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해가 뜨기 직전의 어스름한 푸른빛이 감도는 새벽.
“으읏. 도훈 씨…… 이제 그만…….”
“조금만 더 해.”
장난삼아 시작된 이른 새벽의 모닝 키스가 점점 짙어지더니 금세 야릇한 소리로 바뀌어 갔다.
“……아까 했잖아요.”
도훈의 입술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은하는 작게 속삭였다.
“한 번 더 하면 되지.”
“그러다 또 늦어요.”
“또 늦어도 돼.”
“음…….”
“뭐든 말해. 다 핑계를 댈 수 있으니까.”
안 된다고 하면서도, 은하 역시 금세 몸이 뜨거워졌다.
이대로 도훈에게 또 끌려가나 싶었는데, 그때 정원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맞다. 예쁜이 밥 줘야 해요. 당신 아침밥도 만들어 드리고요.”
“내 아침밥은 필요 없는데.”
“그러지 말고, 그만요. 네……?”
“그래, 예쁜이는 굶기면 안 되지.”
도훈이 그제야 포갰던 몸을 내렸다.
“가끔 보면 고양이 키우는 걸 저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은하가 곱게 눈을 접어 웃었다. 고양이 얘기만 나오면 뭐든지 오케이하는 것이 신기해서였다.
“어차피 키우기로 한 거, 잘 키우면 좋지.”
따로 보낼 보호소를 알아보던 예쁜이는 두 사람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는 이 집에서 같이 키우기로 결정했다.
“아무리 그래도 여은하만 할까. 난 다른 거 다 필요 없이 여은하만 있으면 돼.”
도훈이 다시 생각해도 아쉽다는 듯 속삭였다.
“나도 그래요. 그래도 회사는 가야 하고, 아침은 먹어야 하잖아요.”
은하는 아침마다 매달리는 도훈을 떼어놓느라 애를 먹었다. 도훈의 정력은 점점 더 세지고, 은하에 대한 집착도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정신을 못 차리면 금세 도훈의 페이스에 휘말리곤 했다. 그럴 때면 아침에도 두세 번은 꼭 하고 일어났다.
그런데도 도훈은 흐트러짐 하나 없고, 늘 은하 혼자만 녹초가 되는 상황이 조금은 억울하기도 했다.
다행히 오늘은 예쁜이 아침을 핑계로 한 번으로 끝내고 일어난 참이었다.
“그럼, 씻고 나와요. 예쁜이 챙기고, 당신 아침도 준비할게요.”
도훈은 원래 아침을 먹지 않았지만, 요즘은 꼬박꼬박 차려주는 은하의 정성에 감복해서 잘 챙겨 먹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아침을 먹는 일상이 참으로 행복하고 소중하다는 것도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은하는 어제 재료를 사다 놓아서 뚝딱 만들어낸 햄에그 샌드위치와 모닝커피를 테이블 위에 먹음직스럽게 차렸다.
“요즘 점점 요리 솜씨가 느는데?”
“배우고 있어요, 이것저것. 당신 제일푸드 부사장으로 취임하고 나서 너무 바쁘잖아요. 아침이라도 든든히 챙겨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세훈의 일로 심기가 불편해진 이학은 도훈에게도 딱히 좋게 작용하진 않았다.
이학은 자신의 뒤를 이은 후계자로 도훈을 공표하고 제일푸드 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제일푸드의 추락한 이미지를 직접 돌려놓으라는 뜻도 되었다.
도훈은 세훈이 불러일으킨 논란을 잠재우고, 다시 식품업계 1위로 올라서기 위해 불철주야 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은하는 아침에 한 끼라도 직접 만들어 먹이고 싶어 노력 중이었다.
“맛있네.”
“정말요?”
은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제 저녁에 장을 봐온 걸로 미리 만드는 연습을 해본 게 도움이 됐다.
