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찝찝했는지 씻는다고 옷을 입은 채로 스스로 당신 몸에 물을 뿌리더군.”
“헉.”
은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한밤중에 별짓을 다 했구나 싶었다.
그렇게 물을 뿌려댔으면 당연히 옷이 다 젖었을 터. 속옷까지 다 벗기는 게 이해가 됐다.
“죄송해요……. 제가 또 추태를 부렸네요.”
“추태까진 아니고.”
도훈이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추태라고 생각해 본 적 없으니까.
오히려 너무 미안하고 안쓰러워서 밤새 안아주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잘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위스키로 새벽까지 쓰린 속을 달랬다.
그런데 속이 부대꼈는지 자다 일어난 은하가 화장실로 달려가 몇 번이나 구토를 했다.
걱정되는 마음에 같이 욕실로 들어가 등을 토닥여줬더니 이번에는 씻겠다고 난리를 쳤다.
물줄기에 옷이 다 젖어버려 어쩔 수 없이 옷을 벗겨줄 때…….
그때부터 도훈은 시험에 들어버렸다.
옷을 벗기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닿는 그녀의 살결, 그 감촉이 너무 좋아서 몇 번이나 흥분을 가라앉혀야 했다.
게다가 은하는 술을 마셔서 그런지 몸의 반응에 솔직했다. 도훈의 손이 닿을 때마다 야한 소리를 흘리는데, 정말 터져버릴 것처럼 욕정이 차올라서 힘들었다.
그런 위험한 순간을 몇 번이나 버텨내고 나니 아침이었다.
은하를 향한 괴로운 감정만 아니라면 그녀가 술에 취했든 아니든, 밤새 몇 번이고 그녀를 안았을 것이다.
도훈은 다시 생각해도 아래로 피가 몰리는 기분이라 얼른 고개를 저었다.
“씻고 나와. 아침 먹지.”
도훈이 은하를 남겨두고 부엌으로 나갔다.
“미쳤어, 여은하! 도대체 왜 그런 거야…….”
은하는 창피함에 이불 속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후회해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럴 땐 철판을 까는 수밖에 없었다.
심호흡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부랴부랴 씻고 나오니 식탁 위에 간단한 밥과 국, 반찬 몇 가지가 놓여 있었다.
설마 이걸 도훈이 직접 차린 걸까.
은하는 믿기지가 않아서 몇 번이나 그와 식탁을 번갈아 보았다.
“도훈 씨…… 이게 다…… 뭐예요?”
“황태해장국이야. 어제 술 많이 마셨으니까 속 풀라고.”
은하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도훈을 보았다. 정말로 그가 차린 모양이었다.
술을 마시고 추태를 부린 것도 민망한데, 해장국까지 받아먹자니 영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데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또 다른 국을 한 그릇 가져다가 은하 앞에 놓았다.
그걸 보는 순간, 은하의 눈이 놀라서 동그랗게 떠졌다.
“어제 생일이었다며?”
도훈이 은하 앞에 놓은 것은 미역국이었다.
은하가 할 말을 잃고 도훈을 바라보다 한참 만에야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생일을 챙겨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솔직히 너무 감동이었다.
“어제 그 난리를 쳤는데, 모를 리가.”
“…….”
어제 또 무슨 난리를 쳤다는 걸까.
은하는 생각나지 않는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인상을 찌푸렸지만 소용없었다.
“늦은 생일은 챙기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그냥 넘어가는 것보다 차려주면 좋아한다기에.”
도훈은 어제 베이커리 사장이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겨주었다.
처음에는 도훈도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래도 명색이 생일인데, 이 정도는 챙겨줘도 괜찮지 않을까.
도훈은 그렇게 또다시 마음을 감추고 선을 긋겠다던 자신과 타협을 하고 말았다.
“직접 하신 거예요?”
“박 실장님에게 부탁했어. 당장 재료도 없었으니까.”
“아…… 네.”
애초에 직접 만드는 것이 꼭 중요한 건 아니었다. 어쨌거나 국을 사와서 상을 차리는 것도 다 일이었고,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심지어 음식은 은하 앞에만 차려져 있었다. 그는 평소 습관대로 아침은 아무것도 먹지 않을 모양이었다.
은하가 차렸다면 도훈에게 같이 먹자고 했을 텐데, 늦게 일어나서 도훈이 차려준 밥을 얻어먹으려니 민망했다.
그래도 맛있게 먹는 게 도훈에게 예의라는 걸 알기에 은하는 야무지게 수저를 들었다.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은하는 먼저 국물부터 떠먹었다. 맛도 맛이지만 정말로 속이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맛있어요.”
“당연하지. 새벽같이 30년 전통 맛집에 들러 사다 준 건데.”
