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찬우가 구속된 뒤, 그에게 사주했던 세훈도 당연히 무사하진 못했다. 두 사람은 각자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 검찰에 불려 다니며 조사를 받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도 한바탕 난리가 났다. 지금껏 큰 스캔들 없이 좋은 기업으로 알려져 있던 제일그룹이었기에, 세훈이 저지른 사건의 타격이 꽤 컸다.
이학은 더 이상의 이미지 추락을 막기 위해 공력을 들여 찬우를 몰아세웠다.
살인미수는 물론, 기술도용 역시 순진한 세훈이 찬우에게 당한 것처럼 그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웠다.
그동안 양아치 짓을 해온 찬우에게는 또 다른 범죄행위가 많았기에 어느 정도 여론몰이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조사 과정에서 세훈 역시 이 일 외에도 불법을 저지른 것이 밝혀지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특히 그 불법이 갑질과 관련된 일이라서 더 치명적이었다.
제일가의 후계자가 될 거라는 명분으로, 하청 업체의 뒷돈을 받아 챙기고 대놓고 접대나 금품수수를 요구했다는 제보가 여기저기서 흘러들어왔다. 세훈의 이미지와 함께 제일그룹의 이미지도 또다시 추락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그쯤 되자 이학은 빠르게 세훈과 손절을 시도했다.
세훈은 집안에서도 내놓은 자식이었으며, 이번 기회에 죗값을 받게 하고 제일그룹도 쇄신하겠다고 공식 선언을 한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일가의 손자인데 뒷막음을 해주겠지 생각했던 세훈은 뒤통수를 맞았고, 선주는 기함했다.
제 아들이 제일그룹 후계자가 되기는커녕 감옥에 가게 생겼으니, 당연한 얘기였다.
세훈을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선주가 이학을 찾아가 사정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버님, 그래도 이건 아니죠. 세훈이 아버님 손자예요. 제발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세요. 제일가의 권력과 돈이면 세훈이 하나 빼내는 거, 일도 아니시잖아요.”
“지금 뭘 잘했다고 나에게 네 아들을 구해달라는 게냐?”
“네?”
“도대체 우리 집안을 뭘로 보고, 애 교육을 어떻게 시켰기에 이런 식으로 뒤에서 말도 안 되는 헛짓거리를 해?”
“아버님, 그건 세훈이가 어려서부터 제 아버지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
선주는 아직까지도 이게 다 이 집안의 잘못이지, 본인이나 세훈의 잘못은 없다고 생각했다.
“시끄럽다! 집안 망신을 시켜도 유분수지. 본처를 밀어내고 들어앉았으면 적어도 제 할 일은 잘 해야지. 세훈이가 그리된 건 다 네 탓이다.”
“아버님……!”
“그러니까 이 집에서 쫓겨나기 싫으면, 앞으로는 조용히 나대지 말고 살아.”
선주는 서슬 퍼런 이학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그래도 제 핏줄을 이은 손자인데…….
회사의 안위가 중요한 사람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냉혹할 줄은 몰랐기에 선주는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 그나마 비벼볼 언덕이라고는 일준뿐이었지만, 그 역시 선주 편은 아니었다.
“여보, 당신이라도 아버님 말려봐요. 네? 세훈이 이대로 감옥 가게 둘 거냐고요!”
“난 아버님 말씀이 맞다고 봐. 당신의 그 욕심과 맹목적인 사랑이 세훈이를 이렇게 괴물로 만들었어. 세훈이를 위해서라도 제대로 죗값을 받는 게 나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아버님도 당신도. 어떻게 이렇게 우리 모자한테 매정해요? 내가 이 집에 바친 인생이 20년인데. 어떻게 이러냐고요?”
“그래서 이번 일에 당신이 개입된 건 얘기하지 않은 거야.”
“여보…….”
선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놀라서 쳐다보는 선주를 보며 일준이 다시 한번 일침을 가했다.
“당신이 그래도 20년 동안 이 집에서 고생한 게 있으니까, 나도 최소한의 배려를 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아버지 말씀대로 이혼당하기 싫으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조용히 있다가 세훈이가 죗값 받고 나오면, 그때 쇄신해서 새롭게 살아.”
