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그 시각, 도훈은 회사 근처 고급 일식집에서 일준과 독대를 하고 있었다.
식사하는 내내 어색한 공기가 룸 안을 가득 메웠다.
부자지간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도훈이 어렸을 때부터 뭘 같이해 본 적이 없었다. 단둘이 그 흔한 외식 한 번 한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도훈이 갑자기 일준을 불러내니 그도 놀라서 달려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비로서 미안하고 면목이 없다 뿐이지, 도훈을 싫어하는 건 아니니까.
“무슨 일이냐? 이제 말해봐라.”
어색한 식사가 끝나고 후식이 나올 때쯤 일준이 먼저 말을 꺼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지 않고서야 자신을 따로 불러낼 도훈이 아니니까.
도훈은 그제야 갖고 온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냐?”
“열어 보시면 압니다.”
일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봉투를 열어 안에 들어 있는 서류를 확인했다.
그것은 이번에 출시되는 제일푸드의 신제품 연구개발 보고서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똑같은 내용이지만 다른 보고서였다. 그 순간, 일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거 어디서 난 거냐?”
일준은 서류를 이리저리 넘기다 맨 앞장의 출처를 보고 기함해서 도훈을 보았다.
“하늘식품? 이게 하늘식품의 것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번 제일푸드 신제품과 똑같은 제품인데, 이게 하늘식품 것이라니.
“최 팀장이 불법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뭐?”
“보시다시피 이번에 출시하는 제품은 하늘식품의 것을 도용한 것으로 시중에 판매되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그게 정말이냐? 정확해?”
일준은 믿을 수가 없다는 눈빛으로 도훈을 보았다. 도훈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증거는 인멸되었고, 증인은 자취를 감췄습니다. 이 보고서 외에는 증거가 없는 셈이죠. 물론 이 보고서도 내용만 같다는 것을 증명할 뿐, 누가 누구를 카피했는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
일준이 말을 아꼈다. 도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 팀장이 그랬을 거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하늘식품이 그랬을 리는 없을 테니까. 우리가 그렇게 보안에 허술한 회사도 아니고.”
“그렇습니다.”
세훈에게 기회를 줬으나 그는 그 기회를 잡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도훈의 계획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학에게 간다면 가장 빠르겠지만, 오랜 세월 많은 일을 겪은 이학은 확실한 증거가 없기에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이대로 신제품 출시를 밀어붙일 공산도 컸다. 이학은 회사의 이익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까.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면 이학은 세훈을 후계자 경쟁에서 완전히 배제시키겠지만, 그와 별개로 제품 카피와 기술도용의 문제는 양심 없는 기업들이 알게 모르게 벌이는 일이었다.
생산공정을 마치고, 곧 출시를 앞둔 제품을 전면 취소하면 손해가 어마어마할 터.
혹시나 하늘식품이 소송을 해도 대기업인 제일푸드의 승산이 크기 때문에 작은 논란쯤으로 덮고 그대로 가려고 할 수도 있었다.
도훈은 하늘식품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나마 일준은 이런 쪽으로는 양심적이었다. 큰 그룹을 이끌기에는 나약한 그의 심성이 이런 곳에서도 발현이 되는 것이다.
어차피 제일푸드의 사장은 일준이었고, 못난 아들이라도 이학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또한 도훈은 일준이 데려온 여자와 그가 낳은 또 다른 아들이 이런 짓을 벌인다는 것을 그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출시 취소하마. 공식적으로 하늘식품에 배상하고, 정확한 절차를 따르도록 해야지.”
역시 일준은 이 사태를 그냥 넘기진 않았다. 제대로 절차를 밟고 해결해주리라 도훈에게 약속했다.
아무리 회장 자리가 탐나도 그렇지, 이런 짓까지 했을 줄이야.
일준은 세훈의 어리석은 행동에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또 뭐가 더 있어?”
“출시를 취소하되, 공식적으로 조치하는 건 조금 더 기다렸다 상황을 보고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칫하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증인, 여 대표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일준이 고개를 흔들며 도훈의 생각을 반대했다.
“전면 대응하면 회사에 타격은 입겠지만 치명적이진 않아. 그런데 세훈이가 왜 그런 짓까지 저질러?”
“그냥 논란으로 지나가느냐, 증인이 나타나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느냐는 엄청난 차이죠. 게다가 애초에 여 대표의 사고부터 개입돼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게 정말이야? 정말 세훈이가 그런 짓까지 저질렀단 말이야?”
