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다 챙긴 게 맞겠지?”
은하는 아침부터 트렁크 짐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짐을 싸면서도 배 뭉침이 일어나 몇 번이나 배를 쓰다듬었다.
벌써 임신 8개월이었다. 그동안 별다른 일 없이 집에서 먹고 자고 한 것밖에 없는데도 시간은 참으로 빨리 흘렀다.
“뭘 그렇게 챙겨?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가서 다 사도 되니까 힘들게 챙기지 마.”
샤워한다더니 언제 욕실에서 나왔는지, 도훈이 뒤에서 은하를 안으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의 몸에서 시원한 바디 워시 향이 났다.
“머리카락부터 말려요. 감기 걸리겠어요.”
강추위는 누그러졌다고 해도 아직 2월이었다. 아무리 집 안이 훈훈해도 머리카락이 젖은 채로 오래 있으면 좋을 리가 없을 텐데.
하지만 도훈은 머리를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은하를 안은 손을 놓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꼭 끌어안고는 몸을 밀착시켜 왔다. 은하의 배에 자연스레 손을 올리고는 입술은 목덜미에 묻었다.
안 그래도 샤워 가운만 입은 몸에 젖은 머리카락이 너무 섹시해서 도훈을 쳐다볼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몸을 붙여 오니 은하는 자꾸만 열기가 피어올랐다.
“당신과 붙어 있으면 감기 안 걸릴 것 같은데?”
“말도 안 돼요.”
“정말이야. 당신 체온이 너무 따뜻해.”
도훈은 은하의 고개를 돌려 저를 보게 하더니, 순식간에 입술을 포개 왔다. 가벼운 모닝 키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꽤 노골적이고 깊었다. 아랫배가 저릿하면서 절로 몸이 뜨거워졌다.
“으읏. 도훈 씨.”
예전에는 이런 키스쯤은 쉽게 뿌리쳤는데, 지금은 힘들었다. 임신을 하고 나서 성욕이 강해진 탓이었다.
처음에는 부쩍 강해진 성욕이 적응이 안 되기도 하고, 낯부끄럽기도 했는데 찾아보니 임산부에게 그런 일은 꽤 흔한 듯했다.
게다가 엄마가 행복한 게 최고라고 해서 요즘은 대놓고 도훈의 정력을 받아 주다 보니 틈틈이 꽤 많은 시간 그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문제는 비행기를 타러 가야 하는 지금도 정신을 못 차린다는 것이었지만.
“아쉽지만 이쯤에서 놓아줘야겠지? 비행기 놓쳐서 당신에게 혼나고 싶진 않으니까.”
도훈은 저에게 매달리는 은하가 사랑스럽다는 듯 아랫입술을 살며시 물었다 놔주었다. 은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부끄러워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정신없이 빠져든 자신이 민망해서였다. 이쯤에서 그라도 정신이 돌아와서 다행이었다.
“더 좋은 데 데려갔어야 했는데, 제주도라서 미안해.”
“제주도가 어때서요? 난 제주도 좋아요.”
도훈이 입술에 묻은 그의 타액을 닦아 주며 미안해하자, 은하가 달뜬 몸을 겨우 추스르곤 웃으면서 그를 달랬다.
사실 그가 미안할 일은 아니었다. 회사 업무가 워낙 바쁘니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지.
태교 여행은 임신 중반부터 계획했던 것이었다. 도훈이 먼저 제의를 했다. 신혼여행도 제대로 즐기지 못했으니 가까운 휴양지로 3박 4일 정도 다녀오자고.
은하는 뛸 듯이 기뻐하며 바로 여행지를 알아보았으나, 하필 그때 공장에 문제가 생겼다. 비록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사장인 도훈이 이 시기에 자리를 비우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사태를 수습하느라 시간이 흘렀고, 은하는 어느덧 임신 8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도훈은 이제라도 가자며 은하를 설득했고, 그나마 임신 말기에도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으로 고른 것이 제주도였다.
“난 스무 살이 되자마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국에 나간 거라, 한국이 늘 그리웠어요. 제주도는 지금도 벌써 봄이 오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엄청 기대하고 있어요.”
“그럼 다행이고.”
“그리고 꼭 안 가도 되는 건데, 이렇게 가자고 해 줘서 오히려 고마운걸요.”
은하는 진심이었다. 태교 여행을 꼭 다녀와야 하는 건 아니니까.
처음 여행이 취소되고 나서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부담 주기 싫었다. 그런데 도훈이 먼저 제의를 해 주고, 제주도라도 가겠다며 시간을 2박 3일이나 빼 줬으니 고마울 수밖에.
“그래. 지금은 이렇게나마 아쉬움을 달래고 나중에 콩알이 태어나면 같이 여행 많이 다니자.”
“네.”
“어, 콩알이가 발로 찬다.”
갑자기 세게 느껴지는 태동에 도훈이 눈을 크게 뜨며 은하를 쳐다보았다. 은하도 느꼈던지라 놀랍고 신기한 마음에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게요. 콩알이도 신나나 봐요. 태어나면 같이 여행 다닐 생각에.”
그 말을 하니 또다시 은하의 배가 움직였다. 아까만 해도 쿡쿡, 짧게 차더니 이번에는 기지개라도 켜는지 배가 천천히 부풀어 오르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진짜 신기해. 처음 초음파 사진을 찍었을 땐 진짜 콩알만 했는데, 이제는 이렇게 움직임이 느껴질 정도니.”
“콩알보다도 더 작은 점이었죠.”