“그래. 근데 정말 이런 거 안 해도 돼.”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제가 한 음식을 당신이 맛있게 먹으면 행복할 것 같아서요. 지난번에도 저보고 요리하지 말라고 해서, 엄청 서운했던 거 알아요?”
은하가 떡국을 끓였던 어느 날을 생각하면서 뾰로통하게 말했다.
“그랬나? 난 그냥 당신 고생할까봐 한 말이었는데.”
“그때 전, 제가 해주는 음식을 싫어하는 줄 알고 오해했었어요.”
은하가 지난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지금이야 그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지만, 그때는 정말 오해를 했었다. 그래서 엄청 서운했었는데…….
“그랬다면 사과할게. 내가 아직 당신 마음 다 알기에는 멀었네.”
도훈이 은하를 당겨 안으며 볼에 뽀뽀를 했다.
“이건 오늘 아침 밥값.”
예고 없는 볼 뽀뽀에 은하는 설레고 말았다. 그녀가 얼른 빨개진 얼굴을 수습하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제가 만들어드릴게요. 이제 식품 회사 부사장님이기도 하니까, 이것저것 많이 먹어보셔야죠.”
“그래, 그럴게.”
도훈의 그윽한 눈빛을 받으며 빈 접시를 치우려는데, 갑자기 아랫배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아……!”
“왜 그래?”
“그냥…… 아랫배가 콕콕 쑤시는 느낌이 들어서요.”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네?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지난번에도 그러다가 복통으로 고생했잖아.”
그런가?
하긴, 그동안 잘 느끼지 못한 생경한 아픔이었다.
그래도 잠깐씩 콕콕 쑤시듯 아픈 걸 가지고 병원에 가기에는 어쩐지 민망해서, 조금 더 참아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설거지를 마치고 나오니 도훈이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출근을 해야 할 사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은하는 무슨 일일까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도훈 씨 출근 준비 안 하세요? 여기서 뭐 해요?”
“당신 기다리고 있었어. 병원에 같이 가려고.”
“네? 아, 아녜요. 정말 별거 아니에요.”
사실 여전히 간헐적인 통증이 있지만 심하진 않았다. 그리고 병원에 가더라도 혼자 가면 될 일이이었다.
“정 걱정되면, 병원은 저 혼자 갈게요. 갔다와서 전화할게요.”
“그러지 말고 내 말 들어. 얼른 준비해. 회사에는 이미 조금 늦는다고 했으니까, 당신이랑 병원 갔다가 출근하면 돼.”
“도훈 씨…….”
“지난번에도 아플 때 남편 없이 혼자 갔잖아. 마음이 얼마나 안 좋았는지 알아? 이번에는 꼭 같이 가야겠어. 아버님께도 들를 겸.”
“……알겠어요.”
별건 아니지만, 도훈이 이렇게 나오니 계속해서 반대를 하기도 무리였다.
은하는 서둘러 외출준비를 하고 도훈과 함께 병원으로 나섰다.
***
병원에 도착하니 은표가 휠체어를 밀고 둘을 마중 나와 있었다.
“아빠!”
“은하 왔니? 최 서방도 어서 오게.”
은표는 아직도 병원에서 지냈지만, 재활치료가 잘돼서 이제는 혼자서 걸을 수도 있었다. 다만 아직은 무리를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여전히 휠체어를 이용하고 있었다.
“왜 나와 계세요? 우리가 올라가면 되는데.”
“나도 답답해서 그러지. 그나저나, 우리 딸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 왜 병원에 온 거야?”
“별거 아니에요. 도훈 씨가 제가 아픈 걸 워낙 싫어해서, 확인차 병원에 온 거예요. 올라가요. 아빠 병실에 들어가는 거 보고, 저 검사받으러 갈게요.”
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훈이 자연스레 은표의 휠체어를 밀었다.
“참, 최 서방. 하늘식품을 살려줘서 고맙네.”
“별말씀을요. 저희 그냥 투자한 거 아닙니다. 미래를 본 거죠. 빨리 쾌차하셔서 다시 사업하셔야죠, 아버님.”
