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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도 없이 결혼-45화 (45/72)

45화.

제일병원에서의 입원 수속은 빠르게 이뤄졌다.

별거 아닌 복통으로 입원까지 하는 게 민망했지만 도훈의 고집이 워낙 강경했고, 은하 역시 일단 어디서든 쉬고 싶었기에 크게 마다하지 않았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아침에 정밀 검사를 받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

“네…….”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는 도훈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이미 시간은 12시를 넘어 있었다.

“피곤하실 텐데 들어가세요.”

“…….”

하지만 도훈은 아무 말이 없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은하는 자꾸만 작아지는 자신을 어쩌지 못하고 이 상황에 대해서 사과했다.

“죄송해요.”

그 소리에 도훈이 눈을 뜨고는 은하를 바라보았다. 눈이 다소 충혈돼 있었다. 그런데 그 눈빛이 너무 강렬해서 은하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제 보니 그의 옷차림은 슈트가 아니라 편한 니트 차림이었다. 무스를 발라 늘 단정하던 머리도 지금은 자연스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짝 흐트러진 그의 모습과 충혈된 눈조차도, 주변의 다른 사물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너무 멋있었다.

“뭐가?”

“네?”

“뭐가 미안하냐고.”

어쩐지 삐딱하게 들리는 그의 말에도 은하는 또박또박 제 생각을 전달했다.

“안 그래도 바쁘신데…… 괜히 저 때문에 신경 쓰게 해드려서요.”

“일부러 아픈 것도 아니지 않나? 오히려 나 때문에 스트레스 받았을 수도 있고.”

도훈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대꾸했다.

사실 도훈은 자신 때문에 은하가 아팠던 건 아닐까 자책하는 중이었다.

아침에 그가 했던 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을 수도 있으니까.

제 마음을 다잡기 위해 평소보다 냉정하게 한 말이기도 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말라고.”

“…….”

“오늘은 나도 여기서 잘 거야. 그래도 와이프가 아프다는데 병실 정도는 지켜줘야지.”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은하에게 다가와 자리를 정돈해주며 말했다.

제 손으로 이불 한 번 안 개어봤을 것 같은 사람인데, 베드를 정리하는 손길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놀라웠다.

그 모습 때문일까. 은하가 한참을 머뭇거리다 말을 내뱉었다.

“고마워요.”

베드를 정리하던 도훈의 손길이 멈칫했다. 이마에는 살포시 주름도 졌다.

아까는 계속 미안해하더니 이번에는 고마운 건가. 도대체 뭐가 고맙다는 건지.

당장 선주의 구박도 그렇고, 오늘 아침 차갑게 대했던 상황도 그렇고.

오히려 은하를 힘들게 한 게 더 많은 것 같은데.

“저는 도훈 씨가 저에게…… 실망하셨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실망이라…….”

도훈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은하를 보았다.

“엄연한 계약관계인데, 제멋대로 감정을 끌어들였잖아요.”

“…….”

은하는 하루 종일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반성했다.

보통 사이도 아니고, 두 사람은 계약 사이가 아니던가.

그를 좋아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도훈을 좋아한다면 더더욱.

만약 자신으로 인해 계약을 끝까지 이행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은 어쩔 수 없더라도 도훈까지 피해를 입게 되는 상황이었다.

도훈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후계자 상속 문제에 이혼은 치명적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자신의 섣부른 행동으로 그를 곤란하게 만든 격이었다.

“그런데도 저를 예전처럼 대해주셔서 감사해요. 저 때문에 부담스럽고 곤란하실 텐데…….”

그렇게 반성하는 은하와는 반대로, 도훈은 양심에 찔렸다.

멋대로 감정을 끌어들인 건 은하보다 도훈이 더했다.

그녀가 좋아서 어쩔 줄 몰랐던 건 분명히 자신이었으니까.

그러니 모든 게 다 제 탓이었다.

은하를 흔들어 놓고, 이제 와 흔들리지 말라고 괴롭히는 것도 자신이었다.

그러니 앞으로의 괴로움은 자신이 다 감당해야 했다. 은하가 아니라.

그런데 바보처럼…… 왜 은하가 아픈 건지.

그냥 훌훌 털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늘 밤 상황을 겪으며, 도훈은 당연히 은하를 예전처럼 대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좋아서, 이제는 오히려 은하가 떠날까 봐 겁날 정도니까.

은하가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도훈은 가까스로 마음을 정리한 뒤 은하의 말에 애써 딱딱하게 대꾸했다.

“이미 결혼도 했고, 아이는 준비 중이고. 한 번 정도는 넘어가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네.”

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앞으로 은하 하기 나름이라는 말이었다.

은하는 도훈이 이렇게 넘어가 주는 것도 감지덕지였다.

혹시나 도훈도 자신을 여자로 느끼는 건 아닐까 헛된 기대도 잠시 했었다.

하지만 이제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으니, 자신만 감정을 숨기고 아내 역할에 충실하면 될 일이었다.

물론 그로 인해 상처도 받고 힘은 들겠지만, 어쨌거나 옆에서 그를 챙겨줄 수 있고 뭐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은하는 충분했다.

