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역시, 영철은 속일 수가 없었다.
“사모님도 본부장님을 사랑하시고요.”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니.
그 말이 왜 이렇게 먹먹한지 모를 일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영철의 입으로 들으니 더 애틋하게 들렸다.
“전 두 분이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영철은 결혼식장에서 도훈과 나란히 서 있던 은하를 떠올렸다.
수줍어하면서도 도도하고 기품이 흐르는 그녀는 도훈의 짝으로 완벽하게 잘 어울렸다.
나이는 어리지만 당차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이번에 병원을 드나들며 느낀 바로는 은하 역시 도훈을 좋아했다. 그런데도 도훈은 제 감정을 숨기고 그녀를 밀어내고만 있었다.
사랑도 다 때가 있는 것인데.
서로 좋아하는데 왜 망설이고 있는 것인지.
도훈의 복잡한 속내를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영철은 너무 안타까웠다.
“그러다 사모님께서 상처 받으시면…….”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더 상처 주지 않으려고 이러는 겁니다.”
도훈이 영철을 보며 자조적으로 내뱉었다.
“은하의 사랑을 받기에는…… 제가 자격이 없잖아요.”
은하에 대한 감정을 말로 뱉고 나면 더 수습하기 어려워질까봐 어떻게든 감추려고 했는데, 이미 눈치챈 영철에게 더는 숨길 수도 없었다.
“은하는 내 조건을 보고 결혼한 것뿐입니다. 이 결혼이 진짜가 되는 건 다른 문제예요. 들여다보면, 고통스러운 진실만 남아 있을 테니까.”
“혹시 최세훈 팀장님 일 때문이라면, 솔직하게 터놓고…….”
“아뇨, 그건 은하를 더 고통스럽게 할 거예요.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면, 은하 역시 우리가 그저 계약관계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도훈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
“역시 집이 좋긴 좋구나.”
은하가 집 안으로 들어서면서 중얼거렸다.
입원에서 퇴원까지 삼 일밖에 안 있었지만 병원은 지겹고 답답했다.
그나마 은표를 자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좋았으나, 자유로운 단독주택에 살다가 꽉 막힌 병실에서 지내니 더 힘들었다.
그래도 집에 돌아오니 정말 살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박 실장님.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은하는 병원에서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챙겨준 영철에게 고마운 인사를 건넸다.
“고생은요. 크게 아프신 데 없이 퇴원하실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네. 입원해 있는 동안 신경 써주신 것도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별거 아닌 것 같았지만, 큰 검사를 받을 때마다 곁을 지켜준 영철이 꽤 의지가 됐다.
아파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병실은 생각보다 외로웠으니까.
“본부장님이 오지 않으셔서 서운하시죠?”
“네? 아니에요.”
은하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기대하지 않았다. 워낙 바쁜 사람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된 뒤로 더 무심하게 대하는 걸 은하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도훈이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은하도 조금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영철은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먼저 서운해하며 말을 이었다.
“워낙 바쁘신 분이고, 감정 표현에 서투르신 분이라…… 사모님이 너그러이 이해해주세요.”
“그럼요. 저 정말 괜찮아요.”
은하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할 때였다. 영철이 작은 쇼핑백 하나를 은하에게 내밀었다.
“참, 이거는 본부장님 선물입니다.”
“선물…… 이요?”
은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훈 씨가 저에게 선물을요?”
“네. 이번에 미국 출장 다녀오실 때 사오신 겁니다.”
“아…….”
생각지도 못했다. 그가 출장 선물을 사왔을 거라곤…….
많이 바쁘다고 들었는데, 선물까지 사오다니.
‘뭐 필요한 거 없어?’
‘없어요.’
‘생각나면 3시까지 연락해.’
그게 다였다.
미국 출장을 떠나던 날, 본가에서 아침을 먹고 집으로 데려다주면서 도훈이 했던 말이었다.
그날따라 정신이 없기도 했었거니와 딱히 받고 싶은 선물도 없었다.
그래서 따로 답을 하지 않았고, 도훈 역시 그냥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은하는 바로 선물을 뜯어 보았다.
아주 고급스럽고 세련된 색과 디자인의 스카프였다.
“너무 예쁘네요.”
스카프를 펼쳐 본 은하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흔한 향수나 화장품이 아니라서 더 감동이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본부장님께서 아주 신중히 고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은하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영철을 보았다.
“그럼요. 사모님 선물은 늘 그랬습니다. 처음에 호텔에서 만난 다음 날 아침의 그 스카프도, 바쁘신 와중에도 직접 카탈로그를 보고 주문하신 거니까요.”
“네? 그게 무슨……?”
“모르셨습니까? 처음에 제가 사다 드린 체크 스카프, 본부장님이 직접 고르신 겁니다.”
“네……. 몰랐어요.”
어쩐지 옷이랑 너무 잘 어울린다 생각했더니…… 도훈이 직접 고른 거였구나.
그때는 서로에 대해 전혀 몰랐고, 그저 5년 만에 재회해 결혼을 제안한 당돌한 여자였을 뿐일 텐데.