“여보……!”
선주는 그만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자신의 잘못도 잘못이지만, 더는 세훈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 하리까지 세훈과의 이혼을 선언하면서 선주의 충격은 배가 됐다.
“어머니, 저 이혼하겠습니다.”
“뭐? 새아가, 너까지 이러면 어떡하니? 세훈이가 잘못한 것도 있긴 하지만 억울한 점도 많아. 사돈어른들께는 그 점을 잘 말씀드리면……”
“아뇨. 꼭 이번 일 때문만은 아니에요. 솔직히 그동안 세훈 씨가 저에게 많이 무심했거든요.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저도 새출발하고 싶어요.”
하리는 그 말과 함께 미련 없이 제일가를 떠났다.
제일가에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는 선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앓아눕고 말았다.
도훈과 은하가 찾아갔을 때, 선주는 많이 지쳐 보였다. 그래도 자존심상 약해 보이기 싫었는지 두 사람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그래, 네 동생을 그리 만드니 이제야 속이 시원하니? 도대체 저 여자애가 뭐라고, 네 동생을 이리 만들어?”
“어머니는 아직도 어머니와 세훈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시는군요.”
“뭐야?”
“제가 오늘 들른 건 어머니의 한탄을 들으려고 온 게 아닙니다. 세훈이야 어차피 법대로 죗값 받을 테니 차치하고, 어머니께 경고 드리러 온 겁니다.”
“뭐, 뭐가 어째?”
“듣자하니 저희를 흔들어 이혼시키고 싶으셨다고요?”
“아니, 그걸 어떻게……?”
“서영이가 그러더군요. 어머니의 큰 그림이었다고.”
“허……!”
서영도 궁지에 몰리니 선주를 판 모양이었다. 다소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어서 선주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벙긋댔다.
“이번 세훈이 일도 그렇고, 저를 이혼시키려고 하신 것도 그렇고.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저 몰래 일을 벌이셨다간, 저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도훈의 차가운 경고에 선주는 그만 망연자실해지고 말았다.
***
“괜찮으실까요? 표정이 많이 안 좋으시던데……”
본가를 나오자마자 은하가 물었다. 사실 걱정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긴 했지만, 그래도 그 위풍당당하던 선주가 그렇게 힘없게 변해버린 것은 좀 안타깝긴 했다.
“자업자득이야. 신경 쓰지 마.”
“네…….”
“그리고 별일 없을 거야. 독하신 분이니까.”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훈이 그리 말하니 맞는 말 같았다. 그리고 어쨌거나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 죗값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참, 저 이대로 괜찮을까요? 그래도 처음 뵙는데.”
“응, 예뻐. 엄마도 좋아하실 거야. 걱정 마.”
“그래도 떨려요.”
은하가 수줍게 말하자 도훈이 손을 맞잡아주었다. 긴장된 마음이 조금은 풀어졌다.
“그럼, 가볼까?”
“네.”
은하가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다음 행선지를 위해 차에 올라탔다.
***
사방이 탁 트이고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
이곳은 바로 도훈의 생모, 혜련이 잠들어 있는 납골당이었다.
막 건물 입구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은하는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녀는 품에 하얀 백합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
도훈 역시 차에서 내려 은하 옆에 섰다. 그의 손에는 꽃 대신 작은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이곳이군요. 너무 평화롭고 아름다워요.”
“어머니도 그렇게 느끼시면 좋겠네.”
도훈은 색다른 감회를 느끼며 은하의 손을 꼭 잡았다.
늘 혼자 오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사랑하는 은하와 같이 왔다는 것에 왠지 가슴이 벅찼다.
“들어가지.”
“네.”
도훈이 은하의 손을 이끌었다. 은하는 설레고 긴장된 마음으로 도훈을 따랐다.
도훈을 사랑하게 되면서 이곳에 몇 번이고 오고 싶었던 은하였다. 하지만 그동안은 바쁜 사람을 조르는 것 같아서 기회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은표가 깨어난 뒤 도훈이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걸 보자, 은하도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넌지시 제 생각을 전달했다.
