 그런데 도훈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단, 위험하지 않은 곳으로만.”
“아……. 네.”
은하의 안위를 걱정하는 도훈의 마음이 전해져 은하는 그만 웃고 말았다. 요즘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늘 은하의 건강만 생각하는 그였다. 도훈도 그제야 같이 웃었다.
얼마 정도 달렸을까. 도훈의 차가 호텔로 들어섰다.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최상급 제일 호텔이었다.
“짐은 올려놓았습니다. 바로 올라가시겠습니까?”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매니저가 달려와 상황을 보고했다. 도훈이 제일그룹의 실세인 만큼 매니저도 신경 쓰는 게 느껴졌다.
“아뇨. 식사부터 하고 싶은데 준비가 될까요?”
“알겠습니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아직 12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아침에 정신이 없다는 핑계로 과일만 먹고 바로 비행기를 탔던지라 배가 고팠다. 그래도 룸에 들렀다 내려올 줄 알았는데, 도훈이 식사 이야기를 먼저 꺼내서 의외였다.
“먹고 올라가자. 룸에 들어가면 다시 내려오기는 귀찮을 거잖아.”
“아, 네.”
하긴, 룸에 올라가면 배고픔보다 휴식이 더 간절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리 짧은 비행이었다고 하나 비행기를 탄 데다 차로 30분 가까이 달려왔으니 조금은 피곤한 것도 사실이었다.
은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매니저가 두 사람을 안내하며 무전으로 레스토랑에 연락을 취했다. VIP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곳은 호텔의 최고 층 스카이라운지였다.
“이곳이 조용할 듯하여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잠시 기다리시면 요리사가 음식을 준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매니저의 안내대로 두 사람은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라운지는 아직 영업시간 전이라 홀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둘만 먹을 수 있도록 호텔 측에서 배려해 준 듯했다. 이렇게 특별한 대우를 받을 때마다 은하는 도훈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깨닫고 있었다.
“아직 문도 열지 않은 호텔 라운지에서 점심 식사를 하게 되다니, 제가 확실히 결혼을 잘했네요.”
“원한다면 매일 겪게 해 줄 수도 있어.”
“아뇨. 오늘 한 번이면 충분해요.”
은하가 놀라서 손사래를 쳤다. 특별 대우를 받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매번 그러면 왠지 오너가의 갑질로 보일 것 같았다. 그런 게 도훈에게 도움이 될 리도 없고.
“그래. 그럼 그렇게 말하지.”
“네.”
도훈은 흔쾌히 은하의 말에 수긍해 주었다. 이렇게 사소한 것 하나도 자신의 의견을 들어 주는 도훈이 은하는 참으로 좋았다.
잠시 후, 메인 요리사가 직접 찾아와 인사를 하고는 테이블 위에 요리를 올려 주었다. 전복부터 돔 요리까지, 제주도에서 나는 싱싱한 해산물이 주재료였다. 은하는 그 화려하고 먹음직스러운 요리에 입이 쩍 벌어졌다.
“해산물을 좋아하신다고 들어서 준비해 봤습니다. 아무래도 임산부시니까 날것보다는 익힌 것으로 준비했고요.”
“감사합니다.”
디테일한 설명에 은하는 놀랐지만 도훈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 은하의 취향을 미리 귀띔한 모양이었다.
“그럼 즐거운 식사 시간 보내세요.”
요리사가 떠나고 도훈과 은하 단둘만 남자 도훈이 음식을 권했다.
“먹어 봐. 아마 맛있을 거야.”
“네. 잘 먹을게요.”
서울에서도 먹고 싶다고 하면 바로 사다 주는 도훈이었지만, 바다 바로 앞에서 먹는 해산물 요리의 맛은 정말 꿀맛이었다. 은하는 도훈이 지켜보는 것도 잊은 채 제 앞에 놓인 요리를 정신없이 먹어 치웠다.
