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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도 없이 결혼-39화 (39/72)

39화.

맥주를 마시긴 했지만 아직은 취하지 않았기에 목소리에 티가 나지도 않을 것이고,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다.

“아뇨. 안 마셨어요.”

-위치 찍어.

“네?”

-박 실장이라도 보내지. 밤늦게 택시 타는 거 위험하니까.

도훈은 은하의 귀가를 걱정하는 중이었다.

누가 그런 걱정을 해달랬나.

그리고 지금 은하가 와달라고 부탁한 건 도훈이었다. 박 실장이 아니라.

“괜찮아요. 집에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래도 찍어.

다소 강경한 목소리에 은하는 할 수 없이 대답했다.

“알았어요.”

-술은 많이 안 마셨으면 좋겠군.

은하가 고집부리지 않고 위치를 찍겠다고 하자, 도훈의 목소리도 다시 누그러졌다.

도훈은 은하가 술을 마시나 안 마시나가 궁금한 듯했지만 은하는 다른 게 궁금했다.

“그런데 오늘 집에 들어오시나요?”

한국에 왔으니 집에 오는 게 당연하겠지만, 또 모를 일 아닌가.

지금까지 연락이 없었으니 들어오지 않을지도.

아니면 들어오지 않으려고 연락을 하지 않은 건가.

암튼 확실히 하고 싶었다. 괜히 혼자서 그를 기다리는 건 싫으니까.

-당연히…… 들어가.

“알겠습니다. 이따 뵐게요.”

은하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길어지면 자꾸만 미련이 남을 것 같아서였다.

어쨌거나 속은 후련했다.

은하는 도훈이 아닌 영철에게 주소를 찍어주고, 친구들에게 돌아왔다.

“많이 바쁘다네. 아쉽다고 전해달래.”

은하가 조금 살을 붙여서 얘기했다. 희경은 끝까지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댔다.

“실망이네. 보통 남자들이 자기 여자 기 세운다고 더 나온다고 하던데.”

“그거야 보통 남자들이나 그렇고. 은하 남편은 워낙 바쁘고 유명한 사람이잖아. 우리가 만나는 것만으로도 영광인 남자. 그러니까 그만 은하 괴롭히고 술이나 마시자.”

이번에도 미나가 나서서 수습했고, 친구들은 다시 은하에게서 관심이 멀어졌다.

***

“은하야, 그만 마셔. 많이 마셨어.”

도훈과 통화를 끝내고 들어와 혼자서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어느새 주량을 넘긴 모양이었다.

은하의 볼이 취기로 발그레한 걸 보자 미나가 걱정스레 챙겼다.

“나 안 취했어. 맥주만 조금 마신 건데, 뭐.”

사실이었다. 어째 마셔도 마셔도 정신이 더 멀쩡한 것 같았다.

은하가 빙긋 웃으면서 다시 잔을 들 때였다.

“술은 많이 마시지 말라고 했을 텐데.”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좋게 귀에 감기는 목소리.

최근 들어 나의 기분을 들었다 놨다 하는 남자. 최도훈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 남자가 여기에 올 리가 없지 않은가.

은하는 잘못 들었나 싶어 무시하고 다시 잔을 들어 입술로 가져갔다.

“어머.”

“완전 대박이야.”

“바쁘다더니 뭐야, 서프라이즈야?”

그런데 친구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제 손에 들고 있던 잔이 순식간에 하늘 높이 올려졌다.

은하는 그제야 잔이 올라간 쪽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정말로 도훈이 서 있었다.

키도 커서 한참을 올려다봐야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정말로 도훈이 맞았다.

“그만 마셔.”

도훈은 침착하게 은하의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옆자리에 앉았다. 은하가 당황하여 도훈을 보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바쁘시다고…….”

“이렇게 취해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친구분들이 기다리신다고 하니까.”

도훈의 말에 친구들이 감격하며 자지러진 건 당연한 얘기였다.

“반갑습니다. 최도훈입니다.”

도훈이 자기소개를 하자 모두 그의 앞으로 모였다.

여자친구들은 도훈의 잘난 외모와 명품 의상에 입이 떡 벌어졌고, 남자친구들은 그의 카리스마에 압도된 상태였다.

도훈 역시 그들을 훑어보며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들까지 같이 있는 걸 보니 오길 잘했다 싶었다.

“은하랑은 어떻게 만났어요?”

“바로 결혼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던가요?”

“은하 어떤 점이 좋았어요?”

친구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도훈에게 질문 공세를 이어갔다.

은하는 취기가 올라오는데도 친구들이 도훈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게 난감해서 손사래를 치며 친구들을 만류했다.

“이 사람 바쁜데 나 데리러 온 거야. 그런 질문은 나중에…….”

“아냐. 궁금하실 텐데, 짧게 말씀드리고 가지.”

은하는 불안하고 당황스러운데 도훈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친구들은 이미 도훈에게 빠져든 모습이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처음 만났고, 첫눈에 특별한 인연이 될 여자구나 느꼈습니다. 나중에 은하 씨가 저를 떠났을 땐 흔적이라도 찾으려고 라스베이거스를 미친 듯이 뒤지기도 했고요.”

“어머……!”

“그러다 다시 만났을 땐 당연히 결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은하 씨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 되어버렸거든요.”

도훈이 마치 제 마음을 고백하듯 은하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은하는 그의 말이 거짓인 걸 알면서도 뛰는 심장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술을 마셔서일 수도 있고, 그의 말이 그들의 실제 상황과 묘하게 섞여 있어서 더 그랬다.

