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본가에 가니 하리가 먼저 나와 은하를 맞았다.
“어머님은 아침부터 왜 또 형님을 부르신대요?”
하리는 마치 제가 불려온 듯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선주를 흉봤다.
“그러게요. 아마 어제 심부름을 제대로 못 해서 부르신 게 아닐까 싶은데…… 만나 봬야 알 것 같아요.”
“심부름이요?”
“네, 어제 어머니 심부름으로 서영 씨를 만나러 갔었거든요.”
궁금해 마지않는 하리에게 은하가 대충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하리는 푼수 같고 단순하긴 하지만, 이 집에서 유일하게 은하를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또한 자신에게 늘 진심으로 대하는 걸 알아서 은하도 하리에게 마음이 많이 열린 상태였다.
“세상에나. 별일은 없었어요? 그 여자 보통이 아니던데.”
하리는 걱정이 된다는 듯 은하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별일이야 있었지만, 결국 도훈과 좋게 풀어냈기에 은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로 했다.
“네. 별일 없었어요.”
“그럼 다행이고요. 형님, 어머니 농간에 절대 놀아나지 마세요. 알았죠?”
“네. 걱정 말아요.”
은하가 하리를 안심시키며 집 안으로 들어설 때였다.
“그나저나 형님, 이 스카프는 어디서 나셨어요?”
하리가 아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 이거…….”
오늘 아침 은하는 도훈이 미국에서 사온 스카프를 급하게 목에 둘렀다. 샤워를 하다 보니 도훈이 밤새 만들어놓은 빨간 자국이 온몸에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속사정을 알게 될까 민망한 은하는 서둘러 대답했다.
“도훈 씨가 미국에서 이번 출장 선물로 사왔더라고요.”
“어머. 내가 그럴 줄 알았어요.”
“네?”
은하가 하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박였다.
“모르셨어요? 이거 엄청 유명한 명품인데.”
“아…… 몰랐어요.”
“형님, 이렇게 아무것도 몰라서 어떻게 해요. 그럼 아주버님께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했겠네요?”
“……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어제 정신이 없어서 스카프 얘기는 하지도 못했다.
“이거 이번 시즌 한정판이라서 면세점에서도 안 파는 거라, 특별히 구해오신 게 분명해요. 그리고 이런 거 사줄 때 엄청 좋아해야 남자가 나중에 또 사준단 말이에요.”
하리는 답답하다는 듯 은하에게 남자와 밀당하는 노하우를 전수했다.
은하는 다른 걸 떠나 도훈이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신경 써 준 걸 왜 빨리 못 알아차린 건지, 그게 가장 아쉬웠다.
“안 들어오고 거기서 뭐 해?”
그때 선주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와 박혔다. 초인종 소리는 났는데 찾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직접 나와 본 듯했다.
“지금 들어가요, 어머님.”
하리가 조용히 눈짓을 하고는 바로 2층으로 올라갔고, 은하는 선주가 앉아 있는 거실로 향했다.
선주는 뾰족한 시선으로 은하를 보았다. 선주도 은하가 두른 명품 스카프를 잘 알고 있었다.
미국에서 일정을 당겨 귀국하느라 도훈이 무척 바빴다고 들었는데, 그 와중에 저걸 사다 준 걸 보면 대단한 정성이었다.
한 여자에게 지극정성인 걸 보니 꼴에 지아비는 안 닮은 건가?
그래봤자 그 피가 어디를 갈까.
선주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선주는 사실 어제 서영이 도훈을 유혹한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기로 서영과 따로 얘기를 했으니까.
일단 도훈을 이혼시키는 게 목적이었고, 도훈을 갖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서영이 직접 그런 스캔들도 내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선주의 심부름이 있다는 건 애초에 핑계였다.
그런데 어제 저녁 이후로 서영과 연락이 안 됐다.
도훈을 호텔까지 유혹해보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서영은 전화기를 꺼놓고 잠적 중이었다.
설마, 너무 좋은 시간을 보내느라 연락하는 것도 잊은 건가?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집에 있는 와이프보다야 새로운 여자가 더 자극적인 법이니까.
하지만 마냥 서영의 전화만 기다릴 순 없는 노릇. 할 수 없이 아침부터 은하를 불러들인 것이다.
그럼 간접적으로나마 상황도 파악하고 은하를 떠볼 수도 있을 테니까.
“어제 서영이한테 갔던 걸로 알고 있는데, 왜 가타부타 아무 말이 없어? 꼭 내가 전화해서 이렇게 불러들여야겠니?”
“죄송합니다……. 어제 일이 좀 있어서 서영 씨에게 어머니 물건을 받지 못했습니다.”
“일? 무슨 일?”
은하가 어제 심부름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사과하자, 선주는 갤러리에서 있었던 일이 더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왜 말을 못 해?”
“그건…… 개인적인 사생활이라서요.”
