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찬우는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이번에는 무조건 죽여버리겠다, 오직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꺽꺽 소리를 내며 숨이 넘어가는 은표를 보자 엔도르핀이 팍팍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래, 그렇게 죽는 거야. 죽어야 돼!”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병실문이 열리고, 도훈과 영철이 경찰과 함께 들이닥쳤다. 은표의 상태 확인을 위해 주치의도 뒤따랐다.
경찰은 은표 위에서 힘을 쓰고 있는 찬우부터 떼어냈다.
“장찬우. 이제 그만해.”
찬우는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순식간에 정신을 잃고, 은표를 죽이는 것에 몰두하고 말았음을 깨달았다.
“다 끝났어. 사람 목숨이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 게 아니라는 거, 당신이 더 잘 알지 않나?”
도훈은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로 찬우를 다그쳤다. 잔뜩 흥분한 것보다 이런 냉정한 목소리가 더 위협적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찬우가 경찰에 붙들린 채 주변 상황을 둘러보며 눈알을 굴렸다.
“최도훈……? 당신이 여기 어떻게?”
“날 알아보다니, 눈썰미는 있나 보네.”
찬우는 도훈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세훈과 후계자 경쟁 중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빈틈이 없고 완벽해서 찬우가 접근하기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하늘식품 기술을 빼돌릴 때, 처음부터 도훈을 고려하지 않고 세훈에게 찾아간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이 모든 것이, 다 당신을 잡기 위한 계획이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
“뭐?”
“왜 그 많던 경호원이 오늘따라 자리를 비웠을까. 왜 못 보던 뚱뚱한 남자 간호사가 돌아다니는데 누구 하나 의심하지 않을까.”
“그게 무슨…….”
그러고 보면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마침 사람들이 별로 없는 시간이라는 은영의 말을 믿었는데…….
그럼 설마, 은영이 배신한 건가?
도훈이 찬우의 속내를 읽고 대답했다.
“그래. 하필이면 당신이 매수한 간호사가 그 계획을 우리에게 들켜버렸지. 그래서 이렇게 당신을 데려오는 데 유인한 거고.”
은표는 이틀 전 완전히 의식을 회복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찬우의 사주를 받은 간호사 은영이 은표에게 독극물을 주사하려다 딱 걸리고 말았다.
도훈은 그녀를 증인으로 세우고 찬우와 세훈까지 엮어 해결하려고 했으나 은표는 은영을 통해 찬우를 불러들이길 원했다.
너무 위험하다는 도훈의 이야기에도 은표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오히려 찬우 같은 사람은 확실하게 범행 현장에서 잡는 게 더 낫다며 도훈을 설득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을 꾸민 것이다.
은영에게 30분 전쯤 찬우를 불러 오게 만들었고, 일부러 경호원도 의료진도 그를 신경 쓰지 않는 척했다.
마음이 급한 상태였던 찬우는 잘 걸려들었고, 결국 제 발등을 찍고 말았다.
도훈의 친절한 설명에 화가 난 찬우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게, 머리가 나쁘면 의심이라도 했어야지. 물론 나는 당신이 저지르고자 하는 살인미수 증거도 남기고, 현장 검거도 했으니 일석이조지만.”
“최도훈!”
완전히 뒤통수를 맞아버렸다. 최도훈이 이렇게 철저한 사람이라는 것을 찬우는 이제야 깨달았다.
“하지만 나도 그냥 이대로 잡혀가진 않지. 이 일을 나 혼자 했을 것 같아? 내가 잡혀가면 당신네 집안도 무사하지 못해.”
“알아, 제일푸드 최세훈 팀장과 함께 벌인 일이라는 거.”
“……그걸 어떻게?”
도훈이 찬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지. 어차피 여 대표님도 살아났잖아.”
