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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도 없이 결혼-44화 (44/72)

44화.

도훈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그렇겠지. 그것만으로는 증거가 빈약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바로 지금이 네가 스스로 잘못을 밝힐 수 있는 기회라고 보이는데. 물론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기회를 주고자 했지만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으니 도훈도 더 이상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차갑게 세훈을 일갈한 뒤 일어나 걸음을 옮기던 도훈이 문득 세훈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세훈은 또 무슨 말을 하나 싶어서 잔뜩 경계어린 눈빛으로 도훈을 바라보았다.

“여 대표의 사고.”

“…….”

“혹시 거기에도 네가 개입이 되어 있다면…….”

도훈이 잠시 말을 고르는 동안 세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펴졌다. 도훈이 거기까지 알아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세훈도 호락호락 넘어갈 순 없었다.

“형님, 아무리 그래도 동생한테 너무 뒤집어씌우시는 거 아닙니까? 모함도 어느 정도 해야지, 자꾸 이러시면 저도 가만있지 않습니다.”

세훈이 강하게 내뱉었지만, 도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니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렇다면 죗값은 톡톡히 치러야 할 거야. 너는 네 욕심을 위해서 한 가정을 파괴한 거니까.”

그 말을 끝으로 도훈은 집무실을 떠났다.

혼자 남은 세훈은 화가 나서 서류봉투를 냅다 문 쪽으로 던져버렸다.

조마조마한 채로 도훈에게 협박을 받는 이 상황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도훈은 결국 늦은 밤에야 집에 돌아왔다.

“휴우.”

그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힘든 하루였다. 하루 종일 밖에서 업무를 본 데다 시차 적응이 안 돼서 더 피곤했다.

게다가 선주는 물론 세훈까지 만나 담판을 지었더니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유독 그를 힘들게 한 건 따로 있었다.

내내 따라다니는 은하에 대한 생각이었다.

아침에 그런 대화를 하고 나왔으니 마음이 쓰이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혹시…… 은하도 많이 힘들었으려나.

그렇다고 울고, 그러진 않았겠지?

종일 마음이 쓰였으나 연락해볼 수 없어 더 안달 난 하루였다.

야옹.

그때, 은하가 키운다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정원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예쁜이라고 했나……. 꼭 저같이 이름을 지었네.”

도훈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 와중에도 아침에 고양이를 안고 보여주던 은하의 환한 미소가 떠올라 가슴이 뻐근했다.

그런데 왠지 집 안의 공기가 휑했다.

“벌써 자나?”

도훈이 늦으면 늦는 대로 기다리다 꼭 나와서 인사라도 하는 그녀였다.

그런데 나와 보지 않으니 벌써 잠이 든 건가 싶었다.

아니면 아침 일로 상심해서 도훈은 쳐다보기도 싫은 걸지도.

어쨌든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이 만들어낸 상황이었기에 도훈은 우선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옷부터 갈아입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는데도 이상하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불현듯 어떤 예감에 안방 문을 조심스레 열어 보았다.

그런데 정말로…… 은하가 없었다.

“이 시간에 어디를 간 거지? 설마 외출했다가 아직 안 들어온 건가?”

시간은 벌써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

도훈이 휴대폰을 들어 은하에게 온 연락이 있는지 살폈다. 하지만 오전에 온 문자메시지 이후로는 따로 연락이 없었다.

도훈은 갑자기 초조해졌다. 도대체 이 시간까지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는 걸까.

조금 기다려볼까 고민하던 도훈은 금세 휴대폰을 열었다. 애가 타서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딸깍’ 하고 전화가 연결되는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지금 어디…….”

-여보세요? 여은하 씨 보호자분 되시나요?

그런데 상대방이 은하가 아니었다. 게다가 보호자라니?

“그런데, 누구시죠?”

-여기 병원이에요. 지금 여은하 씨는 주무시고, 휴대폰은 계속 울려서 제가 대신 받았습니다.

도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은하가 병원에 있다니. 그것도 이 시간까지.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속이 바짝 탔다.

“병원이라뇨? 무슨 일입니까?”

-아까 여은하 씨가 복통으로 응급실에 내원하셨거든요. 지금은 검사받은 후에 진통제 맞고 주무시고 계시고요.

“어느 병원입니까?”

-사거리에 있는 동산병원입니다.

도훈은 외출복으로 다시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다시 집을 뛰쳐나갔다.

***

크지 않은 종합병원이지만 응급실에는 사람이 넘쳐났다.

