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예쁜아, 이리 온.”
“예쁜이?”
도훈이 놀라서 은하를 쳐다보았다. 은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몇 번 더 예쁜이를 불렀다.
그랬더니 정말로 화단 안쪽에서 검은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쪼르르 은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고양이는 은하가 들고 있는 사료와 물을 내려놓자 경계를 풀고 열심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은하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그제야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도훈 씨가 출장 가고 나서 이튿날인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정원에 이 녀석이 있더라고요. 나가라고 몇 번이나 문을 열어놔도 나가지 않기에…… 제가 밥을 주고 있어요.”
“…….”
하아.
도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뭐 하고 지냈나 했더니, 집에 들어온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며 돌보고 있을 줄이야.
고양이가 귀엽긴 했다. 게다가 은하를 보면서 몇 번이나 고양이를 떠올리기도 했으니, 도훈도 거부감이 있진 않았다.
하지만 키우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어떤 동물이든 키운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감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훈은 한 번도 고려하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길고양이면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닐 텐데…….
도훈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은하가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알아요. 저도 계속 키우기 어렵다는 거. 하지만 갈 데 없는 고양이를 그냥 내쫓을 순 없잖아요. 유기묘 보호소를 잘 찾아서 보낼까 하는데……. 그때까지만이라도 제가 키울 수 있을까요?”
은하의 눈빛이 너무 간절해서 도훈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와 똑 닮은 고양이를 안고 있는 모습은 너무 사랑스러워 조금 더 보고 싶기도 했다.
이 여자는 어쩌자고 자꾸만 제 일상을 흔들어 놓는지.
혼자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살면서 고려조차 해보지 않은 행동을 은하는 몇 번이나 하게 만들었다.
도훈은 결국 마지못해 허락하며 조건을 달았다.
“딱 그때까지만이야. 보호소든 어디든, 최대한 빨리 알아보고.”
“정말 허락하시는 거예요?”
은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기뻐하며 되물었다.
“당신 말대로 지금껏 밥 주고 돌봤는데 당장 거리로 내쫓을 순 없잖아.”
“고마워요.”
은하의 눈이 반달 모양이 되었다. 자신과 살면서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도훈의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녀의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도 있지만, 앞으로 해야 할 말 때문에 더 가슴이 시리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좋아?”
“그럼요.”
“곧 헤어져야 하는데, 정을 많이 주는 건 당신 손해야.”
“그렇긴 해도…… 예쁘잖아요.”
분명 나중에 후회할 텐데, 마음 아플 걸 알면서도 당장 제 감정에 충실하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우리 관계도…… 그럴 수 있을까?
도훈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분명 다른 문제였다.
아버지 은표의 목숨까지 걸린 일인데……. 만약 그가 잘못되거나 일이 나쁜 쪽으로 풀린다면 은하는 더욱 도훈과 엮인 걸 후회하게 될 것이다.
엮이면 엮일수록, 마음을 주면 줄수록 받을 상처의 깊이도 크기도 커질 텐데, 결국 그 상처는 은하를 잠식할지도 모른다.
결코 그렇게 만들 순 없었다.
도훈은 마지막까지 망설이고 번뇌하다 끝내 말을 내뱉었다.
“나도 할 말이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은하는 무슨 얘긴지도 모르고 해맑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정원에 내리쬐는 봄 햇살처럼 예쁜 미소였다.
“혹시, 이번 출장 때 내가 따로 연락을 안 해서 서운했나?”
도훈은 덤덤한 듯 물었지만 은하는 속내를 들킨 것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연히 그가 너무 보고 싶었고, 연락을 기다렸고, 지금 이렇게 볼 수 있어서 좋은데…….
그 감정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 이 관계에 독이 될지 득이 될지 알지 못해서였다.
“귀국 일정이 앞당겨진 것을 미리 알리지 않은 건, 같이 사는 사람 입장에서 기분이 나쁠 수 있겠지.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
“아, 네…….”
“하지만 그 이상의 감정은 우리 사이에 불필요하다고 생각해.”
도훈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
은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더없이 냉랭한 도훈의 말투 때문도 그랬지만, 그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알아들었기에.
자신에게 부부간의 예의, 그 이상은 바라지 말라는 뜻이었다.
결국 미역국과 해장국을 챙겨준 것도 예의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알고 있었으면서 속절없이 가슴이 미어지고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도훈 씨, 나는…….”
“그 점을 서로 확실히 했으면 해서. 우리의 관계도 명확했으면 하고.”
“…….”
“그럼 나가볼게.”
도훈은 그 길로 집 안으로 들어가 가방을 챙겨서는 출근을 했다.
은하는 허탈해져서 정원에 있는 벤치에 주저앉았다.
“바보처럼 너무 티를 내고 말았어.”
오늘 많이 들뜬 탓이었을까.
도훈에게 자신의 감정을 들켜버린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제 감정을 눈치채자마자 자신을 좋아하지 말라고 선을 긋는 도훈에게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감정을 멋대로 드러낸 건 명백히 자신의 실수였다.
***
도훈은 집을 나와 바로 회사로 향했다. 먼저 나온 영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에 고생하셨습니다.”
새벽부터 영철에게 미역국과 황태해장국을 부탁한 일이 미안하고 고마워서, 먼저 인사부터 건넨 도훈이었다.
“저야말로 미처 못 챙겨서 죄송합니다. 결혼하고 첫 생일을 그리 보내신 상황에 마음이 안 좋습니다. 본부장님이 한국에 계셨으면 데이트라도 하시고 기분 좋게 보내셨을 텐데. 하필 그때 출장이 잡히는 바람에…….”
