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그러니까 네 와이프 잘 챙기라고. 내가 나서지 않게.”
성우의 당당한 태도에 도훈의 얼굴은 다시 한번 일그러졌다.
은하는 두 사람의 팽팽한 긴장감에 몸둘 바를 몰라 하다가 얼른 성우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이렇게라도 성우를 빨리 보내야 할 것 같았다.
“저기…… 성우 오빠. 오늘 고마웠어요.”
“그래, 나는 그만 가볼게. 들어가, 은하야. 잘 자고.”
“네, 조심히 가세요.”
성우가 은하에게 잘 있으라는 손짓을 하고는 차에 올라타 집 앞 도로를 빠져나갔다.
도훈은 은하와 성우의 다정한 모습을 보자 또다시 속이 뒤틀렸다.
서영과 담판을 짓고 바로 집으로 온 도훈은 아직 은하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황당했다.
자신보다 한참 일찍 출발했으니 당연히 집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도훈은 곧장 은하와 성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은하의 전화기는 꺼져 있고, 성우의 전화기는 신호음은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때부터 도훈의 눈이 뒤집혔다.
성우가 은하를 좋아하는 걸 알아서일까.
두 사람이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도훈의 기분은 몹시 불쾌했다.
이렇게 질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어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도 각오하지 않고 그동안 잘난 척을 했나 싶었다.
갤러리에서 헤어질 때 서영이 했던 마지막 말 때문에 더 신경이 쓰였다.
서영에게 다시는 은하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를 하고 돌아서던 순간.
자존심이 상한 서영이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오빠가 그 여자에게 진심인 건 알겠는데, 과연 은하 씨도 그럴까?’
‘그게 무슨 소리야?’
‘여자들 한 번 마음 돌아서면 뒤도 안 보는 거 알지? 은하 씨, 우리 키스하는 거 다 봤거든.’
‘뭐?’
‘은하 씨가 오빠에게 실망하고 불신하게 되면, 오빠가 아무리 이 결혼 지키려고 해도 소용없을 거라고!’
도훈은 충격으로 멍해져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영의 그 말도 안 되는 짓을 은하가 보다니.
은하가 얼마나 실망했을까.
혹시라도 오해를 하는 건 아니겠지?
이대로 오해한 채로 놔두는 편이 은하가 마음을 정리하기에는 더 좋다는 걸 알면서도, 도훈은 참을 수가 없었다.
만약 은하가 이대로 실망해서 자신의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 은하가 성우의 차를 타고 갔으니, 도훈으로서는 당연히 초조하고 애가 탔다.
그들이 나타날 때까지 별별 생각을 다 하느라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이렇게 그녀의 감정이 변할까 전전긍긍할 거면서 센 척한 자신이 우스울 정도였다.
“어머니와 서영이 일은 내가 사과하지.”
집에 들어오자마자 도훈은 사과부터 했다. 어쨌거나 자신의 잘못이었다.
선주와 서영이 은하에게 함부로 하는 동안 자신은 힘이 돼주기는커녕 그녀를 피하기만 했으니까.
옷을 갈아입으러 드레스룸으로 들어가려던 은하가 멈칫했다.
“갤러리에서의 일도.”
“…….”
“잘 알지도 못하고 당신을 몰아붙였어.”
“……괜찮아요.”
은하가 마음을 가다듬고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굳이 그에게 사과를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도훈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오해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은하가 지금도 도훈을 쳐다보지 못하겠는 건 그와 서영의 키스 때문이지 자신을 오해한 일 때문은 아니니까.
“다시 나가셔야 되는 거면, 속옷 챙겨드릴게요.”
도훈이 집에 들른 이유가 그거라고 생각한 은하가 다시 드레스룸으로 향할 때였다.
갑자기 그녀의 몸이 원을 그리며 당겨지더니 도훈의 품에 감겨 들어갔다.
도훈이 그녀의 팔을 잡아 제 가슴 쪽으로 당겨 안은 것이다.
“도훈 씨……!”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란 은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날 보고 말해. 내 눈 피하지 말고.”
“…….”
“정말 괜찮나?”
도훈의 깊은 눈동자가 은하를 빤히 응시했다.
은하는 당혹스러웠다.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묻는 이유를 모르겠어서였다.
안 괜찮다고 하면, 그러면 또 선을 넘는다고 할 게 아니던가.
제멋대로인 도훈의 행동에 화가 나야 정상인데, 이 와중에도 심장이 뛰는 자신이 싫었다.
이렇게 안겨서는 제대로 된 대화도 불가능했다.
“우선…… 이거 놓고 얘기해요.”
은하는 도훈의 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바르작거렸으나 도훈은 더 세게 당겨 안을 뿐, 놔주질 않았다.
