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도훈은 피곤했지만 이학이 말한 대로 표정 관리를 하며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제 집에 온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안 와서 말이야.”
도훈이 의아한 얼굴로 선주를 보았다. 자신이 오는 것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 의뭉스러워서였다.
“어제 서영이가 왔었거든. 너 온다고 내내 기다리다가 아쉬워하며 갔지 뭐니.”
“서영이가요?”
서영이는 한 살 차이 나는 고등학교 후배였다. 대학진학은 서로 달랐지만 집안끼리 가까워서 어릴 적부터 자주 왕래를 하곤 했다.
물론 도훈은 용건 없이 그녀를 만난 적도, 먼저 연락한 적도 없었지만 서영은 자주 그를 찾아오곤 했다.
“프랑스에서 얼마 전에 돌아왔대. 너 결혼했다는 소식 듣고 놀라더라.”
좋게 생각하는 후배이니 오랜만에 이름을 들어서 반갑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녀가 프랑스에서 돌아왔든, 결혼 소식을 듣고 놀랐든 그건 도훈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선주가 서영 이야기를 하면서 친한 척하는 것이 거슬렸다. 어쨌거나 어제 있었던 일을 전하는 상황이라면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선주는 거기서 그만두지 않고 제 본심을 드러냈다.
“서영이 정도면 네 짝으로도 아주 잘 어울렸을 텐데. 둘이 일찌감치 붙여줄 생각을 왜 못 했나 몰라. 그럼 너도 수준에 맞는 여자랑 결혼했을 테고.”
도훈이 다시 옮기려던 걸음을 멈추고 선주를 돌아보았다.
그냥 지나치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선주는 대놓고 은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수준에 맞는 여자라니. 그렇다면 은하는 수준에 맞지 않다는 건가.
게다가 서영을 붙여준다고 해서 자신이 무조건 오케이를 했을 거라는 자신감은 뭘까.
그러다 문득 아침에 봤던 한약과 함께 은하가 평창동에 들렀다고 한 말이 기억이 났다.
“설마, 은하 앞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뭐?”
“어제 은하가 여기 왔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런 말씀으로 제 아내 기를 죽였나 해서요.”
지금만큼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도훈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선주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걔가 뭐라고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자기가 느낀 자격지심을 그리 돌려 표현한 모양이구나.”
“자격지심이요?”
“어제 서영이와 직접 만났거든. 딱 봐도 외모면 외모, 지성이면 지성. 게다가 품위 있고 우아하고, 서영이는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데, 자신과 비교하고 한참을 모자란다 생각했겠지. 집안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
“하아.”
도훈은 인상을 찌푸렸다. 은하가 서영과 만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분위기가 어땠을지 짐작이 갔다.
그래서 어제 은하가 더 서운해했던 것일까.
저녁에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본가에 간다고 한 것을 의식하던 행동도 이제 이해가 됐다.
어제 서영이가 왜 본가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 상관없는 그녀를 빌미로 선주가 은하를 괴롭혔을 생각을 하니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만 솔직해지시죠, 어머니.”
“그게 무슨 말이냐?”
“서영이가 진짜 며느리였다면, 오히려 초조해서 잠도 못 주무셨을 거 아닙니까?”
“뭐야?”
“어머니가 좋게 볼 정도의 며느릿감이니 할아버지 마음에도 쏙 들었을 테고, 그럼 세훈이가 후계자 경쟁에서 밀릴까 걱정이 돼서 어디 잠이나 주무셨겠습니까?”
“…….”
선주는 주먹을 말아 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훈이 자신의 처지를 대놓고 업신여기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은하에게 잘하세요. 괜히 별것도 아닌 걸로 괴롭히지 마시고. 그동안은 어머니에 대한 예우로서 지켜만 봤지만, 이제 더는 그러지 않을 거니까.”
도훈이 불쾌한 감정을 실어 서늘하게 내뱉었다. 선전포고였다.
더 이상 제 결혼에 왈가불가하지 말고, 은하도 건드리지 말라고.
“그럼 제 말 잘 알아들으신 걸로 알고 가보겠습니다.”
도훈이 한 번 더 쐐기를 박고는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
“괘씸한 것!”
선주는 화가 나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도훈이 나간 현관을 노려보았다.
이토록 자존심이 상한 건 오랜만이었다.
그래서인지 더 오기가 생겨났다.
도훈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중이었다.
은하를 떼어놓기 위해 서영이를 갖다 붙이려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진짜 서영이와 결혼을 하도록 내버려둘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스캔들로 충분했다. 그걸로도 도훈의 여성 편력을 내세워 은하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하니까.
“두고 보자. 누가 이기나.”