“제 감정으로 인해 앞으로 결혼 생활에 지장주지 않을게요. 도훈 씨에게 부담드리는 일도 없게 하고요.”

“……믿어보지.”

은하의 제법 단호한 다짐에, 도훈은 가슴 한편이 찌르르 울렸지만, 끝내 무심하게 일갈했다.

그러고는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혹시나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네.”

“앞으로 필요한 상황일 때는 망설이지 말고 전화해.”

“아…….”

은하는 뜨끔해서 쳐다보았다. 도훈이 마치 제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정략결혼도 아니고 찐하게 연애해서 결혼한 사이에, 결혼한 지 두 달도 안 된 아내가 아파서 혼자 기어 올 정도인데, 남편이라는 자가 이제 나타났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니까.”

“……그러네요.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 못 했어요.”

은하가 민망함에 입술을 말아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나쁘게 본다 치면, 충분히 부부 사이에 이상한 얘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고 보니 부부연기도 늘 도훈만 열심히 하고, 은하는 제대로 한 적도 없었다.

당장 오늘도 그렇지 않은가.

도훈은 자신을 부축해주고, 침대를 정돈해주는 등 보기만 해도 아내를 사랑하는 듬직하고 멋진 남편 그 자체니까.

그런데도 자신은 제 감정에 함몰돼서 그 이상의 것을 바라고 서운해하며, 오히려 그를 잘 챙겨주지도 못했다.

심지어 이 결혼을 요구한 사람도 자신이었는데.

‘앞으로는 힘들어도 노력해야 해. 그게 도훈 씨 옆에 있을 수 있는 길이야.’

사심이든 계약 때문이든, 도훈 옆에 3년은 있어야 했다.

그러니까 잘 버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은하가 다시 한번 다짐할 때였다.

“이제 그만 자. 내일 아침부터 검사받으려면 컨디션이 좋아야지.”

어느새 베드 정리를 마친 도훈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문득 찬숙 일이 떠오른 은하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참, 우리 어머니께 예물 해주셨다는 얘기 들었어요.”

“…….”

“생활비도 주고 계셨다고…….”

도훈이 난감한 표정으로 은하를 돌아보았다.

혹시 몰랐던 상황에 기분이 상했을까 싶어 그가 얼른 변명을 덧붙였다.

“그건 결혼하기로 했을 때, 처음부터 약속한 거였으니까 해드렸을 뿐이야.”

“……감사해요.”

도훈은 잠시 말을 멈추고 은하를 쳐다보았다.

알고 나면 자존심 상해하며 화를 낼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오히려 고마워하다니.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녀의 순수한 진심이 느껴져 더 가슴을 울렸다.

“하지만…… 앞으로는 제가 할게요.”

“뭐?”

“결혼하고 도훈 씨에게 받은 돈, 그대로 있으니까 지금부터라도 제가 드릴게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아뇨. 그래야 도훈 씨에 대한 제 마음도 정리가 될 것 같아요.”

도훈에 대한 마음을 얘기하면서 은하의 목소리가 살며시 떨려왔다.

혹시라도 도훈이 또다시 언짢아할까 신경 쓰였지만 이렇게라도 정리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미 좋아진 마음을 쉽게 접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줘야 도훈이 안심하지 않을까 싶었다.

한편, 도훈은 마음을 정리한다는 말에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분명 그가 원하는 방향이었음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늘식품 직원들에게 주신 월급도 다시 돌려드릴게요.”

“그건 내가 준 게 아니고 제일그룹에서 투자를 한 거니까, 그럴 필요 없어.”

“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은하의 미간이 살포시 구겨졌다.

도훈이 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그리고 어머니 생활비도 일단은 계속해서 내가 드리지.”

“도훈 씨……. 그럼 저는 처음부터 그렇게 많은 돈을 요구하지 않았을 거예요. 도훈 씨가 이렇게 다 해줄 거였으면…….”

당연히 조금만 받았을 것이다. 아니, 아예 돈은 안 받았을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필요한 것은 아버지 병원비와 찬숙의 생활비, 그리고 회사 직원들 월급뿐이었으니까.

그랬으면 지금보다는 도훈에게도 덜 미안했을지도 모른다.

은하의 어두워진 얼굴을 보더니 도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돈은 내가 당신 인생을 3년간 저당 잡은 몫이야. 여기저기 나눠주고 남은 돈만 가져야 할 만큼, 당신 인생 그렇게 싼값 아니라고.”

찬숙은 은하를 졸부에게 시집보낼 계획을 하면서, 3억도 감지덕지라고 했었다.

네 주제에 어디 가서 그런 돈을 받겠냐고.

그런데 도훈은 은하의 값어치가 10억 그 이상이라고 말해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무심하지만 자신을 위해 주는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이러니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이제 티를 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은하는 속으로 감정을 삭였다.

은하가 한참이나 말이 없자 도훈이 직접 나서서 정리했다.

“그럼 알아들은 걸로 하지.”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주소|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역로3길 40-36 B동 710호 (신내동)

전화|02)906-7768 / 팩스|02)906-7769

값 100원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와이엠북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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