임신해서 좋은 게 있다면 많이 먹어도 티가 안 나는 거지만, 많이 먹을수록 배가 터질 것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허겁지겁 먹고 나니 정말로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 배가 빵빵하게 차올라 있었다.
잘못하다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얼른 수저를 놓았다. 분명 맛있는 요리가 가득했던 테이블 위에는 어느새 빈 접시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좀 말리지 그랬어요. 너무 많이 먹었나 봐요.”
도훈은 거의 손대지 않은 것 같은데, 빈 접시가 많은 걸 보고 은하는 괜히 민망해졌다.
“더 먹어도 돼. 원하는 게 있으면 더 시켜 줄 테니까.”
“아뇨. 절대 아뇨! 지금도 배가 터질 것 같아요.”
“그럼 그만 올라갈까?”
“네.”
은하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배불리 먹고 룸으로 올라오자마자 은하는 감탄부터 했다. 최고급 스위트룸답게 넓은 내부와 뛰어난 전망, 그리고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마음에 들어?”
은하가 끌리듯 통창으로 다가가 바다를 감상할 때였다. 도훈이 그녀를 뒤에서 안으며 물었다.
“네, 너무 좋네요. 아까 해안 도로에서나 라운지에서 보던 거랑은 또 다른 느낌이에요.”
며칠 동안 머무를 아늑한 보금자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겨울철 특유의 차가운 바다 색과 부서지는 파도마저도 황홀하게 다가왔다. 배도 부르고, 객실은 너무 편안하고 좋아서 정말이지 천국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나중에 산책도 해 보고 싶어요. 아직은 춥겠지만 잠깐이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래. 낮에 볕 좋을 때 잠깐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혹시라도 감기 걸릴까 우려하는 도훈을 생각해서 은하가 조심스레 제 의견을 피력했다. 다행히 도훈도 흔쾌히 허락했다.
“고마워요. 벌써부터 너무 좋아요. 힐링되고.”
“음……. 그렇게 좋으면……. 뭔가 행동으로 보여 줬으면 좋겠는데.”
“네?”
“이를테면……. 뽀뽀라든가.”
도훈이 볼을 갖다 대며 잔뜩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뽀뽀가 뭐 어려운 거라고, 이렇게 받고 싶어 하는 걸까.
은하는 도훈의 행동이 귀여워서 웃으면서 그의 볼에 입술을 갖다 댔다. 하지만 은하가 입술을 갖다 대는 순간, 도훈이 고개를 돌려 볼 대신 입술을 맞댔다.
“이렇게 분위기 좋은 곳에서 뽀뽀는 좀 약하지 싶어서.”
도훈이 은하의 입술을 파고들며 변명을 했다. 어느새 아침과 똑같은 포즈로 키스를 하는 두 사람이었다.
“으읏……. 도훈 씨, 양치도 안 했는데…….”
“괜찮아. 같은 거 먹었잖아.”
입술을 노골적으로 탐하면서 도훈의 손이 자연스럽게 가슴으로 들어왔다. 안 그래도 예민한 정점이 그의 손길을 받자 절로 흥분이 됐다.
“아침에 못 했던 것을 지금 하자고 하면 당신이 너무 힘들려나…….”
도훈이 이번에는 조심스레 은하의 의사를 물었다. 늘 키스까지는 편하게 해도, 그 이상은 은하의 의견을 묻는 그였다. 행여라도 몸에 이상이 생기면 안 되니까 그럴 테지만 은하는 그럴 때마다 감질나서 더 힘들었다.
“아뇨……. 저도 하고 싶어요.”
“정말?”
“사실……. 저도 아침부터 참았거든요.”
이번에는 은하가 도훈의 얼굴을 감싸 안고 제 얼굴 쪽으로 끌어 들였다.
“이토록 솔직한 여자라니……. 당신은 정말 날 미치게 하려고 작정한 게 틀림없어.”
도훈이 흥분된 표정으로 은하의 손을 끌며 다급한 걸음을 옮겼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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