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은하는 놀라서 방금 한 결심이 무색하게 그들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서영이 넘어지려는 것을 도훈이 잡은 것인지, 서영은 도훈의 단단한 팔에 매달려 있었다.
“조심해야지.”
도훈은 서영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내뱉었다.
“고마워, 오빠.”
힘을 크게 준 것 같지도 않은데, 서영은 도훈의 가슴으로 바로 달라붙으며 수줍게 얘기했다.
은하는 가슴이 철렁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가 넘어질 뻔하는데 안 잡아주는 남자가 이상한 거니까.
그래도 더 보고 있기에는 어쩐지 마음이 아파서 얼른 자리를 피하고자 다시 시선을 돌리는데, 이어진 서영의 갑작스런 행동은 은하를 얼음으로 만들고 말았다.
단단한 팔에 안겨 미소를 짓던 서영이 그대로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자신의 입술을 도훈의 입술에 갖다 대는 게 아닌가.
멍하니 있던 은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에서 나와버렸다.
다가갈 때는 조심스러웠는데, 나올 때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갤러리 안쪽에서 어떻게 걸어 나왔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손발이 다 덜덜 떨렸다.
3층 복도를 지나 테라스까지 나오고 나서야 은하는 숨을 쉴 수 있었다.
도대체 내가 뭘 본 걸까.
서영이 도훈에게 미련이 남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대놓고 유부남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
은하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뇌 회로가 정지된 느낌이었다.
도훈과의 관계에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만 소용돌이치는 제 마음을 은하도 이 순간에는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누군가 은하의 어깨를 잡았다.
은하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휙 돌렸다.
누구도 그 순간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돌아보고 나니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성우 오빠…….”
이곳에서 성우를 만날 줄이야.
“왜 이렇게 놀라? 무슨 일 있어?”
눈썰미 좋은 성우답게 그는 한눈에 은하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은하는 얼른 고개를 저어 상황을 수습했다.
“아뇨, 일은요. 잠시 딴생각을 해서 그런 것 같아요.”
성우는 여전히 의구심을 가진 채였지만, 더 묻지 않았다.
“놀란 건, 이제 좀 괜찮아?”
“네…….”
성우의 배려에 은하는 심호흡을 하며 덜컹거렸던 마음부터 가라앉힌 뒤 성우에게 물었다.
“근데 오빠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여기서 오빠를 만날 거라곤 생각하지 못해서 더 놀란 것 같아요.”
“전서영 화가, 내 후배야.”
“아…….”
은하는 그제야 깨달았다. 성우와 도훈이 친구니까 당연히 서영과도 친분이 있을 수 있는 것을.
어쨌거나 지금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이 서영과 도훈이 아닌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넌 어떻게 온 거야? 도훈이한테 벌써 서영이 소개받은 거야?”
“아뇨, 그건 아니고…….”
은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솔직히 얘기했다.
“본가에서 서영 씨와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요. 어머님께 인사하러 들렀다고 하더라고요. 오늘도 어머님 심부름으로 찾아온 거고요.”
“심부름?”
“네. 서영 씨가 어머니께 드릴 게 있다고, 좀 전달해달라고 해서요.”
“하아…….”
성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일가가 보통 집안은 아니었기 때문에 은하의 시집살이를 대충 예상했지만, 이런 일까지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도훈이는 알아? 너 이렇게 서영이와 어머니 사이에서 심부름하고 있다는 거?”
도훈의 얘기에 은하의 얼굴이 다시 한번 딱딱하게 굳었다. 성우가 그 표정을 놓칠 리 없었다.
“그래, 그 녀석이 알 리가 없겠지. 알았으면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
과연 그랬을까. 은하는 성우의 말에 속으로 씁쓸해할 뿐이었다.
“근데 아까부터 계속 얼굴이 안 좋은데, 정말 괜찮은 거야?”
“네. 그럼요.”
은하가 자신은 정말 괜찮다며 웃어 보였지만 정작 다리에는 힘이 풀려 휘청거리고 말았다.
성우가 가볍게 은하를 잡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은하가 괜찮다며 저지하고는 제힘으로 우뚝 섰다.
습관적인 매너였을 뿐인데 은하가 너무 정색하니 성우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은하는 아차 싶어서 변명을 했다.
“아, 오빠. 그게 아니고요…….”
“괜찮아. 너 유부녀잖아. 이제 뭐든 조심해야지.”
하지만 성우는 곧 은하의 입장을 헤아리곤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웃어 보였다.
사실 성우에게 억하심정이 있거나 그의 행동이 불편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성우가 손을 내밀었을 때 아까 서영이 휘청거리며 도훈에게 안긴 것이 불현듯 떠올랐고, 자신에게 불쾌감을 준 그 상황이 지금과 비슷한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성우에게 정색한 것이다.