도훈은 도착하자마자 간호사가 가리키는 베드로 곧장 향했다. 커튼이 쳐진 창가 끝 쪽 베드였다.

아닌 척했지만 급하게 뛰어와 숨이 가빴다.

도훈은 숨을 고르고 커튼을 젖혔다.

촤라락.

커튼이 젖혀짐과 동시에 창백하게 누워 있는 은하가 눈에 들어왔다.

“한 두 시간쯤 됐나? 배가 너무 아프시다고, 거의 기다시피 오셨더라고요. 지금은 주무시는 거 보면 통증은 가라앉은 거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안 그래도 은하의 창백한 모습이 안쓰러워 신경이 쓰이는데, 얘기를 듣고 나니 도훈의 가슴이 더욱 욱신거렸다.

그렇게 아픈데 연락도 없이 혼자서 병원에 올 생각을 하다니.

분명 아침의 일 때문에 연락도 못 한 것 같아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음…….”

그때 은하가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아직 통증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도훈이 은하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이제 좀 정신이 드나?”

“도훈 씨……? 여긴 어떻게?”

은하가 주위를 둘러보며 정신을 차리더니 제 눈앞에 있는 도훈을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늦은 밤까지 집에 들어오질 않아서 연락했더니 병원이라더군.”

“아…… 죄송해요. 그만 잠들어버렸어요.”

이 와중에도 은하는 미안해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파서 병원에 온 사람을 책망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의기소침해진 그녀가 왜 이렇게 보기 싫은 건지…….

그녀에게 선을 지키라고 한 건 분명 그였지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조차 거리를 두는 건 그가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그게 죄송할 일은 아니지 않나?”

“네……?”

“굳이 그런 것까지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야.”

“아, 네…….”

“아픈 건 좀 어때?”

“한결 나은 것 같아요.”

은하도 무슨 정신으로 병원에 왔는지 모를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었다.

저녁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그런데 한약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복통이 밀려왔다.

밥을 먹기 싫어서 종일 굶다가 빈속에 한약을 먹어서일까.

아니면 하루 종일 스트레스를 받아서였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알 수 없는 복통에 응급실로 와서 몇 가지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사이 진통제를 맞고 겨우 통증을 가라앉힌 뒤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아프면 연락을 했어야지!”

“……죄송해요. 저도 정신이 없었어요.”

사실 아플 때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이 도훈이었다. 하지만 아침에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연락을 하는 게 조심스러웠다.

현재 그의 마음 상태를 모르니 더욱 그랬다. 계약결혼에 감정을 개입시킨 무책임한 그녀의 행동에 실망했을 수도 있고, 이 결혼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걸 다 떠나서도 워낙 바쁜 사람이기도 하니까, 굳이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제일병원으로 옮겨서 정밀 검사 받아.”

“아뇨. 이제 괜찮아요. 뭘 잘못 먹었는지 배가 좀 아팠을 뿐이에요.”

“내 말 들어.”

도훈은 화가 난 듯 딱딱한 표정으로 강하게 내뱉었다.

은하는 입을 다물었다. 고집을 부려봤자 통하지 않을 것 같았기에.

“제일병원에는 연락해 놨어. 여기 수납도 이미 마쳤고. 가방은 이게 단가?”

“아, 네……. 제가 할게요.”

은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겨 메려고 했다.

하지만 도훈이 그녀를 저지했다.

“내가 들지.”

“네?”

아무리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해도 도훈이 여자 가방을 든다는 건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런 건 절대로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봐도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그냥 제가 들게요. 제가 들어도 돼요.”

“가만히 있어.”

하지만 도훈은 아무렇지 않게 가방을 챙겨 들고는 은하에게 물었다.

“혼자 걸을 순 있겠어?”

“아, 네…….”

아직까지 미묘하게 복통이 남아 있긴 했지만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은하가 베드에서 내려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도훈이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는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부축했다.

은하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원래 이 정도 스킨십은 꽤 자연스럽게 했었는데, 오늘은 유독 어색했다.

모든 게 제 마음을 들킨 탓 같아, 은하는 또 한 번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하지만 그 어색함도 은하 혼자 생각인 건지, 도훈은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겼다.

은하도 할 수 없이 그에게 기대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는데. 그것이 물질이든 마음이든.

그런데 이 밤중에 또다시 그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니.

은하는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주소|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역로3길 40-36 B동 710호 (신내동)

전화|02)906-7768 / 팩스|02)906-7769

값 100원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와이엠북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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