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은하는 며칠 동안 두문불출했다.
아무것에도 의욕이 없다고 해야 하나.
알고 보니 도훈은 이미 하늘식품 직원들에게도 밀린 월급을 지급한 상태였다.
며칠 전 찬숙의 집에서 나오자마자 은하는 친했던 직원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찬숙에게 실망하고 화가 난 것과 별개로, 모처럼 외출한 김에 다 해결하려 했으니까.
그런데 그 아저씨 역시 밀린 월급을 이미 받았다며, 심지어 제일그룹에서 하늘식품을 기사회생시킬 계획이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다.
상의 없이 제멋대로 행동한 도훈에게 화가 날 법도 했지만, 은하는 그저 면목이 없고 미안하기만 했다.
“왜 그랬을까……. 내가 너무 돈돈거려서 불쌍했나.”
은하는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 10억이라는 거금을 거론하며 결혼을 제의했던 것부터 부끄러워 숨고 싶었다.
아빠의 병원비, 찬숙의 허영심을 채울 생활비, 그리고 하늘식품 식구들에게 치러준 도리까지.
도대체 그는 자신에게 왜 이렇게 많은 것을 주는 걸까.
차라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덜 미안했을 것 같았다.
그럼 그를 더 많이 사랑하고 보필하면서 갚을 수도 있을 텐데.
지금은 그에게 향하는 마음조차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해줄 게 없는 건 당연하고.
침대에 누워 뒤척이자니 멀리 집 밖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은하는 그제야 힘없이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쁜이 때문에 마냥 처져 있지도 못하겠구나.”
‘예쁜이’는 은하가 고양이에게 붙여준 이름이었다. 눈동자가 너무 예뻐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예쁜아, 기다려. 밥 줄게.”
그렇게 고양이 밥을 챙기고 있을 때였다.
식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에서 메시지 수신음이 울렸다.
[오늘 저녁에 라현중학교 동창 모임. 여은하, 꼭 와라. 얼굴 좀 보자.]
중학교 친구였던 미나였다. 유학 가고 나서 연락이 끊겼다가 은하의 결혼으로 다시 연락이 닿았다.
얼굴도 가리고 이름도 이니셜로만 나간 결혼 기사였지만, 미나는 은하를 알아보고 연락이 왔었다.
챙겨주는 미나의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근래 심경도 복잡하고, 원래도 모임에 자주 나가는 성격은 아니라서 대수롭지 않게 넘길 때였다.
또 한 번 메시지가 들어왔고, 이번에도 미나인가 싶어 무심결에 메시지를 보고 은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생일 축하한다. 맛있는 거 먹고 행복한 하루 보내길.]
성우였다. 발신자에 성우라는 이름을 보는 것도 애틋했지만 메시지는 더 가슴을 울렸다.
그는 늘 그렇듯 담백한 말투로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넸다.
“오늘이 내 생일이었지…….”
은하는 그제야 날짜를 가늠하고 제 생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도 잊고 있던 생일을 챙겨주는 사람.
성우는 늘 이렇게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성우라도 만나서 속 얘기를 하고 싶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누구에게라도 털어놓으면 우울한 이 기분도 조금은 나아질 것도 같았다.
‘성우와는 앞으로 만나지 마.’
하지만 은하는 도훈이 했던 말을 무시할 순 없었다. 그를 기분 나쁘게 만들면서까지 성우를 만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고마워요, 오빠. 오빠도 기분 좋은 하루 보내세요]
결국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은하는 문자를 보내고서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명색이 생일인데 아빠는 병석에 누워 있고, 새엄마는 관심도 없고.
그나마 성우가 자신의 생일을 챙겨주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마저 못 만난다 생각하니 우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도훈이라도 같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일을 챙겨주지 않아도,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뤄질 수 없는 바람이었다.
그는 지금 미국에 있었고, 일정대로라면 이틀 뒤에나 귀국했다.
심지어 그는 일주일이 넘도록 연락 한 번이 없었다.
계약결혼을 한 사이니 그게 당연하다는 걸 알면서도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은하가 고양이 밥을 가져다주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이번에는 휴대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 올 데가 없다고 생각하고 휴대폰에서 발신자를 확인한 은하는 놀라서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발신자는 선주였다. 선주는 도훈과 함께 본가에 다녀온 이후로는 따로 연락이 없었다.
은하가 심호흡을 짧게 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네. 어머님.”
-오늘 집에 들러. 4시쯤.
“네? 아 네…….”
다른 말을 덧붙이는 줄 알고 긴장하고 있는데, 선주는 그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길게 안 해도 돼서 좋긴 했지만, 아무런 정보가 없으니 더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은하는 이번에는 아주 긴 한숨을 내쉬었다.
***
오후 3시 50분.
은하는 정확하게 그 시간에 대문 벨을 눌렀다.
