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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도 없이 결혼-40화 (40/72)

40화.

사실 은표도 은표지만, 혹시나 도훈이 없는 사이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은하를 혼자 둘 수가 없었다.

며칠 전 영철의 보고를 듣고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다.

은하가 찬우의 전화번호를 물어봤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혹시나 세훈과 찬우의 계략을 눈치를 챈 건 아닐까 걱정했다. 생각지도 않게 알아버리면 그 충격이 더 클 테니까.

그런데 단순히 번호만 물어봤다는 것이 이상했다. 아니면 찬우를 따로 만나 경고라도 하려는 걸까.

어쨌거나 영철은 은하에게 찬우의 번호를 알려줄 수밖에 없었고,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다만 찬우는 번호를 수시로 바꾸고 대포폰을 사용할 때도 많았기에 그 번호가 찬우와 바로 연결될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영철은 그나마 최근에 바뀐 번호 중에 추적이 가능한 번호를 알려줬다고 했다.

아직까진 별다른 정황이 생기진 않았지만, 도훈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적어도 그녀 옆에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만큼 은하에 대한 사랑이 크다는 것을 도훈도 이번에 오래 떨어져 있으면서 느끼게 됐다.

하지만 이렇게 좋아해도 그녀에게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사건의 진상이 은하에게 알려졌을 때 그녀가 받을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테고, 어쩌면 도훈에 대한 배신감도 엄청날 테니까.

차라리 자신이 은하에게 냉정하게 하는 것이, 앞으로 은하가 덜 상처받는 길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돌아온 귀국길이었는데…….

도훈은 은하의 전화에 반가우면서도 착잡한 심정으로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동창 모임에 와달라니, 황당하면서도 너무 엉뚱해서 귀엽다고 해야 하나.

처음에는 당연히 박 실장을 보낼까 했었다. 당장 이학과의 약속이 잡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달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운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으니까.

미국에서 한 번도 연락하지 않은 데다 귀국일도 알리지 않았으니 서운할 만했다.

나름 그녀에게 냉정하게 대하려 노력한 거였는데, 막상 은하가 상처받은 티를 내자 절로 안절부절못하고 당황했다.

겨우 그 정도로 나약해지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래도 오늘은 은하가 술에 취했으니까 조금은 챙겨도 괜찮지 않을까.

도훈은 결국 그런 마음으로 이학과의 약속을 깨고, 본가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은하에게 왔다.

“어, 저기…… 잠깐만 세워주세요.”

“어?”

“저기요, 저기 앞에!”

술기운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은하가 갑자기 화색을 띠며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은하가 가리킨 곳은 한 베이커리 매장이었다.

“저긴 왜?”

“오늘이 가기 전에 꼭 사야 할 게 있거든요. 빨리요. 빨리 세워주세요.”

술기운 때문인지 은하는 평소보다 기분이 두 배는 들떠 보였다.

도훈은 할 수 없이 베이커리 앞에 차를 세웠다.

지금 은하의 상태로는 혼자 걸어가기도 힘들 것 같은데, 뭘 사겠다는 건지.

“뭔데? 내가 사올게.”

“아뇨. 제가 살 거예요.”

보다 못한 도훈이 말했지만 은하는 강경했다.

차가 멈추자 은하는 벨트를 풀고 신나서 차에서 내렸다.

그 모습이 너무 위태해서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도훈이 따라 내려서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다.

“저 괜찮다니까요. 오늘 가기 전에 꼭 살 거예요.”

그러나 은하는 도훈의 팔을 뿌리치고, 그대로 매장으로 들어섰다.

도대체 무엇을 사려고 이렇게 집착하는 걸까.

혹시 술을 먹으면 꼭 먹는 빵 같은 게 있는 걸까.

도훈은 궁금증을 안고 은하 뒤를 따라 매장으로 들어섰다.

은하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베이커리 매장을 한 바퀴 돌더니 케이크 진열장 앞에서 멈췄다. 그러고는 케이크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주인에게 말했다.

“아저씨, 이걸로 주세요. 그리고 이것도 주시고요. 이것도.”

확실히 술에 취하면 케이크를 먹는 주사가 있는 모양이었다.

케이크에 한이라도 맺힌 듯 은하는 한 번에 케이크를 몇 개나 주문했다.

주인은 당황하면서도 신나서 케이크를 포장했다.

“초는 몇 개 드릴까요?”

“스물다섯 개요. 제가 오늘 스물다섯 살이 됐거든요.”

은하가 하는 양을 뒤에서 대수롭지 않게 지켜보고 있던 도훈이 그 말을 듣고 그대로 행동을 멈췄다.

설마 오늘이…… 생일인 건가?

생각지도 못했기에 도훈의 이마에 살포시 주름이 잡혔다.

다른 건 몰라도 생일은 챙겼어야 했는데…….

오늘 하루 그녀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짐작하니 속이 쓰려왔다.

“근데 같이 축하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기분 나쁜 일만 생기고.”

“저런……!”

사장이 케이크를 포장하면서도 안타깝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미역국도 못 먹고, 생일 선물도 못 받고. 심지어 같이 축하할 사람도 없고. 오늘 완전 우울했는데, 그래도 오늘이 가기 전에 케이크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아요.”

