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갤러리의 구조는 내부에서도 계단이 있었지만, 테라스에서도 계단이 있어서 바로 1층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거기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든, 다시 계단을 이용하든 지하 주차장으로 이동하면 되는지라, 은하는 굳이 갤러리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됐다.
그걸 너무 다행으로 생각하며 그녀는 야외계단을 통해 바로 1층으로 향했다.
은하가 내려간 것을 확인한 성우는 곧바로 3층에 있는 사무실을 찾았다.
필요한 자료를 받아서 내부 계단을 통해 1층으로 향하려는 찰나, 전시장 안에서 막 복도로 나오는 도훈과 마주치고 말았다.
“최도훈?”
성우는 너무 놀랐지만 도훈은 크게 표정 변화 없이 잠깐 성우에게 눈길을 주고는 인사도 없이 바로 1층으로 내려갔다.
성우가 황당할 새도 없이, 곧바로 서영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방금 도훈이 나온 그곳에서 뛰쳐나왔다.
그러고는 지금 만난 성우에게 다짜고짜 도훈을 찾았다.
“오빠, 도훈 오빠 못 봤어? 방금 이리로 내려갔지? 그치?”
“너희 지금까지 둘이 같이 있었어? 아니, 근데 왜…….”
은하와 못 만났을까?
아니, 설마 둘만 같이 있는 걸 본 건가? 그래서 아까 은하의 얼굴이 그렇게 안 좋았나?
인사도 안 하고 가버린 도훈, 뒤따라 쫓아 나온 서영. 두 사람을 못 본 체하는 은하까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현재 상황을 이해하려는 듯 성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서영이 버럭 짜증을 냈다.
“지금 그게 중요해? 도훈 오빠 어디 갔냐고!”
결국 서영은 성우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계단으로 향했고, 남겨진 성우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볼 뿐이었다.
***
은하는 성우의 차 안에 들어가 앉은 뒤에야 긴장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어쨌거나 갤러리에서 무사히 나왔다는 안도감이 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곱씹어 봐도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할수록 나만 손해야.”
어차피 도훈에게 물어보지도 못할 거, 잊는 수밖에 없었다.
도훈을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대하지 못할까 봐 걱정일 뿐.
그런데 그 걱정도…… 오늘은 안 하고 싶었다.
너무 바보 같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복잡한 심정으로 성우를 기다리는데 가방에 들어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은하가 휴대폰을 꺼내 발신인을 확인했다.
서영이었다.
은하는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이제 와서, 왜……?”
나를 불러 기어이 도훈과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건가?
아니면 약속한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이제야 도훈과 헤어져서 날 만나려는 건가?
둘 다 기분 나쁘고 불쾌했다.
은하는 서영의 속내를 몰라 더 비참한 기분으로 그녀의 전화를 무시하며 휴대폰에서 시선을 뗐다.
하지만 그녀는 끈질겼다.
몇 번이나 계속되는 연락에도 받질 않자, 이번에는 메시지가 들어왔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읽지 않고 지워버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그녀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런데 그 메시지도 가관이었다.
[지금 도훈 오빠랑 같이 있어요? 그럼 당장 전화 받아요! 나 도훈 오빠에게 할 말이 있으니까.]
미친 걸까? 지금 이 태도는 뭐지?
황당한 마음으로 메시지를 몇 번이나 쳐다보았다.
전화를 건 목적이 은하가 아니라 도훈 때문인 것도 기가 막힌데, 도훈과 특별한 사이인 양 굴고 있었다.
은하가 도훈의 아내라는 건 아예 잊어버린 듯했다.
은하는 더는 이런 무례한 행동에 끌려다니고 싶지 않아 휴대폰을 끄고는 가방에 넣어버렸다.
똑똑.
그때 누군가 조수석 창문을 두드렸다.
은하가 놀라서 쳐다보니 도훈이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훈은 은하와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은하 역시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갤러리에서 그를 피하려고 차로 온 건데, 이곳에서 딱 마주칠 줄은 몰랐다.
은하는 할 수 없이 차에서 내려서 그의 앞에 섰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레 그의 입술로 시선이 향했다.
서영과 키스를 하던 모습이 덩달아 떠올랐지만, 은하는 고개를 흔들어 마음을 다잡고는 다시 도훈을 마주 보았다.
“당신이 여기 웬일이지?”
도훈이 기다렸다는 듯 은하를 다그쳤다.
은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얘기를 시작하면 그와 서영이 같이 있는 상황을 본 것도 말해야 할 텐데…….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이 차는…… 진성우 거군.”
도훈의 눈썹이 못마땅하다는 듯 한쪽만 치켜 올라갔다.