영철은 이야기를 하다 아차 싶은지 말을 줄였다. 도훈의 표정이 너무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하긴, 도훈의 속도 말이 아닐 터였다.
도훈은 확실히 은하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다만 세훈의 일이 있다 보니 드러내서 표현도 못 하고 혼자 속앓이를 하는 듯했다.
지금껏 어떤 여자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했던 도훈인데, 겨우 사랑하게 된 여자와 하필 이런 상황에 놓이다니.
영철도 이 우연에 기가 막혔다.
“참, 본부장님. 김 박사님을 만나신 건 어떻게 되셨습니까?”
“예상대로 하늘식품 자료를 갖고 계시더군요.”
도훈은 이번 미국 출장에서 따로 시간을 내 은표의 죽마고우라는 김 박사를 만났다.
하늘식품의 기술력을 언급하는 기사를 보고 연락을 했더니, 최근까지 개발하다 중단된 신제품의 기술보고서를 갖고 있다고 했다.
미국에서 만나 확인한 보고서 속의 신제품은 지금 제일푸드에서 출시하는 대체육 신제품과 똑같았다.
“그럼 최세훈 팀장이 정말로 그런 짓을 저지른 거네요.”
“다만 김 박사님이 그 자료를 받은 시기가 최 팀장이 내부에 기획안을 올린 이후라서 정확한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그걸 가지고 끝까지 부인하겠죠.”
은표는 김 박사에게 검수를 부탁하며 하늘식품 내부 자료를 송부했다. 그러다 보니 보낸 날짜가 비교적 최근이었고, 세훈이 이미 내부에 기획안을 올린 이후였다.
물론 하늘식품 기술보고서는 그 훨씬 이전에 작성이 됐겠지만, 그걸 증명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단순히 이 기술보고서만 가지고 누가 누구를 베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마 제품 개발의 막바지에 찬우가 보고서를 빼돌렸고, 은표는 그것도 모른 채 마지막까지 검토를 마무리했을 것이다.
나중에 찬우의 짓을 알게 된 은표가 실랑이를 하다 극단으로 치달은 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하아…….”
영철도 이렇게 답답한데, 도훈은 오죽할까.
끝내 자백하지 않는다면 결국 증거 찾기 싸움이었다. 그렇다고 불법이 묻히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니까.
“일단은 기회를 줘보고자 합니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이 상황을 참기 위해 도훈은 주먹을 굳게 말아쥐고 읊조리듯 말했다.
“그것마저 거부하면 회생의 기회는 없는 거겠죠.”
지잉.
그때 정장 양복 안쪽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에서 짧은 진동음이 울렸다.
도훈이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죄송해요. 제가 선을 넘었어요. 앞으로는 주의할게요.]
은하의 메시지였다. 아침에 나눈 대화에 대한 나름의 결론인 모양이었다.
도훈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었건만 심란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마지막에 무너지던 은하의 표정을 잊으려고 노력 중이었는데.
은하가 지금껏 아침에 나눈 대화로 계속 고민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역시나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자신을 가지고 논 거냐고 화를 내도 할 말이 없는데…….
솔직히 은하에게 더 감정표현을 많이 한 사람은 도훈 자신이었다.
그렇게 물고 빨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선을 넘지 말라며 대놓고 타박했으니.
자신이 생각해도 계약관계일 뿐이라는 변명은 너무 초라하고 비겁했다.
그런데도 은하는 제 잘못으로 돌리고 그저 미안해하고 있었다.
상처받은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도훈의 가슴이 미어졌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도훈은 은하 생각을 접고 다음 일정을 위해 재킷을 챙겨 입으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
30분 뒤, 평창동.
도훈은 이학에게 미국에 다녀온 일부터 오전에 있었던 임원진 회의 내용을 보고했다.
이학은 요즘 사무실보다는 본가 집무실에 있을 때가 많아서 본가로 직접 찾아간 것이다.
“미국 일정을 당겨서 오느라 몸이 상한 게냐?”
이학은 보고하는 내내 표정이 안 좋은 도훈을 살피며 물었다.
“아닙니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런 게야.”
“죄송합니다.”
이학이 쯧,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리더에게는 포커페이스도 꼭 갖춰야 할 능력의 하나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속내를 바깥으로 내보이지 마라.”
아닌 척했지만 은하에게 냉정하게 말해놓고 도훈 역시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러다 보니 겉으로 티가 난 모양이었다.
도훈은 제 실수를 인정하고 바로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하늘식품 건은 어떻게 됐기에 왜 아무런 보고가 없어?”
“……조금 더 시일이 걸릴 것 같습니다. 여 대표가 아직 누워 있기도 하고요. 작은 문제가 있어서 알아보는 중입니다.”
세훈의 일을 이학에게 말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였다. 말을 하더라도 세훈과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훈은 적당히 둘러대며 시간을 벌었다.
“상황이 조심스러운 건 알지만, 그렇다고 시간을 너무 끌어서 좋을 것도 없지. 결정했으면 빨리 진행해.”
“네. 알겠습니다.”
“아직 후계자는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해라.”
도훈과 세훈은 능력이 다른 만큼 기대치도 달랐다. 그 점을 이학은 다시 한번 상기시킨 것이었다.
할 말이 끝나자 이학이 그만 나가보라며 손짓을 했다. 도훈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이학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도훈이 복잡한 심경을 짧은 한숨으로 대신하며 거실을 가로지를 때였다. 소파에 앉아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던 선주가 도훈을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었다.
“어제는 어떻게 된 거니?”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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