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서영은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는 듯했다.
“두 분이서 하실 말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는 먼저 가볼게요.”
은하는 지금 기분으로서는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고, 더 이상 둘 사이에 껴 있고 싶지 않았다.
도훈이 오해를 하든, 서영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성우가 오지 않는다면 혼자 걸어서라도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래, 은하는 내가 데리고 갈게.”
다행히 마침 성우가 나타나 은하의 말을 거들었다.
고마운 마음이 드는 은하와 달리, 도훈의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아니, 내가 데려다주지. 차에 타. 집에 가면서 얘기해.”
“아뇨, 성우 오빠 차 타고 갈게요.”
“뭐?”
도훈이 황당해하며 은하를 보았다.
성우는 짐작했던 바라 착잡한 심정이었지만, 서영은 이 상황을 의외라 생각하면서도 반가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도훈 씨, 바쁘시잖아요.”
“여은하!”
“서영 씨와 이야기도…… 마저 하셔야 하고.”
“뭔가 오해를 하나 본데.”
“오해 안 해요.”
“…….”
“그냥, 저는 다른 일로 왔지만, 도훈 씨는 서영 씨를 만나러 왔으니 각자 볼일을 보고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해요. 괜히 저 때문에 바쁜 시간 뺄 필요 없어요.”
도훈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말투가 너무 차갑고 냉랭했다.
“성우 오빠, 그만 가요.”
“그래.”
성우가 얼른 차 문을 열어 은하를 차에 태웠다.
도훈이 그녀의 팔을 잡으러 손을 뻗었지만 성우가 저지했다.
“진성우……!”
도훈이 화를 삭이며 성우를 불렀다.
오늘따라 제 속을 태우는 은하의 고집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성우의 행동도 선을 넘었다 생각했다.
어쨌거나 은하와 자신은 부부 사이가 아니던가.
성우가 나서서 간섭할 일은 아니란 뜻이었다.
그런데 성우는 오히려 당당했다. 아니, 오히려 도훈보다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최도훈, 너는 서영이부터 해결해.”
“해결하고 말고 할 게 없는데.”
사실이었다. 물론 갤러리에서 둘만 있을 때 서영이 제멋대로 행동해서 충분히 따끔하게 화를 내고 돌아선 길이었지만, 그게 끝이었다.
더는 서영과 말 섞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런데 성우는 도훈을 비난하듯 덧붙였다.
“은하가 오늘 이곳에 온 건 서영이랑 네 어머니 때문이니까.”
“뭐?”
“그러니까 다시는 은하 건드리지 않도록 네가 해결해.”
“정말이야, 전서영?”
성우가 은하와 함께 주차장을 빠져나간 뒤, 도훈이 서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하니 굳어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그였다.
그래서 성우가 은하를 데리고 나가는데도 잡지 못했다.
아니, 잡을 면목이 없었다.
은하가 왜 성우의 차를 타고 가겠다고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렸는지 알 것 같았으니까.
서영은 당황해서 머뭇거리다가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심부름이었어. 갤러리에 오면 연락 달라고 하긴 했는데, 오빠와 만난 게 더 중요했으니까……. 오빠 일 해결하고 나면, 그다음에 은하 씨와 만날 생각이었다고!”
“……그렇군.”
도훈은 헛웃음이 다 나왔다.
그런 건 줄도 모르고 은하를 오해했다.
얼마나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을까.
여자라고는 전혀 관심도 없던 천하의 최도훈이 질투로 눈이 뒤집혀 버린 순간이었다.
그만큼 자신이 은하를 좋아하는 것이었고, 다른 남자 누구라도 은하 옆에 있는 게 치가 떨리게 싫다는 방증이었다.
“오빠, 오해하지 마. 심부름도 어머니가 시킨 거고, 은하 씨가 스스로 오겠다고 한 거야. 내가 오라고 한 게 아니야.”
서영은 상황을 은근히 어머니와 은하 탓으로 돌렸다.
일단은 도훈의 화를 누그러뜨리는 게 우선이었다.
하지만 도훈은 서영의 말에 더 기가 찼다.
지금 상황에서는 누가 먼저 오라고 했냐는 둥, 그런 것이 중요한 건 아닐 텐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정말 구제불능이군.”
“오빠……?”
도훈의 분노 섞인 말에 서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은하가 이곳에 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에게 말해주기는커녕, 그런 쓰레기 짓을 하다니.”
“쓰레기 짓이라니!”
서영이 황당해하며 도훈을 보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잘못도 있었으니 납작 엎드린 서영이었지만, 자신의 키스를 ‘쓰레기’라고 표현하는 발언에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내가 오빠를 얼마나 좋아했으면 그랬겠어? 이런 내 마음은 보이지도 않는 거야?”