도훈은 제일푸드 부사장으로 승진하자마자 하늘식품에 큰 투자를 해서 기사회생시켰다.
“그래, 최 서방. 나도 이제 다시 시작해보고 싶네. 이번 일로 내가 배운 게 참 많아.”
덕분에 은표는 더 삶의 의지를 다지게 됐고, 그 사이 찬숙과는 완전히 이별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찬숙은 은표가 깨어나고 찬우가 잡혀가는 것을 보고는 어느 날 짐을 챙겨 자취를 감추었다.
은하는 그로 인해 은표가 상처를 받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오히려 은표는 홀가분한 심정이었다. 만약 울며불며 매달렸다면 서로 피곤했을 것이다. 10여 년을 속아줬으면 충분하기에 은표는 더는 그녀에게 놀아날 마음이 없었으니까.
“그동안 내가 살아온 방식이 잘못된 건 아닐까 고민했었는데…… 그래도 남부끄럽지 않게 반듯하게 살았기 때문에 은하도 이렇게 자네를 만나 행복하고, 나 또한 다시 살아난 게 아닌가 싶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버님.”
세 사람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격려했다.
***
은표를 병실에 올려 보내고 도훈과 은하는 바로 내과로 방문했다.
그저 가벼운 통증이라고 생각했는데, 진료 대기실에 앉아 있으니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도훈의 손을 꼭 잡고 말았다.
“나 이상하게 떨려요. 같이 와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는 무조건 병원은 같이 올게. 떨지 마. 별거 아닐 테니까.”
“네.”
도훈의 미소에 은하도 긴장을 풀고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여은하 씨. 들어오세요.”
이름이 불리자 은하와 도훈이 진료실로 함께 들어갔다.
“부사장님이 같이 오시다니 잘됐네요.”
의사가 도훈을 보고 아는 체를 했다. 보호자가 같이 온 것을 확인하는 듯한 말에 도훈도 일순 긴장했다.
“왜, 아내가 어디가 안 좋습니까?”
“아뇨. 산모님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산모요?”
“임신 5주차시네요. 산부인과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
은하는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도훈의 입가에는 기쁨의 미소가 흘러나왔다.
“정말이십니까?”
“네. 피검사 결과 임신이시네요. 다른 검사는 산부인과로 내원하셔서 받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믿기지 않는 사실에 두 사람은 내과를 나오자마자 산부인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초음파 사진을 받고서야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도훈 씨, 나 왜 이렇게 아기가 안 생기나 초조했는데…… 너무 좋아요.”
“초조했다고?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그냥…… 도훈 씨 닮은 아이, 빨리 낳고 싶었거든요.”
“고마워. 내 아이라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아. 너무 신기하고 기분이 벅차.”
“저도요. 우리 둘의 아기라니. 너무 행복해요.”
병원을 나오자마자 도훈이 은하를 힘껏 껴안았다. 세상의 모든 사물이 아름답고 행복하게만 보였다.
“우리가 어쩌다 결혼도 하고, 아이까지 생겼을까요?”
“그러니까 인연이겠지?”
“당신에게 결혼하자고 매달렸을 땐 정말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는데……. 만약 그때 당신에게 찾아가지 않았다면, 지금 이 행복은 없었겠죠?”
은하는 모든 게 신기했다.
도훈을 만나고, 결혼하고, 아이가 생긴 지금 이 순간까지. 모든 순간이 기적 같았다.
“나 당신에게 더 잘 할게요. 우리 행복하게 살아요.”
“나야말로 더 잘할게. 우리 아기랑 행복하게 살자.”
도훈은 은하의 이마에 입술을 지그시 갖다댔다. 마음이 너무 벅차서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은하 역시 그의 충만한 사랑을 느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도훈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눈으로, 코로 입술을 내리더니, 마지막으로 뜨겁게 은하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행복한 입맞춤이었다.
-마침-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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