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내 인생의 값어치라는데, 은하도 더는 고집부릴 수가 없었다.
“……네.”
은하가 대꾸하자 도훈은 그제야 안심하며 아까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 소파베드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정말 이곳에서 자려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이곳 병실에서 불편하게 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미국에 돌아온 지 겨우 하루.
어젯밤에도 술 취한 자신을 신경 쓰느라 제대로 잠도 못 잤을 텐데…….
아무리 VIP 병실의 소파라도 불편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게다가 왠지 소파에 눕지도 않고, 저렇게 앉아서만 눈을 붙일 것 같아 영 걱정이 되었다.
은하가 망설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도훈 씨.”
“……말해.”
“정말 여기서 주무실 생각이세요?”
“응.”
도훈은 눈을 감은 채 편안하게 대답했다.
반면 은하는 도훈이 정말로 여기서 잘까봐 조바심이 일었다.
“전 정말 괜찮아요. 어제도 저 때문에 잘 못 주무셨잖아요. 집에 들어가서 편안하게…….”
“내가 안 괜찮아.”
도훈이 조용히 쐐기를 박았다.
아무래도…… 사람들 시선을 신경 쓰는 거겠지.
은하도 도훈이 사람들을 신경 쓰는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냥 두고 보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은하가 한 번 더 그를 설득했다.
“사람들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여기는 좋은 병실이고, 도훈 씨는 내일 또 출근을 해야 하니까……. 아무래도 여기서 주무시면 많이 불편하시고…….”
“난 이것도 편해.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렇게 앉아서 자는 것이 편하단 말인가.
그리고 도훈이 그러고 있는데, 어떻게 신경이 안 쓰일까.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은하는 짧게 한숨을 쉬면서 현실을 받아들였다.
‘부부라면…… 이런 곳에서도 한 침대에서 자도 괜찮겠지?’
앞으로는 더 태연하게 부부연기도 잘 하자 다짐한 것이 무색하게, 은하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니, 노력해야 했다.
결심이 서자, 은하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그럼 올라오시겠어요?”
“……?”
도훈의 반듯한 눈썹이 살며시 올라갔다. 그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는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은하를 마주 보았다.
“여기 침대에서, 같이 자요. 아무래도 소파에서 주무시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요. 다행히 침대도 넓고…… 제법 푹신해요.”
긴장이 돼서인지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다.
은하는 아차 싶어 얼른 입을 닫고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고는 가장자리로 몸을 옮겨 옆자리를 비웠다. 도훈이 올라오기 편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도훈은 생각지도 못한 은하의 말에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당황한 채 앉아만 있었다.
뜻밖의 제안에 가슴이 요동쳤다.
안 그래도 응급실에 누워 있던 은하를 본 순간부터 끓어오르는 제 감정을 겨우 진정시키며 그녀와 대면하는 중이었는데, 그녀는 자꾸만 저를 자극했다.
어떻게든 이성을 찾으려는 그를, 단숨에 또 감정의 노예로 만들어버리다니.
스스로에게 화가 나는 것인지, 이 상황에 짜증 나는 것인지 결국 도훈은 불퉁하게 말을 내뱉었다.
“감당할 수 있겠어?”
“……네?”
“아무리 병원이라도 붙어 있으면 몸이 자연적으로 반응할 텐데.”
도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은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설마, 병원에서 그런 생각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오늘이 열흘쯤 됐나. 어제도 당신이 술 취해서 못 하고……. 난 몸이 아주 정직한 스타일이라서 말이야. 당장 여기서도 발가벗고 뒹굴 수 있어.”
은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이야기였지만, 늘 반듯하기만 한 도훈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제법 상스러운 말이기 때문에.
놀리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은하는 도훈의 눈을 보는 순간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눈에 정말로 이채가 돌았다.
남자는 본능의 동물이라더니.
이런 순간에도 그런 걸 떠올린 도훈이 너무 황당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가 자신을 안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이상한 안도감과 설렘이 동시에 찾아왔다.
하지만 여기는 병원이고…….
여기서 그런 짓을 벌이는 건…… 너무 배덕한 거 아닌가.
하지만 그녀 역시 당장이라도 도훈에게 안기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 혼란스러웠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몇 번씩 오락가락하는 제 마음을 은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은하가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지켜보던 도훈이 무심하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지금 내 걱정하지 말고, 빨리 낫기나 해. 집에 가서 실컷 안게.”