은표가 직접 겪은 사건의 증인이었다. 그가 깨어났으니 그들의 추악한 사건의 진실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장찬우, 이제 더 이상의 눈가림은 안 통해. 하늘식품의 기술을 도용하고, 그것도 모자라 대표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네 입으로 직접 밝혀. 물론 최세훈 팀장이 사주했다는 것도 함께. 그러고 나서 당신들이 저지른 모든 불법 행위를 제대로 처벌 받아.”
찬우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때 바로 은표의 숨통을 끊어놓지 못한 것이 사무치게 후회가 됐다.
도훈은 반성의 기미가 없는 찬우를 차갑게 일별하고, 경찰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하며 부탁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도훈은 이 일뿐만 아니라 그동안 찬우가 벌인 불법 도박, 사기, 강도 사건 등 나열하기도 힘든 많은 자료들까지 모두 첨부해서 보내 버렸다.
생각 같아서는 직접 주먹으로도 한 대 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찬우는 바로 은하를 도박 빚에 팔려던 사람이었으니까.
경찰이 찬우를 데리고 나가고, 시끄러웠던 소란이 잠잠해지자 은표가 회한에 잠겨 눈을 감았다.
그는 한평생 좋은 마음으로 선하게 잘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하늘식품을 운영하면서도 양심적으로 사업을 했다. 내 주머니보다는 직원들 주머니를 더 채웠고, 공익을 위한 기술개발에 앞장서고 사회에 보답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았어도, 늘 행복한 결말만 맞는 건 아닌 듯했다.
십여 년 전 제 회사에 경리로 들어온 찬숙을 아내로 받아준 게 죄였을까.
그래도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찬숙도 찬우도 그저 돈만 바라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꼭 인생을 잘못 살아온 것처럼 헛헛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도훈이 은표 앞에 고개를 숙였다.
도훈은 이틀 전 은표가 깨어났을 때 의료진의 연락을 받고 가장 먼저 달려와 그의 안위를 살폈다.
처음에는 도훈이 누군지 몰라 당황하던 은표는 그가 은하와 결혼한 남자라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물론 도훈이 제일그룹 사람이라는 사실에는 실망하고 충격을 받긴 했지만, 은표 편에 서서 세훈과 찬우의 만행을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은영이 은표를 죽이라는 사주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도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은표는 찬우를 불러들일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은표가 완전히 깨어난 것을 은하에게 비밀에 부친 것도 은표의 생각이었다. 찬우의 일을 다 해결하고 나서 은하를 만나겠다며 도훈을 설득했던 것이다.
“자네가 왜? 아…… 자네 집안이 엮인 일이라서?”
“……네,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용서할 수 없는 원수 집안이긴 하네만, 다르게 생각하면 자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오늘 정말 죽었을지도 모르네. 그나마 자네가 은하랑 결혼해서 이 일을 파헤쳐 주었기에 수면으로 드러났다고 생각하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도훈은 그래도 마음이 불편하기만 했다.
“그렇다네.”
은표는 진심이었다. 어쩌면 영원히 묻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은하가 우연찮게 도훈과 결혼하게 되면서 사건을 꾸민 세훈이 제 발 저리게 된 거니까.
은표는 그래서 오히려 도훈과 은하가 정말로 엄청나게 특별한 인연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인연이 자신까지 살렸으니까.
“이제 은하에게 솔직히 말하게. 내가 죽었다면 상황이 달라졌겠지만, 무사한 지금은 은하도 자네를 이해해줄 걸세.”
깨어나고 은하와 직접 얘기를 해 본 적은 없지만 그녀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긴장하는 도훈의 모습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간절히 사랑하는지.
“감사합니다, 아버님.”
도훈이 깍듯이 감사 인사를 했다. 은하도 은하지만, 제일그룹의 사람이 사위가 되는 건 은표가 더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의 회사와 건강을 모두 잃게 만든 곳이 제일푸드니까.
그런데 은표는 도훈을 받아들여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도훈은 기쁘고 홀가분했다.
“도훈 씨…….”
그때 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훈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은하가 병실 입구에 서서 그를 보고 있었다.
“당신이 여기 어떻게 왔어?”