처음 초음파 사진을 보고 어찌나 신기했던지. 두 사람 다 아기집 안에 있는 작은 점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었다.
그러다 태명도 콩알이로 지었다. 이렇게 작은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우리 곁에 온다는 것이 기적처럼 기쁘고 신기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정말로 잘 자라서 벌써 8개월이고, 이제는 태동도 활기차게 하고 있으니 당연히 기쁘고 행복할 수밖에.
야옹.
그때 예쁜이가 어슬렁거리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마치 이 가족에는 자신의 지분도 있으니 잊지 말라고 표현하는 것 같아 은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도훈 역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예쁜이를 안아 올렸다.
“네 녀석은 밖으로 나가는 걸 싫어하니까 어쩔 수 없이 우리끼리 가는 거야. 그래도 갔다 올 때 맛있는 거 많이 사 올게.”
“아빠께 먹을 거 조금만 주라고 해야겠어요. 당신도 그렇고 아빠도 그렇고, 밥을 너무 많이 줘서 살이 금방금방 올라요.”
적당히 살이 오른 고양이가 보기 좋은 건 알고 있지만 개월 수에 비해 덩치가 너무 훅훅 커져서 은하는 괜히 걱정스러웠다.
“예뻐서 그렇지. 먹는 것만 봐도 예뻐서.”
“난 정말 도훈 씨가 이렇게 고양이를 좋아하는지 몰랐어요.”
“고양이 별로 안 좋아해.”
“에이, 말도 안 돼…….”
지금껏 하는 것만 봐도 은하 자신보다 훨씬 더 고양이를 아끼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안 좋아한다니.
“정말 몰라?”
“네? 뭘요?”
도훈의 갑작스런 질문이 이해가 안 돼서 은하는 눈을 깜박였다. 도훈이 예쁜이를 은하의 얼굴 옆으로 갖다 대며 낮은 소리로 대꾸했다.
“당신 닮아서 좋아하는 거잖아. 당신 고양이 닮았어. 특히 예쁜이는 당신 판박이야. 아마 아버님도 그래서 자꾸 먹을 거 주시고 놀아 주시고 하는 걸걸.”
“네?”
은하는 당황스러워 도훈을 쳐다보았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나와 예쁜이가 닮았다니. 그런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완전 똑 닮았는데 당신만 모르네. 눈도 동그랗고 피부도 매끈하고, 하는 행동이 사랑스러운 것도 비슷하고.”
미소를 띠며 예쁜이의 얼굴을 더 가까이 갖다 대는 도훈의 행동에 은하는 그만 못 말린다는 듯 웃고 말았다.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는데, 도훈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어쨌거나 은하는 기분이 좋았다. 농담이든 진담이든 사랑스러운 예쁜이와 비교되는 건 좋은 일이니까.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면 아내에게 흥미를 잃는 남자들도 많다고 하는데, 도훈은 여전히 자신을 귀엽고 사랑스럽게 봐 준다는 거니까 그것 또한 참 좋았다.
“안 그래도 참고 있는데, 그런 눈으로 날 보면 제주도를 가지 말자는 얘기겠지?”
“네? 안 돼요. 절대.”
기분이 좋아서 너무 노골적으로 도훈을 쳐다본 모양이었다. 도훈이 놀리자 은하가 놀라서 손사래를 쳤다.
“알아. 당신이 이 여행을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나 역시 마찬가지고. 정말로 아버님께 예쁜이 맡기고 가려면 늦겠다. 얼른 옷부터 갈아입을게.”
“네.”
도훈이 예쁜이를 넘겨주고는 빠르게 샤워 가운을 벗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쪽으로 향하던 은하는 그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의 몸에 터질 듯한 열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당황하여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급하게 뒤로 도니, 도훈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이제 가자.”
“……네.”
옷을 다 갈아입은 도훈이 은하의 손을 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
제주도 하늘은 무척이나 맑았다. 서울에 비하면 기온도 훨씬 웃돌았다. 그래서인지 기분이 한결 더 들떴다.
“몸은 어때? 힘들진 않고?”
“네. 괜찮아요. 겨우 한 시간 비행기 탄걸요.”
정작 은하는 아무렇지 않고 오히려 기분도 좋은데, 도훈은 자꾸 은하의 컨디션을 살폈다. 일할 때는 그렇게 카리스마 넘치면서 이럴 때 보면 또 한없이 다정한 남자라 은하는 자꾸만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 결혼한 지 벌써 1년도 넘었는데 자꾸만 더 좋아지면 어쩌라는 건지.
공항을 나오니 제주도 특유의 포근한 공기가 은하를 둘러쌌다. 마중 나온 호텔 관계자에게 짐을 보내고 두 사람은 스포츠카를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와, 제주도는 그대로네요.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오고 처음인데.”
“정말이야?”
“네?”
“마음만 먹으면 반나절에도 다녀가는 제주도를 수학여행으로 오고 한 번도 오지 않은 거냐고?”
“아……. 네.”
도훈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은하는 대수롭지 않다며 미소를 머금었다.
“미국에 살면서 한국에도 자주 안 온걸요. 제주도를 일부러 찾을 일은 없었죠.”
“하긴 그렇겠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가야 하는 유학은 어떤 기분일까. 집이 편하질 않으니 한국에 들어오는 횟수도 줄었겠지.
제주도가 문제가 아니라, 한국 땅 자체를 밟는 게 쉽지 않았을 은하를 떠올리자 도훈은 그녀가 더 애틋했다. 자신 역시 새어머니랑 살면서 비슷한 경험을 해서인지 그녀가 어렸을 때 느꼈던 소외감과 외로움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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