‘저 도훈 씨를 낳아주신 친어머니께 인사드리고 싶어요.’
혹시나 오버일까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은하를 보며 도훈은 크게 감동을 받았다.
혜련 얘기는 어릴 때부터 금기여서 납골당에 모셔다만 놓고 한 번도 제대로 챙긴 적은 없었다.
제사도 제대로 지내 본 적이 없었다. 재벌집 며느리가 자살했다는 게 알려질까 이학이 전전긍긍했으니까.
가끔 도훈 혼자 납골당에 와서 쓰린 속을 달래고 가는 게 다였다.
그런데 은하가 혜련에게 인사를 하고 싶다는 말이 왜 이렇게 뭉클한 것인지.
은하의 진심을 아는 도훈은 당연히 승낙했고, 드디어 오늘 두 사람이 함께 혜련의 납골당을 찾은 것이었다.
납골당 안에서도 넓은 면적과 최고급 인테리어로 눈을 사로잡는 VIP룸. 그곳에 혜련의 유골함이 보관돼 있었다.
그리고 그 유골함 옆에는 혜련의 젊은 시절 사진이 같이 놓여 있었다.
도훈은 그 사진을 보며 감상에 젖었고, 은하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놀라웠다.
“어머니가 굉장히 미인이시네요. 도훈 씨랑 많이 닮았어요.”
“그래?”
“네. 당신이 누굴 닮아 이렇게 잘생겼나 했더니, 어머니를 닮았나 봐요.”
도훈의 입가에 미소가 잔잔히 흘렀다.
이렇게 아름답고 인자해 보이는 분이 일찍 돌아가셨으니 도훈의 마음이 어땠을까.
은하는 유골함 앞에 백합을 놓고는 제 소개를 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도훈 씨와 결혼한 여은하라고 합니다.”
직접 인사드리는 것도 아닌데도 목소리가 떨려왔다.
“도훈 씨를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평생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도훈 씨를 낳아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지켜봐 주세요.”
말 한 마디 한 마디 정성스럽게 내어놓는 그 모습이 고마워서, 도훈은 감격에 겨워 은하를 바라보았다.
은하가 도훈에게 손을 내밀자, 도훈이 알아차리고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이건 제가 직접 끓인 떡국인데요.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쇼핑백에서 잘 포장해온 떡국을 꺼내 앞에 놓았다. 떡국은 아직까지 따뜻하게 모락모락 김을 피워냈다.
은하는 아침부터 혜련이 좋아하는 떡국을 끓인다며 부지런을 떨었다. 도훈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렸으나, 정성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말에 도훈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혜련을 챙겨주려는 은하의 마음이 너무 예뻤으니까.
그리고 지금, 혜련의 영정사진 앞에 놓인 떡국과 은하의 뒷모습을 보며 도훈은 다시 한번 그녀와 결혼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내 입에 맞으니까, 엄마 입에도 맞을 거야.”
도훈이 입을 열어 은하를 거들었다.
“자주 올게요, 어머니. 앞으로 이 사람 데리고.”
도훈은 은하와 두 손을 맞잡고 그렇게 혜련 앞에서 약속했다.
납골당에서 인사를 하고 나오니 벌써 오후가 한나절 흘러 있었다.
“고마워.”
“제가 뭘요. 앞으로 자주 찾아뵈러 와요.”
“그래.”
도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도훈을 은하가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근데 도훈 씨 참 대단해요.”
“뭐가?”
“나 같으면 자라면서 많이 삐뚤어졌을 것 같은데. 정말로 억하심정을 가지고 그 사람들에게 복수했을지도 몰라요.”
“나도 어릴 땐 그랬어. 지금도 그들이 싫은 건 여전하고. 하지만 그래봤자 그들에게 빌미를 주는 거라고 생각했어. 엄마도 그걸 원하지 않으셨을 거고.”
은하가 도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속삭였다.
“내가 이렇게 멋진 사람의 아내라는 게 행복해요.”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주소|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역로3길 40-36 B동 710호 (신내동)
전화|02)906-7768 / 팩스|02)906-7769
값 100원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와이엠북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