서영은 정말 억울하고 속상했다.
자신이 유학 간 사이, 도훈이 갑자기 결혼해 버린 것도 화가 나고 억울한데 자신의 마음마저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
“좋아해서 어쩔 수 없이 했어? 그래도 사리 분별은 해가면서 했어야지.”
“오빠……!”
“네가 한 그 짓, 나한테는 쓰레기 짓 맞아. 기분 더럽고, 엿 같고. 게다가 내 와이프가 여기 와 있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는 건, 그 짓뿐만 아니라 너도 쓰레기라는 얘기지.”
도훈은 아까 서영이 했던 변명을 되짚으며 그녀에게 고스란히 돌려줬다.
이렇게까지 안 하려고 했는데, 하는 짓이 가관이라 어쩔 수 없었다.
정말 화가 나는 짓거리였다. 공공장소에서, 그것도 유부남에게 대놓고 입을 맞추다니.
그런데도 양심에 걸려 하기는커녕, 좋아해서 그랬다는 변명을 하고 있었다.
도훈은 오늘 아침 한국에 온 바이어가 아니었다면, 그녀를 만나러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바이어는 서영과 친분이 있었고, 그녀의 그림을 사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다른 사람을 보내도 됐지만, 서영 역시 며칠 전부터 도훈에게 계속 연락해서 전시회에 들러달라 부탁했기에 겸사겸사 들른 것이었다.
그런데 서영이 자신에게 그런 추태를 부릴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은하가 오는 것을 알고서 그랬다는 건, 은하뿐 아니라 도훈까지 만만히 봤다고밖에는 말이 되질 않았다.
“그래, 나 쓰레기야. 유부남은 평생 유부남이야? 요즘은 이혼도 흔하고, 바람도 아무렇지 않게 다 피우는데. 쓰레기면 어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가질 수 있다면, 난 그런 얘기 들어도 아무 상관없어.”
서영은 자존심이 상해 파르르 떨면서도 결코 제 행동을 반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를 내는 도훈을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난 자신 있거든. 오빠를 나에게 넘어오게 만들 자신. 오빠도 나중에는 고마워할걸. 솔직히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여자보다는 내가 모든 면에서 훨씬 나을 테니까.”
서영이 자신에 찬 목소리로 제 감정을 내비쳤다.
서영은 지금껏 살면서 한 번도 원하는 것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남의 남자가 됐더라도, 뺏어서 기어이 제가 가져야 직성이 풀렸다.
도훈이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크게 동요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결혼이 대수인가? 언제든 이혼하고 새로 결혼할 수 있는 게 요즘이었다.
굳이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자신처럼 잘난 여자가 재취로 결혼을 해야 한다는 건데…… 상대가 도훈이라면 그것 역시 기꺼이 감당하리라 다짐했다.
도훈은 차갑고 무뚝뚝하긴 하지만, 그녀가 본 남자들 중에 최고로 섹시했으니까.
아까 은하가 쳐다보는 걸 알고 일부러 넘어졌을 때도 도훈의 팔에 안기는데 그 단단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한 손으로 자신을 잠시 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밤마다 안기면 어떤 생각이 들까.
솔직히 은하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키스를 한 것도 있지만, 정말로 키스가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있었다.
어차피 도훈을 유혹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망설일 것도 없었다.
그래서 조금 더 자극적으로 강하게 밀어붙인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뭐 하는 거야?’
생각보다 더 질색한 도훈은 서영을 떼어낸 뒤 입술부터 닦았다. 그러고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서영은 이미 맛본 그의 입술이 너무 달콤해서 멈출 수가 없었다.
다시 그에게 달려들어 무조건 입술부터 포갰다.
그때는 이미 은하도 충격을 받고 사라진 뒤였지만, 서영은 자신의 마음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자존심이 상한 것보다 설레는 게 먼저였다.
도훈이 던지는 경멸의 눈빛도 그 순간에는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자신도 이렇게까지 도훈을 원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그가 반발하니 더 갖고 싶었다.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 없는 남자에게 더 끌리는 심리처럼, 도훈이 무심할수록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게다가 다른 여자의 남자라는 것도 의외로 승부욕을 자극했다.
그래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가지겠다 결심했고, 서영은 그럴 자신이 있었다.
“난 오빠에게 알려주는 거야. 은하 씨 말고도, 나라는 또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걸. 지금 당장 이혼하고 나 만나달라 조르는 거 아니야. 오빠 위치가 있는데 이혼이 쉽지 않겠지. 천천히 알아가다가 우리의 감정이 깊어지면…… 다른 건 그때 생각해도 되니까.”
서영이 부드럽게 도훈의 팔을 쓸며 유혹했다. 그를 갖고 싶어 하는 제 진심이 전달되길 바라면서.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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