집에 있어야 할 은하가 이곳에 있는 것도, 하필이면 진성우 차에 타고 있는 것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제멋대로 구는 서영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운데, 이곳 주차장에서 떡하니 은하를 만나니 황당할 뿐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몸도 안 좋은 사람이 여기까지 온 이유. 그리고 진성우 차를 타고 있는 이유.”
도훈은 최대한 감정을 섞지 않고 차분하게 말하려고 했으나, 속으로는 짜증이 치솟고 있었다.
그녀가 성우랑 이곳에 온 이유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어서였다.
게다가 단둘이 만나지 말라고 당부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 저와의 약속도 저버리고 성우와 만났다는 사실이 도훈은 몹시 불쾌했다.
그동안 계속 이렇게 만난 걸까?
언제부터?
설마…… 자신이 선을 긋고 상처를 준 뒤부터?
좋아하는 감정을 정리하겠다더니, 성우에게 마음을 열기로 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질투가 올라오고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은하는 아무 말 없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었다.
도훈은 기분도 나쁘고 조바심도 일었다.
은하의 침묵이 마치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걸 증빙하는 것 같아서.
“내가 분명 오해를 살 행동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 같은데.”
그래서였을까.
도훈이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설마, 데이트라도 나온 건가?”
“……네?”
은하는 기가 막혀서 도훈을 보았다.
“아니면 왜 대답을 못 하지? 어떤 이유였는지, 내가 납득할 수 있게끔 설명해줬으면 좋겠는데.”
어쩌면 도훈은 그녀에게 확인받고 싶은지도 몰랐다.
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데이트가 아니라 어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온 거다, 그저 한 마디면 되는데 은하는 그 말도 주저했다.
도훈은 끈질기게 은하에게 눈을 맞추며 그녀의 생각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은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러는 도훈 씨는…… 왜 여기에 있죠?”
은하는 최대한 감정을 가라앉힌 채 말을 이었다.
“오늘 일이 있어서 집에도 못 들어오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건…….”
“저는 그만큼 바쁘다고 알아들었거든요.”
혹시나 또 오해를 살까 싶어 은하는 최대한 정중하게 묻고 제 생각을 덧붙였다.
처음에는 그냥 모른 척 사라져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도훈의 일방적인 오해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성우의 차에 탄 모습을 보고 오해할 수야 있겠지만, 그래도 본인이 한 행동이 있는데 이렇게 뻔뻔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데이트라니?
그러는 본인은 서영과 키스까지 하지 않았던가.
도훈이 자신에게 한 말들을 곱씹을수록 어이가 없었지만, 그런 것조차 티 내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에게 감정적으로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니까.
“무슨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내가 여기에 온 건…….”
“도훈 오빠!”
은하의 질문에 도훈도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고는 오해를 살 수 있겠다 싶어 변명을 덧붙이려는 찰나, 뒤에서 서영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들었다.
도훈은 난감해하며 얼굴을 찡그렸고 은하는 오히려 덤덤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은하 씨!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내가 그렇게 오빠 찾는 거 알면서.”
“이봐요, 서영 씨.”
다짜고짜 자신에게 짜증을 부리는 서영을 보고, 은하도 더는 못 참고 한 마디 내뱉으려 했다.
그런데 서영에게 은하는 안중에도 없었다. 서영은 등을 돌리더니 바로 도훈을 향해 말을 이었다.
“오빠, 여기서 은하 씨랑 있었던 거야? 내가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서영은 제 마음을 몰라줘서 야속하다는 듯,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처연한 표정으로 도훈에게 애원했다.
누가 보면 서영의 남자를 은하가 뺏은 것처럼 보일 판이었다.
“나에게도 말할 기회를 줘야지. 나 오빠에게 할 말이 많단 말이야.”
“방금, 무슨 말이야? 은하더러 너무하다니?”
하지만 도훈은 서영의 애원보다 은하에게 한 말이 더 귀에 거슬렸다.
도훈의 지적에 서영은 놀라서 멈칫했다. 아차 싶었던 것이다.
아까는 너무 흥분해서 급한 대로 말이 먼저 나와버렸다.
도훈이 불쾌해하는 것 같으니 수습부터 해야 했다.
“아, 그게…… 내가 은하 씨에게 오빠랑 같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전화했거든. 같이 있으면 바꿔 달라고 하려고. 그런데 내 전화, 문자 다 씹더니 이렇게 오빠랑 같이 있는 거 보니깐…… 화가 나서 말이 좀 심했나봐. 은하 씨 미안해요.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요.”
서영은 언제 짜증을 부렸냐는 듯 은하에게 미소를 지으며 사과를 했다.
은하는 그게 더 기분 나빴다. 딱 봐도 도훈에게 잘 보이기 위해 빈말이나 하며 은하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어떻게 은하가 여기 와 있는지 알았냐고?”
하지만 도훈도 만만치 않게 그녀를 물고 늘어졌다. 그제야 서영의 표정이 굳어갔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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