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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도 없이 결혼-53화 (53/72)

53화.

은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를 일부러 피한 걸 알면 얼마나 서운할까.

“힘들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내 말 잊었어?”

“……기억해요.”

“아무 연락이 없기에 그래도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더니…….”

성우가 말끝을 흐렸다.

은하를 위해서라도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속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해요…….”

은하가 지금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하필 오늘 성우와 마주치는 바람에 치부를 다 드러낸 기분이었다.

이렇게 도훈을 좋아하게 될 줄 몰랐고, 도훈이 자신을 이렇게 힘들게 할 줄도 몰랐다.

그래도 지금 와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어서 감정을 눌렀다.

그럼에도 저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하게 붉어졌다.

“오빠에게는 정말…… 미안해요.”

은표가 쓰러지고, 은하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사람은 성우였다.

그런 성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한 결혼.

거기에다 결혼하고 나서도 저만 생각하느라 그의 연락은 일부러 피하기까지 했다.

은하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는 성우의 가슴도 미어졌다.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그녀를 다그친 게 아니었다.

착잡하고 서운한 마음, 그리고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까지 고개를 들어 결국 성우는 벼르던 말을 꺼냈다.

“이 결혼…… 그만하면 안 되니?”

“……네?”

“너 힘든 거 더 이상은 못 보겠어.”

“오빠…….”

“시집살이하는 것도 그렇고, 도훈이 녀석에게 상처받는 것도 그렇고……. 그동안 네 생각 존중해준답시고 모른 척했지만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아서 얘기하는 거야. 그냥 이 결혼 그만해, 은하야.”

은하의 눈동자에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계약 결혼이었고, 만약 은하가 이 결혼을 포기한다면 도훈의 후계자 싸움이나 평판에 치명적일 테니까.

하지만 성우는 이제 도훈은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 그에게는 은하가 더 소중했다.

“네가 이 결혼으로 얼마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나도 그 정도는 줄 수 있어.”

“무슨 소리…….”

“네 사정을 좀 더 정확히 알았다면 내가 먼저 너에게 결혼하자고 했을 거야.”

진심이었다. 왜 일찍 은하의 상황을 헤아리지 못했을까.

그 생각이 늘 자신을 괴롭혔다.

언제가 됐든 이혼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은하가 도훈 때문에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는 걸 보니, 더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요……. 오빠는 사랑하는 사람과…….”

“그게 너니까.”

“네?”

“물론 나도 그동안은 몰랐어. 그런데 네가 도훈이와 결혼한다는 사실을 듣고 나서 깨달았어.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

은하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성우를 쳐다보았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라서 더 놀랐다.

“나도 네가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다 해줄 수 있어. 그러니까 이혼하고 나에게 와. 난 널 이렇게 상처 주지 않을 거니까. 혼자 두지도 않을 거고.”

성우가 은하와 눈을 맞추며 다짐했다.

은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앉아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저는…….”

“나는 네가 힘든 게 싫어.”

은하가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성우가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얼마나 안타까워 보였으면…… 오빠가 이런 얘기를 할까.’

은하는 잠시였지만 표정관리를 하지 못한 제 행동을 반성하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성우의 마음부터 달랬다.

그가 왜 이런 제의를 하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으니까.

“고마워요, 나를 이렇게 많이 생각해줘서.”

알고야 있었지만 성우가 대신 결혼하자고 할 정도로 자신을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은하가 고마워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전 이 결혼, 후회 안 해요.”

“은하야.”

“도훈 씨랑 얘기가 된 기간이 될 때까지는 이혼도 안 할 거고요. 결혼도 제가 먼저 하자고 했는데…… 이제 와 도훈 씨를 힘들게 할 순 없어요.”

“너는? 너는 힘들어도 괜찮고?”

성우는 안타까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도훈을 생각하는 은하가.

“제가 힘든 건…… 도훈 씨 탓이 아니라 제 마음 때문이에요.”

“…….”

“제가 도훈 씨를 좋아하거든요.”

성우가 입을 다물었다. 예상을 했던 일이었지만 은하에게 직접 들으니 성우도 꽤 충격이었다.

“그래서 저는 이 결혼을 깰 수가 없어요.”

“왜 그럴 수가 없어. 그러니까 오히려 더 깨야지. 너만 상처받잖아. 차라리 아무 감정이 없으면 모를까.”

어느새 마음을 다잡은 성우가 은하를 설득했다.

은하가 도훈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더 이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녀 혼자만 힘들 테니까.

“힘들긴 하겠지만, 도훈 씨가 힘든 거 보단 나아요…….”

말하고 나니, 도훈을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이 이 정도였나 싶었다.