특히 라스베이거스에서 자신을 찾아다닌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으니까.

왜 자꾸 이런 말로 자신을 흔들어놓는 건지.

그런데 그런 도훈의 말에 가슴이 설레는 건 그녀뿐만은 아닌 듯했다.

“캭!! 너무 멋있어요.”

“은하야, 너 완전 좋겠다.”

친구들이 더 난리였다. 도훈같이 멋있는 남자가 남편이라는 것도 부러운데 연애도 낭만적으로 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은하는 속이 타서 맥주만 벌컥벌컥 마셔댔다.

도훈이 눈치채고 만류하려 했을 땐 이미 늦어버렸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맥주를 어느새 다 마신 은하는 이제 확실히 취기가 올라온 모습이었다.

도훈이 눈살을 찌푸린 뒤 할 수 없이 분위기를 수습했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지만, 보다시피 이 사람이 제법 취해서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도훈이 얘기하는 틈을 타 또다시 맥주를 입으로 가져가던 은하는 뜨끔하여 도훈을 보았다.

딸꾹.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딸꾹질도 절로 나왔다.

“조금 더 마시다 가도 되는데요. 저 아직 안 취했어요.”

“그만 일어나지?”

“아, 네…….”

도훈의 강경한 한마디에 은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정리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도훈에게 서운하고 미웠는데 술이 취해서 기분이 좋으니 그런 생각도 싹 사라졌다.

“벌써 가시게요?”

“아쉬워요.”

“대신 오늘 술값은 제가 내죠. 편하게 즐기세요.”

도훈이 통 큰 선언을 하자 친구들의 환호성은 아까보다 더 커졌다.

도훈은 그 자리에서 바로 영철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얘기하고 결제를 부탁했다.

“오늘 와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은하 체면이 섰네요. 결혼했다고 하니 친구들이 짓궂게 굴어서…….”

미나가 끝까지 은하를 챙기며 도훈에게 상황설명을 했다.

도훈도 그 정도는 눈치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은하가 그런 연락을 하지 않을 테니까.

물론 취해서 자꾸만 배시시 웃고 있는 모습은 눈에 거슬리지만.

“은하야, 조심히 가.”

“그래. 나중에 연락할게.”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또 뵙겠습니다.”

도훈은 미나에게 친절하게 대꾸하며 은하를 데리고 술집을 빠져나왔다.

“혼자 걸을 수 있겠어? 아니면 이번에도 안고 가?”

“아뇨. 저 하나도 안 취했다니까요.”

“이제는 거짓말까지 하는군. 어쨌든 가지.”

이번에는 급할 건 없었다. 옷도 정상적인 옷이었고.

다만 주변 남자들이 은하를 힐끔대는 게 기분이 나쁠 뿐.

여드레 만이었다.

그동안 생각나는 마음을 애써 꾹꾹 눌러 담았는데, 오자마자 술 취한 모습부터 보게 될 줄이야.

은하는 잘 걷는 듯하다가도 한 번씩 삐끗거렸다.

도훈이 그녀의 허리를 받쳐 부축했다.

그리고 이 순간, 영철이 아닌 자신이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어느 남자든 은하에게 손대는 건 싫으니까.

은하를 겨우 보조석에 태우고 도훈도 운전석에 앉았다.

“오실 줄 몰랐는데……. 깜짝 놀랐어요.”

은하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더니 드디어 이유를 알아냈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도훈을 보았다.

“아……! 박 실장님이 바쁘셨나봐요. 혼자 갈 수 있는데, 번거롭게 해드렸네요……. 죄송합니다.”

은하는 그대로 꾸벅 인사를 하더니 제대로 고개를 드는 데도 한참이었다.

그 모습이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고 웃긴지 자꾸만 배시시 웃었다. 사람 환장하게.

“다행히 시간을 비울 수 있었어.”

차라리 안 보는 게 상책인 것 같아서 도훈은 짧게 대꾸하고는 운전에 집중했다.

아까 은하의 전화를 받았을 때.

오전 비행기로 한국에 도착한 도훈은 바로 회사에 들러 일하다, 저녁 시간에 맞추어 이학에게 출장 보고를 하기 위해 본가로 가던 중이었다.

며칠 전, 미국 출장을 떠나며 도훈은 혹시 하는 마음으로 VIP 병동에 경호원들을 배치시켰다.

영철을 통해 조사 중이긴 했지만 하늘식품의 핵심기술 문제와 은표의 뺑소니 사건, 둘 다 꼬리를 잡기 어려웠다.

이토록 증거를 완벽히 은폐했다면, 증인까지 없애려 할 가능성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돈으로 매수하면 그만이었지만, 은표는 매수가 불가능한 피해 당사자이자 가장 중요한 증인이었다.

은표가 이대로 죽는다면 상관없겠지만, 만약 살아난다면 그들에게 위협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만약 세훈과 찬우가 이 일과 관련돼 있다면, 분명 은표에게 접근해 무슨 짓이든 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찬우가 병원에 나타나 행패를 부렸다는 얘기를 듣고 도훈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찬우의 난동은 도훈의 판단에 확신을 심어줬다.

미국에서 급하게 돌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회사 일을 빨리 끝내야 찬우 일을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주소|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역로3길 40-36 B동 710호 (신내동)

전화|02)906-7768 / 팩스|02)906-7769

값 100원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와이엠북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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