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은하가 알기로 도훈은 이틀 뒤에나 한국에 돌아오는 일정이었기에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넌 왜 그러고 섰어? 뭐, 할 말이라도 있는 거니?”
“……아니에요.”
은하가 부엌으로 들어가다 말고 제 얘기를 듣고 서 있자 선주가 타박했다. 은하는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정말로 오늘 도훈이 한국에 오는 걸까.’
선주에게 물어보고 싶어도 괜히 책잡힐까 싶어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도훈에게 직접 연락하는 것도 아직은 어려웠다.
그나마 물어볼 만한 사람은 영철인데…….
어쨌거나 상황을 전혀 모르니 무턱대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은하는 복잡한 머리를 털며 부엌에 들어섰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은하의 손을 휙 잡아당겼다.
“헉.”
“쉿.”
은하가 놀라서 돌아보니 하리였다. 하리는 자신을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은하는 거실에 앉아 있는 선주가 신경 쓰였지만 조심스럽게 하리를 따라갔다.
하리는 1층 복도 끝에 있는 서재로 들어갔다.
“여기 막 함부로 와도 돼요?”
지난번 별채 사건도 있고, 이 집에서는 모든 게 조심스러웠기에 은하가 하리를 보며 물었다.
“여기는 아버님 서재라서 괜찮아요. 아버님은 화가 많은 분은 아니라서.”
하긴, 일준은 여성 편력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소에도 별말이 없고 성격도 차분한 편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형님.”
하리는 아주 중요한 할 말이 있다는 듯 은하에게 바짝 다가와서 목소리를 낮췄다.
“어머님이 일부러 저 여자 올 때 맞춰서 형님을 불렀어요.”
“네?”
“한약은 핑계고, 어머님이 저 여자 보여주려고 형님을 일부러 부른 거라고요.”
“아니 그게 무슨…….”
은하는 하리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해 눈을 끔벅였다.
“참 이렇게 답답해서야. 형님이 잘못하면 저 여자로 바로 갈아탄다는 뜻이죠. 형님 이혼시키고 저 여자랑 결혼시키겠다고, 형님 협박하는 거라고요.”
“네?”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온 엘리트에다가, 집안이 엄청 좋아요. 장관도 여러 명 배출하고 대대로 교육자 집안이라 할아버님이 엄청 좋아하셨거든요.”
“아…….”
“아마 할아버님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서영 씨라면, 어머님 편에 서서 형님 이혼 찬성할 수도 있어요.”
은하는 황당해서 말이 다 나오지 않았다.
선주가 서영과 나누는 얘기들이 당연히 선을 넘었고 은하로서도 충분히 기분이 나빴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자신에게 가진 불만을 그런 식으로 보여주는 거라고만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혼이라니.
“설마요…….”
“설마가 사람을 잡죠, 형님. 아니면, 하필 저 여자 올 때 형님을 부른 이유가 뭐겠어요? 그것도 시간 맞춰서.”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랬다. 은하는 그저 우연히 약속이 겹쳤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약 선주가 일부러 그 시간에 맞춰 부른 거라면 은하에게 보여주기 위해 한 행동이 맞았다.
“저 여자도 보니까, 지금도 아주버님 좋다고 어머님께 계속 어필하던데. 암튼 제가 다 답답해서 형님한테 알려드리는 거예요.”
“…….”
“아주버님 사랑이 아무리 특별해도, 이곳 역시 변수가 많은 곳이니까 형님 마음 단단히 먹으시라고요.”
하리는 은하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조심스레 서재 문을 열고 나갔다.
은하는 뒤따라 나갈 생각을 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
집에 와서도 은하는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리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더 복잡했다.
선주는 은하가 시댁을 나올 때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정확한 속내는 모르겠지만 은하를 향한 무언의 협박임은 확실했다.
선주에게 찍히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혼 이야기가 나오는 건 다른 문제였다.
자신의 행동으로 도훈을 곤란하게 만들면 안 되니까.
‘쉽진 않을 거야. 뭐든 꼬투리라도 잡으려고 갖은 수를 쓰기도 하니까.’
결혼 전, 만만치 않은 집안이라는 도훈의 경고처럼 정말 쉽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 결혼을 유지하려면 선주에게 납작 엎드려서 살아야 하는 걸까.
안 그래도 도훈에게도 서운한 감정이 쌓여 있던 은하는 선주 일까지 겪으니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본가에서 나오기 전, 은하는 혹시나 해서 하리에게 조심스레 도훈의 스케줄을 물어보았다. 선주가 알고 있다면 그녀도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하리는 의아해하면서도 아는 대로 말해주었다.
‘사정은 저도 잘 모르겠지만 오늘 일찍 귀국해서 본가에 들른다는 건 저도 들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은하는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그동안 한 번도 연락이 없었던 도훈은 마지막까지도 자신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은하는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었다. 일정 공유라도 해주지.