도훈의 진지한 대꾸에 은하는 그만 슬쩍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러다 문득 출근 시간에 늦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나서 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출근 안 하세요?”
평일에는 늘 새벽같이 출근하는 도훈이었기에 아침나절까지 집에 있는 그가 어색했다.
“조금 늦게 갈 거라고 말했어.”
“아…….”
은하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어제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렇게 서운하더니, 오늘은 또 그의 행동이 죄다 마음에 들었다.
회사까지 늦게 간다고 하고 자신의 밥을 차려줬다고 생각하면 더 감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어떻게 자신을 데리러 온 거지?
본가로 가는 스케줄로 알고 있었고, 거기서 서영을 만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분이 그렇게 나빴던 건데.
“어제저녁에는 본가에 가시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취소했어.”
“네? 아, 네…….”
은하는 혹시나 싶어서 조심스레 물었는데 도훈의 대답은 간결했다. 더 묻기가 뭐할 정도로.
설마 나 때문은 아니겠지?
그래, 그럴 리는 없겠지.
어쨌든 본가에 가지 않고 저를 만나러 왔다는 얘기에 은하는 괜히 더 들뜨는 기분이었다.
“설마, 아직도 본가에 불려 다니는 건가?”
하지만 도훈은 은하가 아직도 선주에게 불려 다니는 건가 싶어서 심기가 불편했다.
미국 출장을 가는 날, 일부러 은하를 데리고 본가로 가서 밥을 먹은 건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는 선전포고 같은 거였다.
은하는 간섭하지 말라고 했지만 도훈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있을 때도 그리 부려먹을 정도라면, 자신이 출장 가는 동안에는 얼마나 더 괴롭힐지 안 봐도 뻔하니까.
작은 방패막이라도 해줄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그래서 일부러 임신 얘기까지 꺼낸 것이었다.
선주같이 눈치 빠른 사람이 못 알아챌 리 없을 텐데.
게다가 이학도 은하에게 스트레스 주지 말라고 거들어주지 않았던가.
“아니에요. 어제 한약을 받으러 갔다가 우연히 들었어요. 그때 할아버님이 지어주라고 하신 한약이요.”
“……그랬군.”
은하는 한약 이야기를 하면서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임신이 잘되라고 먹는 한약이니까 괜히 좀 그랬다.
하지만 도훈은 그녀가 본가에 불려 다니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하는 도훈을 괜히 걱정하게 만든 것 같아 민망하면서도, 기분 좋게 황태국과 미역국을 다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은하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던 도훈은 제법 놀랐다. 은하가 밥 한 그릇과 국 두 그릇을 뚝딱 비우는 모습이 낯설어서였다.
“너무 맛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원래 잘 먹을 땐 잘 먹어요.”
은하는 그의 표정을 보고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많이 먹었나 싶어 얼른 변명을 달았다.
도훈은 그 모습조차 귀여워서 픽 웃고 말았다.
“그러네.”
처음에는 불편해서 같이 밥도 먹기 싫어하더니…….
어느새 은하의 마음도 많이 열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현실을 자각한 도훈이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그녀가 더 마음을 주기 전에, 여기서 끝내야 했다. 그래야 그녀가 덜 힘들 테니까.
이제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사실 도훈은 은하에게 그 얘기를 하려고 오전 시간을 비운 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계약관계 이상의 감정이 생기길 바라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지난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을 때, 은하가 자신을 원망하는 건 괜찮았다. 하지만 그녀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제발 그녀의 마음이 내 것보다 크지 않기를.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떼려는 순간, 식탁 뒷정리를 마친 은하가 먼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참…… 저 한 가지 양해를 구할 게 있어요.”
“말해.”
“그게…….”
“뭔데?”
은하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자 도훈이 의아해하며 그녀를 보았다.
잠시 후 은하는 결심했다는 듯 웃으면서 도훈에게 제의했다.
“정원에 나가서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정원?”
“네. 이제 완연한 봄이잖아요. 날씨도 너무 좋고.”
도훈은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얘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들어줄 수 있는 건 다 들어줄 참이었다.
아직까지는 그녀의 밝은 기분을 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제 얘기를 하고 나면 그녀의 기분은 가라앉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래.”
도훈의 수락에 은하는 환한 미소를 짓더니 접시에 물과 함께 뭔가를 담아 앞장서서 걸었다.
도훈은 그녀를 따라 정원으로 나섰다.
언제 봄이 오나 싶었는데, 이제는 바람이 따뜻하다 못해 훈훈했다.
하긴 이제 곧 5월이니까.
도훈도 오랜만에 정원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기는데, 은하가 화단 한쪽에 쪼그리고 앉았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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