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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도 없이 결혼-52화 (52/72)

52화.

“역시 너는 내가 유부남이라는 건 안중에도 없군.”

“요즘 누가 그런 거 따져. 난 정말 괜찮아. 오빠만 내게 진심이면.”

결혼 후 일부러 애인도 두는 마당에, 도훈과 자신 사이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 없었다.

서영은 도훈만 가질 수 있다면 자존심도 뭐도 다 버릴 수 있었다.

“편하게 생각해, 오빠. 마음 가는 대로 나랑 은하 씨 둘 다 겪어보고 저울질하다가 더 마음에 드는 여자로 정착하면 되잖아.”

애송이 같은 은하보다야 다방면으로 경험이 많은 자신이 도훈을 더 만족시킬 자신이 있었다.

남자들이 환장한다는 성적인 부분은 특히나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자존심도 버려가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는데…… 도훈이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럼 그렇지.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인데 오빠도 남자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그 웃음의 의미를 서영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같이 미소를 지으며 화답하려는 순간, 도훈은 이미 차갑게 표정을 굳힌 뒤였다.

“나는 네 장난감이 아니야, 전서영.”

“……뭐?”

“네가 가지고 싶으면 가지고, 놀고 싶으면 노는 장난감이 아니라고.”

서영은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자존심 버려가며 매달리는데도 눈 하나 끔벅 안 하니 짜증이 솟아났다.

“오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언제 오빠를 장난감으로 봤다고.”

“네가 원하면 언제든 날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 또 네 멋대로 내 감정이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

서영은 자신의 생각을 꿰뚫어 보는 도훈의 지적에 뜨끔했지만, 그래도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어필하고 싶었다.

“오빠, 그건 오빠를 장난감으로 생각해서가 아니라 좋아해서…….”

“좋아한다는 말로 모든 게 용납되는 건 아니지 않나.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든 네 감정을 밀어붙이는 건, 사랑이 아니라 횡포야. 못 가진 것에 대한 집착과 미련이고.”

“뭐라고 해도 좋아. 횡포든 집착이든 미련이든 그것도 사랑의 일종이라고, 난 믿으니까.”

서영도 지지 않았다. 도훈이 어떻게 보든, 자신은 도훈을 사랑하는 게 맞다고 믿으니까.

그리고 어떻게든 이 사랑의 결실을 보고 싶으니까.

“그래, 그건 네 자유니까. 그런데 나는 쓰레기는 취급하지 않아서.”

“뭐?”

“분수도 모르고 나대는 것도 환멸하는 것 중에 하나고.”

서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평생 이런 모욕은 처음이었다.

“네 얼굴, 네 목소리 소름 끼치게 싫은데. 이 말은 해야겠어서.”

“오빠……!”

“한 번만 더 은하 건드려 봐. 그땐 이 정도로 넘어가지 않아. 은하를 건드리는 건 날 건드리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서영은 저절로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도훈에게서 이렇게 분노가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

성우는 운전을 하면서 옆자리에 앉은 은하를 힐끗 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보고 있었다.

차 안에 흐르는 침묵의 무게만큼 성우의 심경도 복잡했다.

상처받은 듯 처연한 은하의 표정이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나쁜 자식. 도대체 처신을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거야?’

성우도 처음에는 도훈과 서영의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에 놀랐다.

화가 나서 외면하는 남자와 마음 졸이며 쫓아가는 여자는…… 전형적인 사랑 다툼을 하는 연인처럼 보였으니까.

그래서 도훈에게 화가 많이 났다.

물론 서영이도 잘 했다는 건 아니다.

자신의 갤러리라는 공적인 자리에서 남자를 그렇게 다급하게 찾아다니다니. 그것도 유부남을.

소문이 이상하게 나도 몇 번씩 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서영이 오래전부터 도훈을 좋아하는 건 성우도 잘 알고 있었다.

늘 도훈만 졸졸 쫓아다녔으니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도훈이 워낙 여자에 철벽이라 서영은 대놓고 고백하진 못했다.

몇 번이나 기회를 노렸지만 늘 실패했다.

도훈이 다른 여자뿐 아니라 서영에게도 아예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서영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고, 도훈은 결혼을 했다.

도훈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서영의 실망감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가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 시간도 흘렀고, 도훈도 결혼을 했으니 그 마음을 접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좀 전에 만난 서영은 도훈에게 여전히 미련이 있어 보였다.

아니, 못 잡은 물고기에 대한 집착까지 보였다.

도훈이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곁을 준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그냥 친한 친구 사이면 상관없겠지만, 아까 같은 상황은 누가 봐도 평범한 친구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계약 결혼이라고 해도 아내가 있는 새신랑인데.

어리고 여린 은하가 감당하기에는 꽤 충격적이고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우는 뭔가 찝찝했다.

은하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며 황망해하는 표정이며.