하지만 이것이 은하의 진심이었다.

물론 지금은 도훈이 밉고 야속하지만, 그래도 그가 힘들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힘든 게 나았다.

그런 은하를 보면서 성우가 자조적으로 내뱉었다.

“너는, 정말 내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하는 구나.”

성우의 말에 은하는 뜨끔하여 쳐다보았다.

“네가 힘들면 나까지 힘들다고 하는데도, 그건 안중에도 없는 걸 보니.”

“그게 아니라…….”

“변명하지 않아도 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아닌 건, 네 탓은 아니니까.”

모든 것은 성우 자신 탓이었다.

바보처럼 제 마음도 못 알아차리고 은하의 처지도 알지 못했으니까.

이제 와 왜 나를 좋아하지 않냐고 투정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나 포기 안 해.”

“네?”

“사람 일은 모르니까……. 지금이야 네가 도훈이를 좋아해도, 나중에는 싫어질 수도 있잖아. 만약 그렇게 되면 그때는 나에게 와. 기다릴게.”

“오빠…….”

“기다리지 말라는 말은 하지 마. 내가 원해서 기다리는 거니까. 힘들 때 연락하라는 말도 여전히 유효하니까, 넌 언제든 오빠에게 와서 기대.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은하는 성우의 조건 없는 사랑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신을 이렇게나 위해 준다는 사실이 고마우면서도 그 마음을 받아주지 못해 미안했다.

조금만 더 일찍 성우의 마음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랬으면 상황이 지금과는 달라졌을까?

그러다 은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와 그런 가정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지금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은 도훈이었고, 도훈이 상처를 줘도 그녀는 여전히 그의 옆에 있고 싶을 뿐이었다.

“이제 그만 갈까? 아까부터 전화기에 불이 나는데.”

“네? 아…… 네.”

은하는 성우가 바쁘다는 줄 알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성우의 전화기에서 불이 나는 건 도훈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은하랑 심각한 얘기 중이라서 전화를 받지 않았는데, 한두 번 하다 그치겠다 싶었지만 약 30분째 계속해서 전화하고 있었다.

‘설마…… 도훈이도 은하를 좋아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만난 성우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고, 성우가 은하와 함께 있을 때 도훈이 유난히 더 싫어한다고 느낀 건 기분 탓은 아닌 듯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은하는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혼자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게 아닐까.

도훈 역시 은하를 좋아한다면, 은하가 행복해할 테니 분명 잘된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라도 은하가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바랐던 성우로서는 희망의 끈이 사라져버린 기분이었다.

***

성우가 은하를 집에 데려다준 건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집 앞에는 도훈이 은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 가능성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막상 도훈이 기다리는 걸 보니, 성우는 다시 한번 도훈의 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성우에게 전화를 수십 통 걸고, 집 안도 아니고 밖에서 기다리는 것만 봐도 은하에 대한 도훈의 마음이 꽤 깊다는 반증이니까.

“도훈이가 집에 먼저 온 모양이네.”

“네? 아…….”

그제야 은하도 도훈을 보았다.

그는 정말로 집 앞에서 차를 대놓고 은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분명히 오늘 못 들어온다고 했는데……. 잠깐 들른 걸까.’

성우 때문에 잠시 잊었던 갤러리에서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불편하고 속상한 감정이 또다시 솟아올랐지만 은하는 마음을 다스리려 애썼다.

성우의 차가 마침내 집 앞에 멈췄고, 은하와 성우가 함께 차에서 내렸다.

도훈이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몹시 피곤해 보이기도 하고, 화가 난 것도 같았다.

어쨌거나 도훈의 손을 뿌리치고 성우 차를 타고 왔으니 그가 화를 낼 법도 했다.

“어디 갔다 이제 오지? 전화기는 꺼놓고.”

“아…… 깜박했어요.”

그러고 보니 서영에게 시달려서 전화기도 꺼놓은 걸 이제 깨달았다.

“성우 너는 왜 또 전화를 안 받고?”

은하는 그제야 성우를 돌아보았다.

전화기에 불이 난다더니, 도훈이 전화를 한 거였으려나.

“나도 몰랐어. 그나저나 너는 서영이 일은 잘 해결했어?”

도훈의 황당한 얼굴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은 성우가 되물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

“그래, 어련하시겠어. 한 번 더 말하지만 은하 힘들게 하지 마. 더 이상 그런 거 못 보니까.”

“내 와이프야. 챙겨도 내가 챙기니까 넌 신경 꺼.”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주소|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역로3길 40-36 B동 710호 (신내동)

전화|02)906-7768 / 팩스|02)906-7769

값 100원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와이엠북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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