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주말 오후, 도훈과 은하가 찾은 곳은 한강 변에 위치한 분위기가 좋은 레스토랑이었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프라이빗한 룸, 그리고 그림처럼 펼쳐진 한강 뷰가 인상적인 곳이었다.
알고 보니 유명한 스테이크 맛집이라고 했다.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각이라 내부는 한산했다.
“와…… 너무 예쁜데요? 분위기도 좋고.”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도훈이 은하의 화사한 미소를 눈에 담으며 대답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예쁜 미소라 도훈도 절로 표정이 밝아졌다.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예약을 했는지 매니저가 두 사람을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은하가 아름다운 뷰에 감탄하고 있을 때 도훈이 다가와 의자를 빼주었다.
“고마워요.”
도훈은 요즘 모든 것이 은하 위주였다.
의자를 빼주는 것은 물론 차에서 내릴 때 문을 잡아주거나, 심지어 차에 탈 때에도 부딪치지 말라고 머리 위로 손을 올려주곤 했다.
처음에는 그런 친절이 어색하고 민망해서 거절했지만 도훈은 해주고 싶다며 끝까지 고집을 피웠다.
할 수 없이 도훈이 하는 대로 내버려 뒀더니, 매번 대접받는 기분이 들어서 은하도 좋았다.
게다가 다른 여자들이 쳐다보는 부러움의 눈초리란.
그럴 때면 정말 공주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해지곤 했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자주 못 나와서 미안해.”
“바쁘시잖아요. 그리고 지금 이렇게 데이트하는 걸로 충분해요.”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은 지금껏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계약결혼이었어도 밖에서 밥 한 번 먹은 적이 없었다니. 도훈이 생각해도 너무 무심했다.
그래도 은하는 크게 서운해하지 않고 다 이해해줬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라도, 이제부터는 더 많은 것을 함께하며 보답하고 싶었는데…….
도훈이 은하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사이, 그들이 주문한 스테이크가 나왔다.
그 먹음직스러운 모습에 은하는 보기만 해도 입 안에 침이 고였다.
도훈은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잘라 은하 앞에 놔주었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
도훈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이르듯 자상하게 말했다.
그 때문에 얼굴이 붉어진 은하 앞에 놓인 잔에 와인도 따라주었다.
“고마워요.”
은하는 설레고 행복한 마음으로 얼른 포크를 들었다.
도훈이 잘라준 스테이크 한 점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다가 너무 맛있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 자신이 먹은 스테이크 맛이랑 전혀 달랐다.
한 입 베어 물자마자 나오는 진하고 풍성한 육즙과 입 안에서 살살 녹는 부드러운 식감, 자극적이지 않고 고기 본연의 맛을 살려주는 과일향 소스까지.
포크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잘 먹네.”
“……맛있어요. 도훈 씨도 드세요.”
“그러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도훈은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대신 은하가 오물거리며 열심히 먹는 모습만 쳐다보았다.
허겁지겁 먹고 보니 금세 접시가 비워졌다. 이 정도로 정신을 못 차리고 먹을 줄은 몰랐는데, 제 앞에 놓인 빈 접시를 보니 그제야 아차 싶었다.
“왜 안 드세요?”
그런데 도훈의 접시는 거의 그대로였다. 심지어 운전을 해야 해서 와인도 마시지 않았다.
“당신이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네.”
은하가 막 입 안으로 흘려 넣었던 와인을 꿀꺽하고 삼켰다. 잘못하면 입 밖으로 뱉을 뻔했다.
“제가 너무 허겁지겁 먹었나 봐요.”
너무 급하게 게걸스럽게 먹은 걸 그렇게 돌려 표현하나 싶어서 은하가 수습했다.
도훈은 픽 웃으면서 물로 입술을 축였다.
“먹는 것도 어쩜 이리 예쁜지 모르겠어.”
또다시 은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도훈은 요즘 들어 이런 말을 시도 때도 없이 잘도 했다.
“도훈 씨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어요.”
도훈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런 면이 어떤 면인데?”
“음…… 뭔가 되게 닭살스럽고, 여우 같은?”
“여우?”
“제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시는데…… 잠깐만 같이 있어도 정신이 쏙 빠지는 기분이거든요.”
도훈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은하가 귀여워서 입가에 또 한 번 미소가 걸렸다.
“그건 당신 얘긴데.”
“네?”
“당신이야 말로, 같이 있으면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니까.”
도훈이 그윽한 눈빛으로 은하를 보며 말했다. 그 눈빛에 은하는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뜨겁게 만들면 어쩌자는 건지.
레스토랑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도훈 특유의 야릇하고 뜨거운 표정은 숨길 수가 없었다.