4시쯤 오라고 했으니 늦으면 안 될 것이고, 또 너무 일러도 눈치가 보일 것 같았다.
그래서 가장 무난하게 10분 전으로 도착 시간을 맞췄다.
현관에 들어서자 함양댁이 반가워하며 아는 체를 했다.
“오셨어요?”
“네. 어머님 계시죠?”
“근데 지금 손님이 오셔서…….”
“아…… 손님이요?”
그러고 보니 거실에서 도란도란 얘기 소리가 들려왔다.
은하는 선주와 둘이 보는 약속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도 있는 거니까 애써 웃어 보였다.
“일단 들어오세요.”
어쨌든 이 집 식구인데 입구에 세워놓기가 그랬는지 함양댁이 손짓하며 은하를 불러들였다.
은하 역시 멀뚱히 서 있기도 뭐해서 거실로 들어섰다.
여러 번 와본 시댁인데, 여전히 집안 분위기가 적응되지 않아서 늘 낯설었다.
“왔니?”
“네, 어머님.”
집 안에 들어서자 그제야 선주가 은하를 돌아보았다.
은하는 선주에게 인사를 한 뒤, 옆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에게 자연스레 시선이 옮겨가자 은하는 잠시 숨을 멈춰야 했다.
‘완전 미인이네.’
여자는 하얗고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서구형 미인이었다. 모델을 해도 될 만큼 키도 크고 몸매도 두드러진 데다 분위기는 또 세련되고 우아했다.
“인사해라. 여기는 도훈이가 아끼던 친한 후배.”
“네? 아…….”
“여기는 얼마 전에 결혼한 도훈이 와이프.”
그 말을 하면서도 선주의 입가에 못마땅한 뉘앙스가 깔렸다. 은하가 마음에 안 든다는 뜻이었다.
여자는 반가워하며 은하에게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안녕하세요. 전서영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여은하입니다.”
서영의 웃는 모습이 천사처럼 예뻤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도훈의 주변에 있었다니.
은하는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안 그래도 어떤 분이실까 너무 궁금했어요. 도훈 오빠가 결혼을 했다고 해서, 너무 놀랐거든요.”
‘도훈 오빠…….’
그 말이 무척 다정하게 들린다면, 오해일까.
안 그래도 선주의 ‘아끼던 친한 후배’라는 말도 내내 신경이 쓰이던 중이었다.
“그러게 좀 일찍 들어오지 그랬어. 내가 뭐라 그랬니? 언제 마음이 변할지 모르는 게 사람이라니까. 도훈이도 너 그렇게 아끼고, 도훈이랑 너랑 다니면 그렇게 그림 같고 예뻤는데.”
“그러게요, 어머니. 오빠가 바로 결혼하겠다고 선언을 할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럴 줄 알았으면 저 유학 가지 말고 그냥 서울에 있을 걸 그랬나봐요.”
서영이 은하를 보며 싱긋 웃더니 선주의 말에 장단을 맞췄다.
하지만 은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농담처럼 하는 대화가 은하는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었다.
마치 서영이 서울에 있었으면, 도훈이 은하와 결혼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뉘앙스였으니까.
“근데 생각보다 어려 보이는데, 나이 차이가……?”
“일곱 살. 세상에 나도 깜짝 놀랐지 뭐니.”
“일곱 살이요? 도훈 오빠 취향이 어린 여자였어요?”
서영이 놀랐다는 듯 은하를 위아래로 훑었다. 당황한 듯했다.
“그러게 말이다. 남자들이란, 나이만 어리면 다 좋아하니. 나 원 참.”
두 사람은 은하를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을 하며 대화의 수위를 높여갔다.
은하는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저를 부르신 이유를 듣고 싶은데요, 어머님.”
은하는 최대한 정중하게 이야기한다고 했지만, 손발이 덜덜 떨릴 정도로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도 나빴다.
서영은 왠지 도훈과 친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어필하는 듯했고, 선주는 그런 그녀를 부추기며 은하에 대한 불만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부엌에 약 놔뒀으니까 가져가.”
“약이요?”
“너 그때 뭐 들었니? 아버님이 네 한약 지어주라고 하셨잖아.”
“아, 네……. 알겠습니다.”
처음부터 한약이라고 하던지.
약이라고 하니 은하도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말씀 나누세요.”
은하는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면서 선주와 서영에게 짧게 인사한 뒤 부엌으로 돌아섰다.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니. 오늘 도훈이 온다니까, 저녁 먹고 천천히 놀다가 얼굴 보고 가. 너 보면 아주 반가워하겠다.”
“어머, 그래요. 잘됐네요. 오빠 보고 싶었는데.”
선주가 서영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은 은하가 걸음을 멈추고 선주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노골적인 말은 그렇다치더라도…….
도훈이 온다고? 오늘?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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