‘설마…… 진심으로 도훈을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분명 계약결혼이었고, 돈이 필요해서 한 결혼이라고 알고 있는데.

도훈과 서영의 모습에 놀랄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은하가 이렇게까지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을 할 건 없지 않을까.

그녀가 이혼할 때만 기다리고 있던 성우의 마음이 불안해졌다.

같이 지내며 그사이 정이라도 든 걸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미안할 정도로 은하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았다.

도훈을 좋아해서든 아니든, 은하가 힘들어하는 것 자체가 보기 힘들었다.

힘들면 말을 하라니까.

성우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는 은하에게 서운했지만, 그렇다고 티를 낼 순 없었다.

“저녁은 먹었어?”

성우가 어색한 침묵을 뚫고 조금은 가볍게 말을 던졌다.

“네…….”

은하가 건성으로 대답하자 성우가 맞받아쳤다.

“안 먹었나 보네.”

“네?”

“나 속일 생각은 말아.”

은하는 당황해서 입술을 말아 물었다.

성우는 정말 속일 수가 없다는 생각에 할 수 없이 이실직고를 했다.

“입맛이 별로 없어서요. 낮에 많이 먹기도 했고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도훈이 외박을 한다는 말에 입맛이 싹 달아나고 말았으니까.

그리고 서영과 만나는 것도 꽤 긴장되는 일이어서 괜히 저녁을 먹었다가 소화가 안 될까 싶어 아예 거른 것이다.

지금도 배고픔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입 안이 쓰고 속이 쓰렸다.

마지막까지 뻔뻔하던 서영과 자신을 오해하고 몰아붙인 도훈 때문이었다.

특히 서영을 생각하면 기분이 불쾌하다 못해 비참했다.

얼마나 내가 만만했으면 그런 짓을 했을까 싶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떠오르는 둘의 키스 장면과 서영의 적반하장 태도에 은하는 애꿎은 입술만 짓씹었다.

“그럼, 뭐라도 먹고 들어가.”

성우는 차를 시내로 돌리며 말했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은하가 놀라서 그를 저지했다.

“저 배 안 고파요.”

“그래도 먹어. 어차피 오늘 도훈이도 안 들어온다며? 밤새 궁상 떨지 말고.”

은하의 사양에도 성우는 단호했다. 평소에는 늘 은하에게 맞춰주는 그였지만, 한 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꺾지 못한다는 걸 은하도 잘 알고 있었다.

“뭐 먹을래? 네가 좋아하는 떡볶이? 아니면 갈비탕? 그것도 아니면…….”

“그럼…… 죽으로 먹어요.”

결국 은하는 늦은 밤에 부담스럽지 않은 가장 만만한 메뉴를 골랐다.

비록 스트레스성이긴 했지만 어쨌든 얼마 전에도 복통으로 고생했던지라, 웬만해서는 위장에도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이 좋을 것 같았다.

죽이라는 메뉴를 들은 성우가 의아해하며 은하에게 되물었다.

“죽?”

“실은 며칠 전에…… 복통으로 병원에 갔다가 이것저것 검사하고, 오늘 퇴원했거든요.”

은하는 덤덤하게 이야기했는데 성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럼 도훈은 병원 신세를 지고 오늘 퇴원한 아내를 두고, 지금 서영과 그러고 있었단 얘기가 되는 거니까.

“몸이 안 좋으면 얘기를 하고 집에 있었어야지. 심부름은 왜 해?”

“몸은 입원하고 하루 만에 괜찮아졌는데…… 검사하느라 며칠 더 있었던 것뿐이에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는 은하의 변명이 성우는 더 듣기 싫었다.

갑자기 복통을 앓을 정도면 스트레스가 꽤 심했다는 얘기니까.

은하가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아 성우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 그럼. 죽으로 먹자.”

그는 시내의 유명한 프랜차이즈 죽집으로 은하를 데려갔다.

다행히 아주 늦은 시각은 아니라서 주문이 가능했다.

“해물죽 좋아하는 거 맞지?”

“네.”

은하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생각지 못했는데, 이런 것까지 자신의 취향을 다 꿰뚫고 있어서 나름 감동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여전히 입맛이 없고 배도 고프지 않았지만, 걱정하는 성우를 생각해서 은하는 맛있게 해물죽을 먹었다.

든든하게 배가 채워지니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잘 먹네. 사주는 보람 있게.”

“고마워요.”

은하는 새삼 성우가 고마웠다.

만약 자신의 고집대로 아까 바로 집에 갔다면 분명 후회했을 것 같았다.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도훈의 생각과 비참한 기분들. 자신의 처지 등이 떠올라 분명 우울했을 테니까.

“고마우면 혼자 괴로워하지 말고 얘기를 좀 하지.”

성우가 서운한 속내를 그제야 내비쳤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주소|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역로3길 40-36 B동 710호 (신내동)

전화|02)906-7768 / 팩스|02)906-7769

값 100원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와이엠북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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