은하가 난처함에 말을 아꼈다. 서영의 도발로 일어난 작은 해프닝이니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뭐? 사생활? 허……!’
선주가 속으로 어이없어하며 은하를 노려보았다. 방금 자신을 며느리 사생활이나 궁금해하는 파렴치한 시어머니로 만든 건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 파악이 먼저니까 선주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고 먼저 말을 꺼냈다.
“설마, 서영이랑 도훈이 사이에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네?”
“아니 딱 봐도 그렇잖아. 어제 도훈이도 갤러리에 갔다던데. 네 사생활이라고 하면 그 일밖에 더 있겠어? 서영이 같은 여자면 도훈이도 당연히 흔들릴 거고. 워낙 두 사람이 어렸을 때부터 애틋해서…….”
“어머니.”
은하가 조용하게 선주의 말을 잘랐다. 나긋한 말투였지만 제법 강단이 느껴졌다.
선주는 제 말이 잘렸다는 것보다도, 은하의 여유 있는 태도에 더 놀랐다. 계획대로 되었다면 은하가 방금 전에 한 말을 듣고 놀라고 흔들려야 정상인데, 은하는 미동이 없었다.
‘뭐지? 왜 아무렇지 않은 거지?’
아니나 다를까 은하는 여유 있게 미소까지 보이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생각하시는 그런 일 없었어요. 그러니까 안심하세요.”
“……뭐?”
“왜 그런 식으로 오해하시는지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도훈 씨 그런 사람 아니에요. 도훈 씨는 지금까지 절 만나면서 한 번도 다른 여자 만난 적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눈길 준 적도 없거든요.”
사실이었다. 다시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는 한 번도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준 적도, 여지를 준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은하 역시 마음 한편으로는 그를 의심했다.
시아버지 일준의 여성 편력을 들먹이며 도훈도 똑같을 거라는 선주의 말에 저도 모르게 흔들렸던 것이다.
집안 내력이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그런 것도 아닌데, 선주의 이 말도 안 되는 모함을 자신도 믿어버렸으니.
은하는 도훈에게 미안해서 면목이 없었다.
한편 선주는 다부진 은하의 말에 당황하여 그녀를 쳐다보였다.
설마 어제 도훈과 서영 사이에 아무 일이 없었다는 건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서 답답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네가 그렇게 순진하니까 더 당하기 쉬운 거야. 지금이야 신혼이니까 잘해주지, 좀 지나 봐. 제 아버지 꼴이 안 난다는 보장이…….”
“전 도훈 씨는 다를 거라고 믿어요. 핏줄이 같다고 다 같은 사람은 아니니까요.”
“뭐?”
“어쨌든 어제 어머님 심부름을 제대로 못 한 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런 심부름은 안 시키셨으면 좋겠습니다. 많이 곤란했거든요…….”
은하는 공손하고 차분하게 이야기했지만, 듣는 선주는 기함하며 할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은하는 이전과 다르게 당당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러면 스캔들을 만들어 그녀를 흔들려던 계획도 어려워지는 건 아닐까. 선주는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
낡은 다세대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좁은 골목길.
그곳에 검은 세단 한 대가 서 있었다. 차 옆에는 운전기사로 보이는 한 남자가 주변을 살피며 보초를 서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차 안에는 세훈과 찬우가 앉아 있었다.
“왜 빨리 처리 안 합니까?”
세훈은 화가 난 걸 누르느라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도훈이 하늘식품을 들먹이며 왔다 간 일만 떠올리면 분노가 치솟았다.
이 일로 자신의 약점을 잡았다 생각하고 휘두르려는 게 보였다.
하지만 세훈은 절대 그렇게 호락호락 당할 생각이 없었다.
“제가 최도훈한테 그런 협박이나 들어야겠어요?”
“죄송합니다. 저도 바로 처리하려고 했는데, 가 보니까 무슨 일인지 VIP병동에 경호원이 쫙 깔렸지 뭡니까?”
“경호원이요?”
“네. 무슨 재벌가 회장님이 입원하신 것도 아니고……. 그래서 다른 방법을 모색하다 보니 좀 늦어졌습니다.”
“다른 방법이라뇨?”
“제가 못 들어가면,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을 찾으면 되니까요.”
찬우가 비죽거리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병실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 의료인을 매수하겠다는 건가?
뭐가 됐든 바보처럼 가만히 있는 건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사람 목숨이 원래 그렇게 질긴 건데, 섣불리 움직였다가 오히려 망치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말은 청산유수였다. 저런 말발로 사기를 치고 양아치 짓을 하며 살아온 거겠지.
하지만 찬우가 못 미더워도 지금으로서는 그를 한 번 더 믿는 게 최선이었다.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자니 위험부담이 더 컸다.
무엇보다 세훈은 제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진 않았다.
“장찬우 씨, 마지막 경고입니다. 이번에는 꼭 처리하세요.”
세훈의 차가운 말에 찬우는 번들거리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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