그런 것도 바라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서운해하지 말자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이래저래 최악의 생일이었다.
***
호프집에 들어서자 미나가 은하를 알아보고 이름을 불렀다.
“은하야, 여기!”
“어, 미나야.”
은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나에게 다가갔다.
중학교 동창 모임에 나온 것은 순전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어차피 도훈은 본가에 들른다고 했으니 늦을 터.
혼자서 저녁을 먹으려는데 너무 우울했다.
그때 마침 미나에게 다시 연락이 왔고, 은하는 충동적으로 나오겠노라고 약속을 한 것이다.
“여은하. 오랜만이다. 결혼했다더니, 더 예뻐졌는데?”
“고마워.”
순수했던 시절의 친구들이라서 그랬을까. 은하도 막상 나오니 기분전환이 되고 좋았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은하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축하하는 것 이상의 관심은 보이지 않았다.
그게 참 다행이었다.
뒤늦게 나타난 딱 한 여자애만 빼고.
중학교 때 은하에게 늘 라이벌 의식을 가지던 희경이였다.
“너, 대단한 데 시집갔다며? 게다가 남편이 연예인 못지않게 유명하고 잘생겼다던데, 맞아?”
“어? 어…… 뭐…….”
친구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게 싫어서 은하는 대충 얼버무리고 그녀와의 논쟁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희경은 중학교 때나 지금이나 집요했다.
“그럼 실물 한번 보자. 불러봐.”
“뭐?”
“아니, 보통 결혼한 사람들 보면 친구들한테 남편 자랑하고 그러잖아. 결혼식에 초대하지도 않고. 우리들 중 누구도 실물로 네 남편 소개받은 사람이 없으니까, 오늘 한번 보자고.”
결혼했다면서 남편 얘기는 하지도 않고 혼자서 맥주만 마시니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은하가 난감해하는데 미나가 나섰다.
“야, 박희경. 애 곤란하게 왜 그래? 안 그래도 안 나오겠다는 거, 내가 오랜만에 하는 모임이라 꼭 한번 만나자고 해서 겨우 나온 거란 말이야.”
“아니, 내가 뭐 기분 나쁜 말 했어? 남편이 워낙 잘난 사람이라니까 남편 얼굴 좀 보여달라고 한 건데.”
희경이 당당하게 나오자 친구들도 동요되는 분위기였다.
“그래, 궁금하긴 한데. 은하가 곤란하면 좀 그렇고…….”
“남편이 많이 안 바쁘면 잠깐만 들렀다 가도 되지 않나?”
그쯤 되자 미나도 혼자서는 역부족인 듯했다.
“그이가 많이 바빠. 그래서 올 수 없을 거야.”
“바쁘면 어쩔 수 없고. 일단 얘기라도 해봐.”
친구들의 등쌀에 은하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한테 전화 한 통 못하는 건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곤란하면 거절하겠지.’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정말로 도훈이 한국에 온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지금쯤 본가에 도착해 서영도 만났으려나.
도훈의 행보가 궁금해도 연락할 구실이 없었는데, 친구들을 핑계 삼아 전화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맥주를 마셔서 알딸딸한 기분에 용기가 생긴 것도 한몫했다.
은하는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와서 전화를 걸었다.
친구들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가는 그들의 서먹한 관계를 눈치채기 딱 쉬울 테니까.
국제전화라는 안내 없이 전화가 가는 걸 보니 확실히 도훈은 한국에 돌아온 모양이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며 서운함이 또다시 밀려 왔다.
얼마 되지 않아 수화기 건너편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리더니 도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한 도훈의 목소리를 듣자, 은하는 감정이 울컥하고 북받쳤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잠시 숨을 골랐다.
“저, 지금 동창회에 나와 있는데요.”
-어?
“중학교 동창모임이 있어서 나왔거든요. 근데 친구들이 도훈 씨를 보고 싶어 해서요. 혹시 시간되시면…… 오실 수 있어요?”
-…….
도훈은 당황했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은하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을 것 같았다.
긴 출장 끝에 이제 막 한국에 도착한 상황.
일주일이 넘게 연락 한 번 안 하다가 갑자기 전화해서 친구들 모임에 나와달라니.
서로 계약관계에 의한 결혼인데 이런 것까지 요구하는 것이 참 염치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미 뱉은 말은 취소할 수도 없는 일.
“바쁘겠죠? 알아요. 그래서 오늘 한국에 도착하신 것도 미리 말씀 못 주셨을 테고요.”
-그건…….
“신경 쓰지 마세요. 저도 안 된다고 했는데 친구들이 하도 성화라서 해본 거예요.”
은하는 최대한 감정을 섞지 않고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너무 비참해서 친구들 앞에서도 표정 관리가 안 될 것 같았다.
은하가 그렇게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였다.
도훈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술 마셨어?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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