은하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에게 빠져 정신을 놓으면 자꾸만 음란한 생각만 떠올라서.
반대로 도훈은 은하의 행동 하나하나를 다 머릿속에 새기고 있었다. 할 수 있을 때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싶었다.
이 행복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은하와 함께하는 찰나의 시간도 너무 소중했다.
“다 먹었으면 그만 일어날까.”
“네. 이제 우리 어디 가요?”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도훈과 단둘이 있을 수만 있다면 어디든 좋았다. 장소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원하는 데가 있으면 어디든 말해. 이왕이면 단둘이, 알몸으로 뒹굴 수 있는 곳이면 더 좋고.”
“어머, 도훈 씨.”
은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런 말도 어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는지.
그런데 그게 싫지 않고,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스스로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도훈이 일어나자 은하가 자리를 정돈하고 뒤따라 일어났다.
“너, 은하 아니니?”
그때였다. 누군가 가볍게 어깨를 치는 바람에, 은하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 시우야!”
시우는 미국에서 은하와 같이 공부하던 친구였다. 이곳에서 그녀를 만날 줄이야.
은하가 반가움에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맞네, 여은하! 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학교도 휴학하고 연락도 다 끊고. 친구들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시우도 은하의 손을 맞잡은 채 발을 동동 구르며 반가워하다가 이내 서운함을 내비쳤다.
“그렇게 됐어. 연락 못 한 거 정말 미안해.”
일부러 연락을 끊은 건 아니었다. 정신이 없었을 뿐.
아빠 사고를 수습하기도 바빴고, 속전속결로 이렇게 결혼까지 하게 됐으니. 미안하게도 친구까지 챙길 여력이 없었다.
“됐어. 지지배야. 그래도 이렇게 다시 보니 너무 반갑다.”
“나도! 근데 넌 한국에 웬일이야?”
“응. 아빠 생신이라 잠깐 왔다가, 다시 미국 가야지.”
“그렇구나…….”
“이제 연락 끊지 마. SNS 답장도 좀 하고.”
“그래.”
시우는 여전히 밝고 활기차 보였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을 정도로.
“그나저나, 누구야?”
“아…… 그게…….”
시우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계산하고 있는 도훈을 가리키며 물었다.
“낯이 많이 익는데…….”
시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도 은하와 같은 경영학 전공이니 도훈을 경제지 등에서 몇 번 접했을 터였다.
은하가 도훈을 뭐라고 소개해야 할까 난감해하는데 시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국에서 네가 좋아했던 그 남자는 이제 다 잊은 거야? 왜, 너 술 마실 때마다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섹시함의 끝판왕, 남자 있었잖아?”
“시, 시우야. 그 얘기는 그만…….”
작은 소리로 말하긴 했지만 분명 뒤에서도 들릴 수 있는 목소리였다.
은하가 너무 놀라서 그녀의 말을 저지하려는데, 시우가 먼저 제 손으로 자기 입을 막았다.
“어머.”
“……도훈 씨.”
설마하고 뒤돌아보니 어느새 계산을 마친 도훈이 그녀들 가까이에 서 있었다.
시우도 제 말을 들었나 싶어 당황하여 입을 가린 모양이었다.
은하는 낭패의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은하 친구, 정시우라고 합니다.”
시우는 얼른 상황을 수습하며 도훈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다행히 도훈은 못 들었는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시우의 인사를 받았다.
“저는 여은하의 남편, 최도훈이라고 합니다.”
은하는 귓가에 꽂히는 도훈의 목소리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남편이라는 말도 너무 설렜지만, 혹시나 시우 말을 들었나 싶어서 신경도 쓰였다.
“결혼이요? 아니, 근데 성함이 어떻게 되신다고요?”
“최도훈입니다.”
“설마…….”
시우는 그제야 도훈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했다.
게다가 이 남자와 결혼이라니?
시우는 놀라서 눈을 끔벅이며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녀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은하야, 너 결혼했어? 이분이랑? 언제, 어떻게?”
“그렇게 됐어. 나중에 다 말해줄게.”
여기서 말하기에는 긴 내용이었다. 둘 다 일행도 있고.
은하는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했다. 시우도 금세 은하의 마음을 눈치챘다. 그녀가 생각해도 당장 여기서 들을 수 있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래. 꼭 연락해야 해. 괜히 바쁜 사람 붙잡았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시우가 작별 인사를 하고 멀어지자 은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시우의 말이 걸린 탓이었다.
‘혹시, 들었을까?’
그 정도 거리였으면 분명 들렸을 텐데.
다시 생각해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하필 시우가 거기서 그 얘기를 할 줄이야.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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