“아까 전화 받고 나가는 소리에 깼는데, 혹시나 하고…… 너무 걱정돼서 택시 타고 왔어요. 아빠한테 무슨 일……. 아빠?”
은하가 침대에서 눈을 뜨고 있는 은표를 발견하고 놀라서 가까이 다가갔다.
“아빠! 아빠 깨어나신 거예요? 언제?”
은하가 횡설수설하며 은표에게 안겼다.
“아빠…… 저 알아보시겠어요? 정말 의식이 다 돌아온 거예요?”
은표는 눈물을 흘리며 은하를 안아주었다.
“그래. 걱정하지 마라. 아빠 이제 괜찮아.”
“전…… 정말 너무 무서웠어요. 아빠까지 절 두고 가실까 봐…….”
은하가 어린아이처럼 은표에게 매달려서 엉엉 울었다. 그동안 말은 안 했지만 정말 막막했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아빠가 다시 깨어나다니. 이게 꿈은 아닐까 싶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은하야, 할 말이 있어.”
“할 말이라뇨?”
은하의 격한 감정이 어느 정도 잦아들자, 곁에서 지켜보던 도훈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은하가 오기 전,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틀 전에 은표의 의식이 돌아왔지만 왜 감출 수밖에 없었는지.
은하는 처음에는 믿기지 않아 했다.
그러다 제일푸드에서 하늘식품 기술력을 가로챘고, 그걸 감추기 위해 은표를 사고로 위장해 죽이고자 했다는 말을 들을 때는 낯빛이 파랗게 변했다.
확실히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게 정말 사실인가요?”
“그래. 그래서 그동안 당신에게 면목이 없었어. 내가 저지른 짓은 아니지만, 우리 집안에서 저지른 거니까.”
“설마, 그전에는 그래서…… 날 거부했던 거예요?”
“맞아. 당신에게 상처주고 싶지 않아서, 모든 걸 혼자서 감당하려고도 해봤는데…… 당신을 포기 못 하겠더라고.”
어쩐지…… 조금 이상했다.
집안에 문제가 있긴 했어도 그런 것 때문에 도훈이 일부러 은하를 밀어낼 정도는 아니라고 봤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은표와 연관이 있었다면, 도훈의 성격으론 당연히 그랬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모든 사정을 이해한 은하가 도훈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바보처럼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어요? 말도 못 하고.”
“몇 번이나 말하려고 했는데…… 그때까진 해결된 상황이 아니었고, 그것 때문에 당신이 떠나면 난 살 수가 없겠더라고. 그래서 말해야지 말해야지 했지만 결국 오늘에서야 말하게 된 거야.”
“솔직히 너무 놀랍고 당황스럽긴 해요. 만약 아빠가 깨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이 이야기를 들었으면…… 정말 너무 힘들었을 것 같고요.”
“…….”
은하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은하의 입으로 들으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
도훈의 표정이 절망으로 일그러질 때였다.
“하지만 나는 당신과 헤어지고 싶은 생각 없어요. 당신 가족이, 당신은 아니잖아요.”
“뭐?”
“어떻게 헤어져요. 이렇게 사랑하는데…….”
“그럼 날…… 용서해주는 건가?”
“용서해주고 말고 할 게 뭐 있어요. 우리 결혼한 사이잖아요. 난 당신 아내로 평생 살고 싶어요.”
“여은하…….”
도훈이 은하를 와락 껴안았다. 이렇게 속이 깊은 여자인 것을 모르고, 그동안 그렇게 혼자 속앓이를 한 게 조금은 억울할 정도였다.
“아빠가 봐요.”
“보면 어때. 우리는 결혼한 부부인데.”
두 사람은 웃으면서 눈을 마주쳤다. 그 모습을 은표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나도 당신 남편으로 평생 살고 싶어. 고마워. 앞으로 잘 할게.”
도훈은 이제야 마음의 짐을 덜고 은하를 편안히 안았다.
은하도 그동안 마음고생했을 도훈의 마음을 위로하듯, 그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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