은하는 성우에게 미안하고, 서영에게 불쾌하고, 도훈에게는 화가 나는 감정이 복합적으로 뒤섞여 울고만 싶었다.
이러지 않기로 했고,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은 결혼을 한 뒤 도훈의 말대로 성우와 만나지도 못했고, 연락 한번 제대로 한 적 없었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조금은 억울하기까지 했다.
자신은 그렇게 조심했는데, 도훈은 편하게 서영을 만나 입술까지…….
“아무튼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안 그래도 어떻게 지내나 궁금했는데.”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성우의 다정한 말 한마디에 은하는 울컥했지만 이내 웃으면서 대답했다.
“매번 그 소리. 그래도 네 말이니까 믿어야겠지. 근데 혼자 온 거야?”
“네? 아, 네…….”
도훈도 여기에 있긴 하지만, 같이 온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밖에 할 말이 없었다.
“하긴, 도훈이 녀석이 워낙 바빠서 같이 다니기 힘들겠지. 난 이만 가려고. 서영이랑은 지난번에 인사 따로 했었고, 오늘은 잠깐 들른 거라.”
“아…….”
은하는 ‘서영’이라는 이름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도훈의 목을 끌어안고 다정히 키스를 하던 그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얼핏 눈이 마주쳤던 것 같기도 하고.
‘설마……?’
만약 눈이 마주치지 않았어도, 서영은 자신을 봤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까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미처 생각 못 했는데, 도훈은 넘어지는 서영을 챙기느라 돌아서 있었지만 서영은 분명히 은하 쪽을 보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넌 더 있다 갈 거야?”
“아뇨. 저도 가려고요.”
은하가 단호하게 얘기했다. 만약 은하의 예감이 맞는 거라면 더는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만약 그 예감이 틀렸다고 해도, 분명 갤러리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했음에도 아무런 답 없이 자신을 찾지도 않은 것은 그녀의 잘못이기도 하니까.
“잘됐네. 데려다줄게.”
“……네.”
잠시 망설이던 은하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성우와 단둘이 만나지 말라는 도훈의 말을 잊은 건 아니지만, 진실이 어떻든 그는 서영과 키스까지 하지 않았던가.
만약 이 행동을 도훈이 문제 삼는다면 은하도 할 말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같은 날까지 성우의 호의를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아까 정색한 걸로도 이미 너무 미안하니까.
“도훈이한테는 얘기하고 나온 거지? 뭐라고 하고 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어머니 심부름 다닌다는 얘기 꼭 해. 얘기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어머니에게 협박을 받은 게 아니라면.”
“…….”
“왜 대답이 없어?”
“네……. 그럴게요.”
“그 녀석, 오늘은 몇 시에 들어온대? 나도 오랜만에 얼굴이나…….”
“오늘은 못 들어온대요.”
“뭐?”
“일이 있어서 집에 못 들어온다고 연락받았어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하고 있지만, 은하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말은 안 해도 힘들어하는 게 분명했다.
성우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바쁘고 무심한 녀석이지만, 그래도 잘 챙겨주고 있을 줄 알았는데. 외박까지 수시로 하고 있을 줄이야.
이래서 이 결혼을 반대한 건데…….
말이 쉬워 계약결혼이지, 얼마나 힘들고 갑갑할까.
하지만 너무 걱정하면 은하가 속상해할 것 같아서 성우는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들 바쁘면 그럴 수 있어. 도훈이는 그중에서도 대한민국 1% 안에 드는 바쁜 남자고. 네가 이해해 줘야지.”
솔직히 도훈이 편이 돼 주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은하를 위해서 도훈의 입장에서 말해 주었다.
은하는 희미하게 웃을 뿐, 여전히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이럴 땐 얼른 움직이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다 문득 잊었던 용건이 떠올랐다.
“아, 잠깐만 기다려. 나 여기 사무실에서 받을 자료가 있어서. 그것만 받고 올게.”
“그럼 저 먼저 나가 있을게요. 여기 좀 답답하네요.”
성우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넓은 갤러리, 그중에서도 탁 트인 테라스였다.
그런데도 은하는 답답하다 말하고 있었다.
뭔가 몸이 아닌 감정이나 상황이 답답한 게 틀림없었다.
성우는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은하에게 건넸다.
“그럼 먼저 차에 가 있어. 금방 내려갈게. 오빠 차 알지?”
“네.”
은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향해 걸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이 상태로 도훈이나 서영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도 없었고.
성우 말대로 차에 가 있기라도 하면 한결 나을 것 같았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주소|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역로3길 40-36 B동 710호 (신내동)
전화|02)906-7768 / 팩스|02)906-7769
값 100원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와이엠북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