도훈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정도로 신경을 써줬다는 사실에 은하의 가슴이 다시금 콩닥거렸다.
그러고 보니 출장 선물로 스카프를 사다주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고르기도 까다롭고 신경도 많이 쓰일 테니까.
그런데 도훈이 이번 선물도 스카프로 준비한 걸 보면…… 조금은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아니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뭐가 됐든 그저 부부 사이의 예의상 사다 준 걸 텐데. 나중에 감사 인사나 해야겠다.’
이제는 하다 하다 의례적인 출장 선물에까지 의미 부여를 하는 자신이 민망해서, 은하는 얼른 생각을 털어냈다.
***
영철을 보낸 뒤, 은하는 스카프를 고이 접어 다시 쇼핑백에 넣어두었다.
그러고는 고양이를 찾아나섰다.
“예쁜아, 어디 있니?”
자신이 집에 없는 동안 밥도 못 먹고 굶었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처음부터 고양이를 탐탁지 않아 했던 도훈에게는 차마 돌봐달라 말하지 못했다.
은하와 얼굴 보기도 바쁜 사람이 아닌가.
그나마 일주일에 두 번 오시는 고용인 아주머니에게 문자로 언질을 해두긴 했다. 그런데 워낙 까다로운 녀석이라 낯선 사람의 등장에 어디 먼 곳으로 숨지는 않았을지, 제대로 밥은 얻어먹었는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예쁜아, 어디 있어? 예쁜아? 그동안 집에 못 와서 미안해.”
은하가 사람에게 하듯 사과를 하며 연신 이름을 불러 댔다.
한참을 불러도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아서 마음졸이고 있을 때, 고양이가 수풀 속에서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그리고 그 순간 은하는 반가움도 잊고 잠시 놀라고 말았다.
“예쁜아……?”
은하는 제 눈을 의심했다. 삼 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까맣고 조그맣던 새끼고양이는 살이 포동포동 쪄 있었다. 확연히 눈에 띌 정도였다.
일주일도 아니고 고작 삼 일인데……. 어디서 뭔가 안 좋은 걸 먹어서 부은 건가?
은하는 오히려 걱정스러워서 고양이를 안고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그런데 고양이는 무거워진 것 빼고는 건강하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혹시나 해서 고양이가 나온 수풀 안쪽을 살펴보니 먹이가 담긴 접시 여러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것도 다 아침에 새로 준 먹이들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 정도로 포동포동해진 걸 보면, 삼 일 내내 잘 먹었다는 건데, 고용인 아주머니가 이렇게 챙겼을 리는 없고…….
“설마 도훈 씨가……?”
고양이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어쨌거나 고양이가 은하가 없는 동안에도 잘 먹고 잘 지내서 너무 다행이었다.
‘곧 헤어져야 하는데, 정을 많이 주는 건 당신 손해야.’
고양이를 보며 흐뭇해하던 은하의 머릿속에 문득 도훈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고양이를 보낼 보호소도 알아봐야 했다.
하지만 헤어질 거라고 벌써부터 거리를 두면 고양이가 더 서운해하지 않을까.
이곳에서 행복한 기억이 평생의 기억이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
은하는 도훈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 고양이를 향해 중얼거렸다.
“헤어지는 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은 사이좋게 잘 지내자. 너도 좋지?”
갸릉갸릉.
고양이도 은하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듯 쓰다듬어 주는 손등에 머리를 부비며 즐거워했다.
***
늦은 오후.
비워놓았던 동안 밀린 집안일을 대충 치워놓고, 은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스카프 잘 받았다는 얘기도 해야 하고……. 저녁은 어떻게 할지도 물어보긴 해야겠지? 아, 맞다. 예쁜이 밥도 주신 건지 물어보고.”
집에 돌아오니 도훈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다.
그날 이후 어색해진 관계는 좀처럼 회복이 어려웠지만 그래도 필요할 때는 전화하라던 도훈의 말에 용기를 내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다행히 도훈은 몇 번 신호가 가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응. 무슨 일이지?
짧은 대답에 용건만 말하라는 듯한 뉘앙스여서 서운하긴 했지만, 무려 3일 만에 듣는 도훈의 음성이었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여전히 컸기에 목소리만으로 좋아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지만, 은하는 침착하게 통화를 시작했다.
“저, 은하인데요.”
-그래. 퇴원은 잘 했나?
“아, 네……. 박 실장님이 도와주셔서, 덕분에 잘 퇴원했어요.”
-다행이네.
비록 도훈이 직접 오지 않았어도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은하는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아 참, 제가 전화 드린 이유는…….”
-응.
“오늘 저녁에는 일찍 들어오시나 해서요. 일찍 들어오시면 저녁 준비하려고요.”
-일이 있어.
“아…….”
바쁠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기대는 안 했다.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런 감정도 자신에게는 사치니까.
은하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어서 들려오는 도훈의 말에 은하의 평정심이 무너졌다.
-아마 집에도 못 들어갈 거야.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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