선주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
그 시각, 세훈은 초조해하며 집무실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오늘 열린 계열사 임원진 회의에 자신만 빠진 것부터 영 못마땅했다.
도훈은 본사 직원에 본부장 직급, 자신은 계열사에 팀장 직급인 것도 짜증 나는데.
임원 회의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도훈과 달리 자신은 한 번도 부름을 받지 못하는 것이 점점 더 조바심을 내게 하는 중이었다.
“본부장님 지하에 도착하셨답니다. 5분 뒤면 올라오실 것 같습니다.”
“알았으니까 나가봐.”
게다가 도훈은 세훈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오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안 그래도 요즘 도훈이 하늘식품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 같아 영 찝찝하던 차였다. 그런데 갑자기 보자 하니 뭔가 알아냈나 싶어 긴장이 됐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게 여은하, 그 여자 때문이었다.
하루빨리 은하를 집에서 내쫓고 하늘식품과 연을 끊어야 두 발을 뻗고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려면 여은표부터 죽어줘야 하는데…….
그를 처리한다고 호언장담하던 장찬우는 아직 아무런 행동도 개시하지 않고 더 애를 태웠다.
찾아올 때마다 돈을 달라는 협박은 계속되고 있었다.
하여간 돈만 밝히는 양아치였기에 이 일이 끝나면 두 번 다시 협박하지 못하도록 다른 방도를 구할 생각이었다.
양아치를 처리할 더 큰 폭력 조직을 찾는다던가…….
그렇게 위험한 계획으로 세훈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흐르는 그때, 비서의 노크 소리와 함께 도훈과 영철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형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하실 말씀이 있으면 부르시지, 바쁘신데 여기까지 직접 오시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세훈이 능글맞게 웃으며 도훈을 환영했다. 하지만 도훈은 표정 변화 없이 바로 소파에 앉았다.
따라 들어온 영철은 도훈의 신호에 따라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인사하더니 다시 밖으로 나갔다.
세훈의 음흉한 눈길이 봉투에 닿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피차 서로 바쁜데 누가 오고가고가 중요한 건 아닐 테지. 네가 오라고 한다고 이유도 묻지 않고 바로 올 녀석도 아니고.”
“제가 언제 그렇게 깐깐하게 굴었다고 그러십니까? 형님이야말로 오시자마자 긴장하게 만드시니 벌써부터 무슨 말씀을 하실지 겁나는데요?”
세훈은 이 상황이 못내 긴장되면서도 결코 만만히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여유로운 척 미소로 대꾸했다.
하지만 그런 세훈의 속내는 도훈의 눈에는 다 보였다.
능력이 없어도 정직하고 열심히 하려고 한다면 어떻게든 구제해볼 방법이라도 있을 텐데.
도훈은 속으로 안타까워 혀를 찼다.
“이번 미국 출장에서 김진목 박사라는 분을 만났어. 저명한 식품공학 박사님이시지.”
“회사일로 바쁘셨던 걸로 아는데…… 그런 일정도 있는 줄은 몰랐네요.”
세훈은 도훈의 이야기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건성으로 들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세훈의 표정을 일그러뜨리기 충분했다.
“그런데 그 김 박사님이 하늘식품 여은표 대표와 죽마고우더군.”
“……그런 우연이 있었던가요?”
“그래.”
빤히 쳐다보는 도훈과 갑자기 튀어나온 하늘식품 이야기에 세훈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티 나지 않게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그런데 그게 왜요? 하늘식품이면 형님이 신경 쓰시면 되실 일이지, 저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요?”
“정말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건가?”
도훈의 차가운 눈빛에 세훈이 움찔했다. 도훈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봉투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늘식품에서 출시하려던 제품 정보야. 네가 만든 신제품 개발 기획 보고서는 기억하고 있을 테고. 한 번 비교해봐.”
“형님……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세훈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찬우는 분명 증거가 없다고 했는데 도훈이 기어이 그 증거를 찾아냈다는 것도 기가 막히고, 이 위기를 어떻게 빠져 나가야 하나 머리를 굴리느라 목이 다 탔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둘 중 하나는 도용을 했는데 그게 누구인지는 이제부터 파보면 알겠지?”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세훈에게 말했다.
“기회를 줄까 해. 네 입으로 직접 회장님께 보고하고 사죄를 할 기회.”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
“물론 형님 생각에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동안 별 볼 일 없던 제가 갑자기 히트 제품을 기획했으니 배가 아플 수도 있겠고요.”
“허……!”
“하지만 이 서류 하나만으로 제가 도용을 했다고 말할 순 없을 겁니다. 서류 진위 여부도 알아봐야 하고, 제가 신제품을 기획하기 전에 이 서류를 봤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세훈이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며 열심히 변명을 해댔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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