도훈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직 확실한 증거를 잡진 못했지만, 은표의 사고 지점에서 사고가 나기 보름 전부터 찬우의 행적을 발견했다.
아마 은표는 찬우가 불러내서 거기에 간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은표가 사고가 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통화한 번호가 대포폰이라는 것도 그 추론에 신빙성을 심어주고 있었다.
도훈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일준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이 일은 어머니도 알고 계실 겁니다. 저나 최 팀장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시는 분이신데, 모를 리가 없으시겠죠.”
아마 뒤에서 세훈을 더 부추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인정받으라고.
그녀의 욕심과 야망은 그러고도 남을 테니까.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어머니와 세훈이가 어떤 사람인지.”
그들을 모함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일준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은 일준이 무책임하게 그들을 내버려 뒀기 때문이니까.
그 옛날 친어머니 혜련에게도 그랬듯이.
도훈의 차가운 시선이 일준에게 와 닿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제 탓임을. 그러니 그들을 욕할 수도 없었다.
“하필 하늘식품이라서…… 네가 곤란하겠구나.”
다른 건 감수할 수 있는데, 도훈의 상황이 제일 안타까웠다.
왜 하필 하늘식품인지. 심지어 은표까지 개입돼 있다니.
일준도 은하를 좋아하는 도훈의 진심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말로 안 해도 그동안 도훈의 행동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거니까.
그러니 더 미안하고 면목이 없었다.
도훈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어렸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 모든 상황이 유독 그에게만 가혹하다 느껴졌다.
“……미안하다.”
일준의 한 마디에 도훈은 일순 행동을 멈추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일준이 제게 속마음을 얘기한 것도, 사과를 한 것도 처음이었다.
“널 볼 면목이 없구나.”
“…….”
“알고 있어.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사과에도 다 때가 있다. 그 시기를 한참 지났다는 것은 일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사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애비라고 만약 이 일로 도훈이 은하와 헤어지게라도 된다면, 일준이 더 마음이 아플 것 같았다.
“그 마음으로 진실을 밝혀주세요. 치러야 할 죗값이 있다면 받게 해주시고요.”
“그래. 그러마.”
도훈이 바라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애초에 어떤 기대감을 갖기에는 서로를 불신하며 살아온 세월이 깊었으니까.
그때 도훈의 전화가 주머니에서 진동했다. 도훈이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하니 영철이었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급한 전화라서요.”
“받아봐.”
일준이 허락한다는 뜻으로 고갯짓을 하자, 도훈이 이내 전화를 받았다.
“네, 실장님. 네?”
도훈의 목소리가 커지자 일준의 표정에도 긴장이 어렸다.
조금 전 들은 일이 충격이었던 만큼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날까 두려웠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죠.”
도훈이 전화를 끊고 자리를 정돈했다.
“무슨 일이야?”
“여 대표가 깨어났답니다.”
“뭐?”
“정확한 건 직접 가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래, 얼른 가봐.”
도훈은 일준에게 묵례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일식집에서 나온 도훈은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은표의 병실에 도착하니 영철과 담당 주치의가 대기 중이었다.
“깨어나셨다뇨? 그게 사실입니까?”
“30분 전쯤 눈을 뜨신 것을 간호사가 확인했습니다. 이후 확인해보니 동공반사 반응도 보이고 통증에도 반응하네요. 다만 이것만으로는 의식이 완전히 돌아왔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앞으로 회복에 대한 기대를 조금 더 해봐도 될까요?”
“그렇죠. 케이스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이 정도면 곧 의식을 찾을 가능성도 크다고 봐야죠.”
도훈은 은표가 깨어날 가능성이 있다니 좋으면서도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 사실을 또 누가 압니까?”
“아직까지는 아까 직접 본 간호사와 저, 단둘입니다.”
“당분간만이라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전담하는 분을 따로 붙여주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사모님께는 어떻게 할까요?”
도훈이 잠시 멈칫했다. 당연히 은표의 상태에 회복의 기미가 보인다고 하면 은하가 정말 기뻐하겠지만, 아직 확실치 않은 데다 찬우와 세훈의 일도 해결하지 못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제 입으로 직접 은하에게 알릴 시간도 필요했다.
“아직 의식이 다 돌아온 것도 아니니까 아내에게도 알리진 말아주세요.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할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주치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훈은 복잡한 심경으로 잠자듯 평온하게 누워 있는 은표를 내려다보았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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