은하는 정말 신난다는 듯 웃으면서 발까지 동동 굴렀다.

뒤에서 듣고 있는 도훈의 얼굴은 점점 더 흙빛으로 변해갔다.

미안해서 은하를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아니, 뒤에 남자친구분은 뭐 하시고? 나쁜 분이네.”

“남자친구 아니고 남편이에요. 그리고 나쁜 사람 아니고 오늘 출장 갔다 왔어요.”

은하는 그 와중에도 도훈을 감싸는 중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축하하면 되겠네요. 생일 축하드립니다.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은하는 케이크 상자를 양손에 들고, 품에도 받아 안고 그렇게 밖으로 나갔다. 계산하는 것도 까먹은 것 같았다.

도훈이 불안해하며 쫓아가려고 하자, 사장이 놀라서 도훈을 저지했다.

“남편분, 계산해주셔야죠?”

“아, 이걸로 해주세요.”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도훈이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은하를 좇았다.

“내일 미역국 꼭 끓여주세요.”

“네?”

“우리 와이프 보니까, 당일엔 잊고 넘어갔어도 다음 날이라도 챙겨주면 좋아하더라고요.”

“아…….”

“저렇게 예쁘고 귀여운 아내분을 속상하게 하면 안 되지. 자, 계산 다 됐습니다.”

사장은 카드를 시원스레 긁더니 도훈에게 내밀었다. 도훈이 심란한 표정으로 카드를 받으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도훈이 차에 돌아와 보니 은하는 케이크를 안고 잠이 들어 있었다.

상자가 세 개나 되는 데다 제법 커서 얼굴까지 다 가리는 중이었다.

오늘 안에 케이크를 먹겠다며 좋아하더니. 끝내는 못 먹고 잠이 든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안 좋았다.

도훈은 차를 출발시키기 전에, 전화부터 걸었다.

-네, 본부장님.

영철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혹시 오늘이 은하 생일인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네? 아…… 잠시만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영철이 안타까운 음성으로 말했다.

-생일이 맞으시네요. 제가 챙겼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쉬세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생일 축하 전화 정도는 해줬을 텐데.

아니지, 그게 무슨 소용인가.

오히려 은하가 이렇게 자신에게 실망해서 마음을 접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런 상황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듯 아프지만, 그건 도훈의 몫이었다.

무거운 한숨을 쉰 도훈은 은하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운전을 시작했다.

***

“으…… 머리야.”

잠에서 깬 은하는 깨질 듯 아파 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냈다.

눈을 뜨니 사방이 환했고 자신이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어젯밤 기억이 전혀 나질 않았으니, 지금 누워 있는 곳이 그나마 집이라는 것에 안도해야 했다.

그렇게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몸을 뒤척이던 은하가 다시 눈을 반짝 떴다.

피부에 와닿는 이불의 감촉이 너무 좋다 싶더니 자신이 알몸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집으로 들어왔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알몸이라니.

게다가 이 기시감은 뭐지?

지난번 호텔에서도 알몸으로 자고 있다가 도훈과 맞닥뜨렸던 일이 겹쳐 떠올랐다.

은하는 얼른 일어나 앉아 뒤죽박죽된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어젯밤 도훈이 동창회 모임에 자신을 데리러 왔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괜히 울적해서 술을 더 마신 것도.

문제는 그다음 기억이 전혀 없었다.

도훈이 자신을 데려다 눕혔을 것까지는 예상이 되는데, 또 옷이 벗겨져 있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번에도 옷이 불편해 보여서 다 벗긴 걸까?

그래도 속옷까지 다 벗길 이유는 없지 않나?

전혀 기억이 없으니 은하는 울고만 싶었다.

그때 문을 열고 도훈이 들어왔다. 은하는 놀라서 알몸을 감추며 얼른 일어나 앉았다.

“일어났어?”

“네…….”

어젯밤에는 술에 취해서 갑자기 등장한 도훈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맨정신으로 다시 보니 못 본 사이 도훈은 눈빛이 더 깊어지고, 얼굴도 더 유려해진 듯했다.

그래봤자 열흘도 안 되는 시간이라 외모가 크게 바뀌었을 리 없는데도, 은하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그를 그리워해서였을까.

오랜만에 보는 그의 얼굴에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지.

은하는 넘치는 제 감정을 추스르느라 잠시 숨을 골랐다.

“저…… 혹시 어제 실수한 건 없나요?”

술버릇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어제는 기분이 별로였기 때문에 혹시나 술주정을 한 건 아닐까 은하는 걱정스러웠다.

이상한 소리를 하거나, 옷을 벗고 추태를 부렸을 수도 있으니까.

생각만 해도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별것 아니긴 한데, 자다가 일어나서 토했어.”

“네?”

“그래서 옷을 다 버렸고.”

“아…….”

은하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얼마나 지저분하고 보기 흉했을까.

생각만 해도 부끄러워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문제가 또 있다고?

은하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도훈을 보았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주소|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역로3길 40-36 B동 710호 (신내동)

전화|02)906-7768 / 팩스|02)906-7769

값 100원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와이엠북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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