“아…… 네.”
도훈은 그대로 다시 눈을 감았다.
은하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침대에 누웠다.
***
쌔근쌔근.
병실 안에 은하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도훈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올려 떴다. 피곤이 쌓였지만 잠이 올 리 없었다.
이 불면이 피곤한 몸이 아니라 답답한 제 가슴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잠들긴 글렀고, 은하가 자는 것까지 봤으니, 이제 그만 회사로 출근할 생각이었다.
도훈은 병실을 떠나기 전, 은하에게 다가가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긴 속눈썹하며, 복숭앗빛 뺨, 앵두 같은 입술.
“이렇게 예쁘니까, 내가 환장하지.”
보면 볼수록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도훈의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렇게 이 여자가 마음에 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이 감정을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지.
나이 서른둘 먹고도 감정이 컨트롤이 안 된다니.
어떻게 어린 그녀보다 자신이 더 아이 같았다.
아까도 불쑥 튀어나온 말로 그녀를 욕구불만의 대상으로 전락시켜버린 것이 영 마음에 걸렸지만,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당분간은 얼굴도 못 보겠군.”
볼 때마다 가슴이 선뜩거려서 더는 눈을 마주칠 자신도 없었다.
당분간이라도 그녀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럼 조금은 이 감정이 가라앉지 않을까.
그럼에도 지금은 그녀의 복숭앗빛 뺨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앵두 같은 입술도.
이렇게 보기만 해도 아래로 바로 피가 몰렸다.
그 순간, 본능은 이성보다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가려는 순간.
“으음…….”
은하가 몸을 뒤척였다.
도훈은 깜짝 놀라 그대로 숨을 죽였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그녀의 입술이 닿을 듯 바로 앞에 있었다.
만약 여기서 그녀가 눈을 뜬다면 그가 키스하려고 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터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오해를 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등에 식은땀이 다 흘렀다.
다행히 은하는 그대로 다시 잠에 빠져들었고, 도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을 차리고 어이없는 제 행동을 깨달은 도훈은 자신을 자책하면서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왔다.
***
검사 결과, 다행히 은하는 큰 병이 아니었다. 도훈의 짐작대로 스트레스성 복통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병원에 이틀을 더 머물면서 정밀 검사를 받았다.
그렇게 은하가 퇴원하는 날.
그동안 병문안을 가지 않은 도훈은 퇴원할 때 데리러 가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나마 마음을 들키지 않고 부부 흉내를 내면서 그녀를 챙길 수가 있을 테니까.
그런데 하필 이른 아침부터 프랑스에서 협업을 진행하고 있는 바이어가 도착했다.
안 그래도 기획 회의며, 하반기 행사 준비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에 바이어 접대까지 해야 하니 전혀 시간을 뺄 수가 없었다.
도훈은 결국 영철에게 은하의 퇴원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까지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영철은 그동안 도훈의 부탁으로 은하의 병실을 드나들었다. 중요한 검사가 있을 때는 보호자로 옆에 있어 주기도 했다.
그런데 퇴원 날까지 부탁할 줄이야.
“하필 오늘 같은 날, 일이 쏟아지다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대신 잘 모시겠습니다.”
안 되려니까 일이 이렇게 꼬일 수도 있는 건지, 보는 영철이 다 안타까웠다.
하지만 도훈은 차라리 잘된 건가 싶었다.
은하를 만나러 가는 게 과연 지금 상황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여전히 자신이 없었다.
오히려 무심하게 일관하는 것이 그녀가 마음을 정리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전화라도 한 통 해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사모님도 기다리실 것 같은데.”
“굳이 그럴 필요 없을 것 같군요. 어차피 퇴근하고 집에 가면 볼 거고.”
도훈은 부러 냉담하게 말했지만 영철은 그의 타는 속을 모르지 않았다.
새삼스럽지만 도훈이 은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동안에도 낌새가 있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좋아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런데 이번에 은하가 입원한 후, 도훈은 영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도훈을 옆에서 지켜봐 왔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낮 시간 동안 은하에게 찾아가지는 않지만, 온 신경이 그녀에게 가 있다는 것은 도훈을 오래 봐 온 영철로서는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영철이 결국 어렵게 말을 꺼냈다.
“마음을 드러내시는 건 어떠십니까?”
무심히 결재서류를 넘기던 도훈의 손이 허공에서 잠시 멈췄다.
“사모님을…… 좋아하시잖아요.”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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