“내 눈 똑바로 보고.”
“도훈 씨…….”
“다시 말해.”
“…….”
“정말 괜찮은지.”
도훈이 다시 한번 은하의 눈동자를 좇았다. 은하도 이제는 한계였다.
“괜찮지 않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제가 그런 감정 가지는 거…… 싫어하셨잖아요.”
은하가 정곡을 찔렀다.
도훈의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그녀에게 사사로운 감정을 싣지 말라고 한 건 그였으니까.
일부러 무심하게 굴고, 그녀의 마음을 알면서도 무시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해도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은하에게 더 고통스러운 순간을 안겨주느니, 나만 힘들면 된다고.
그런데 더는 못 견딜 것 같았다. 만약 이대로 은하가 떠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차라리 나중에 원망을 듣더라도 지금은…… 그냥 은하를 마음껏 사랑하고 싶었다.
“저는 도훈 씨가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제가 괜찮은지 아닌지가 왜 중요한지……. 그건 도훈 씨와 상관없는 일인데…….”
“상관있어.”
은하는 당황했다. 설마 도훈은 그녀의 마음까지 모두 조종하고 싶은 걸까.
아예 그에 대한 미련조차 못 가지게?
사람이 기계도 아니고, 좋아하는 감정을 그렇게 무 자르듯 자를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다 말해. 오늘 당신이 느낀 감정, 지금 나를 보는 기분. 뭐든 다.”
“그래요, 솔직하게 말할게요. 하나도 안 괜찮고, 비참해요. 이제 만족하나요?”
은하는 꾹꾹 눌러 참았던 감정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서영 씨 말만 믿고 갤러리에 가지 말걸. 아니, 처음부터 전화도 받지 말걸. 그 생각을 수도 없이 했어요. 그랬으면 그곳에서 도훈 씨를 볼 일도 없었을 거고…… 그랬으면…….”
“…….”
“적어도 이런 기분은 느끼지 않았을 텐데…….”
은하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그의 눈동자를 외면했다.
차마 제 입으로 더 이상의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도훈이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한 손으로 은하를 바짝 당겨 안더니 다른 쪽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들어 제 얼굴과 마주했다.
“더 말해. 하고 싶은 말, 더 있잖아.”
“정말 왜 이래요? 나를 얼마나 더 비참하게 만들려고……!”
은하가 애원하듯 도훈을 보았지만 도훈의 표정은 냉혹하기만 했다.
얼른 할 말을 다 하라는 뜻이었다.
은하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도훈의 집요한 요구에 결국 은하도 피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요. 적어도 당신이 다른 여자와…… 키스하는 건 보지 않았을 테죠.”
“…….”
집요한 도훈 때문에 지금 그녀가 불편함을 느껴도 어쩔 수 없었다. 은하의 진심을 알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역시나, 그녀가 키스하는 걸 봤다는 걸 확인했으니 오해부터 풀어야 했다.
모두 서영이 꾸민 일이지만, 은하는 전혀 모를 테니까.
“그리고 도훈 씨가 밖에서 내 얘기 하는 것을 그토록 싫어하는 것도 몰랐을 테고…….”
“그건…….”
은하 이야기를 대화 주제로 꺼내기 거부한 건 도훈에게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은하가 너무 좋아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니까.
어떻게 해야 이 절절하고 애끓는 감정을 가라앉힐 수 있을지 몰라서.
하지만 이제 더는 감정을 숨길 자신이 없으니 도훈도 어쩔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나중에 은하에게 원망을 듣는다 해도 그것도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도훈이 마침내 제 감정을 고백하며 모든 일을 해명하고자 하는데, 은하가 먼저 말했다.
“제가 더 화가 나는 건…… 그래도 난 당신이 좋다는 거예요. 너무 좋아서 지금도 가슴이 쿵쿵 뛸 정도로.”
도훈의 가슴이 뻐근해져 왔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안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이 와중에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이토록 사랑스러운 여자라니…….
“하아, 여은하. 당신은 정말…….”
늘 그렇듯 은하는 오늘도 제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도훈 씨가 일부러 그랬든 실수로 그랬든, 어떻게든 상관 안 하려고 했어요. 도훈 씨 말대로 우리는 계약관계일 뿐이니까. 내가 간섭할 순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내 기분까지 도훈 씨가 좌지우지할 순 없어요. 저도 사람이잖아요. 당연히 기분 나쁘고 불쾌하고 화가 나요.”
말하고 나니 감정을 표현한 게 부끄러웠는지 은하가 얼굴을 붉혔다.
도훈은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게 바라보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약하네.”
“네?”
“난 당신이 다른 사람과 키스하는 걸 보면 상대가 누구든 죽이고 싶을 것 같은데.”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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