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은하는 집에 돌아올 때까지도 몇 번이나 두근거리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찬우를 보고 놀란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아서였다.
집에 들어서자 깊은 적막이 은하를 감쌌다. 오늘따라 집이 더 휑하고 넓어 보였다.
심지어…… 무섭기까지 했다.
이게 다 찬우 때문이었다.
이럴 때 도훈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적어도 이 상황을 의논이라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도훈은 출장을 간 이후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워낙 바쁜 사람이니까 연락 못 하는 걸 이해하지만,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특히 오늘 같은 날은 유독 도훈이 그립고 보고 싶었다.
은하가 혹시나 하는 두려움에 대문이 잠긴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돌아설 때였다.
야옹.
야옹야옹…….
어디선가 고양이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에 고양이가 있을 리가 없는데……?”
하지만 분명히 정원에서 나는 소리였다.
은하는 의아한 표정으로 정원을 뒤졌다. 그러자 정말로 까만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구석진 담벼락 아래에서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들어온 거지?”
대문은 늘 잘 닫고 다니는데, 어떻게 들어왔을까.
“혹시 엄마랑 떨어져서 길을 잃었니?”
그렇다면 밖에 어미가 돌아다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은하는 잠가 두었던 대문을 열고 잠시 기다려주었다.
하지만 새끼 고양이는 그 자리에 앉아서 울기만 할 뿐,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배가 고파서 우는 건가?”
하긴 벌써 저녁이었고, 아침부터 여기에 있었다면 배가 고플 만했다.
은하는 대충 작은 그릇에 우유를 담아서 고양이 앞에 내주었다.
도훈이 오면 뭐라고 할까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제집에 들어온 고양이를 내쫓을 순 없었다.
어느새 경계를 풀고 우유를 먹는 새끼 고양이를 보고 있자니 찬우로 인해 뾰족하게 날을 세웠던 은하의 마음도 많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이상하게 집 안의 휑한 기운도 사라진 기분이었다.
은하가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네가 있어서, 오늘은 덜 외롭겠다.”
***
다음 날은 다행히 컨디션이 괜찮았다.
병원의 은표는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으니 안심이었고, 찬우가 다시 나타난다고 해도 이제 은하는 예전의 스무 살이 아니었다.
어제야 너무 놀라서 몇 마디 못 했지만, 앞으로는 그에게 휘둘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자신 옆에는 도훈도 있지 않은가.
비록 계약 남편이지만, 그래도 남편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든든한 느낌이라는 것을 이제야 느끼고 있었다.
또한 오늘 아침 일찍 영철이 알아봐 준 찬우의 번호는 그녀가 본가에서 본 번호와 달랐다. 역시 동명이인인 모양이었다.
별일 아닐 수 있었지만 은하는 내내 찜찜했기에 의혹이 해소되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은하는 아침밥을 챙겨 먹고, 그동안 미뤄 놓은 일을 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은하가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친정이었다.
엄연히 말하면 찬숙에게 볼일이 있었다.
어제 찬우를 본 것도 마음에 걸리고, 생활비를 주기로 한 것도 어쨌거나 정리를 해야 했다.
도훈은 결혼이 결정되고, 식을 올리기 전 바로 10억을 입금하겠노라고 했다.
처음 결혼 계약서를 작성할 때 눈 딱 감고 쓴 금액이었지만, 막상 받으려니 너무 큰 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지금처럼 도훈이 은표의 병원비를 모두 감당하는 상황에서는 찬숙의 생활비와 하늘식품 직원들에게 줄 월급 정도만 있으면 됐다.
게다가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점점 커지다 보니 대놓고 돈을 받는 것이 마음이 무거웠다.
그를 좋아할 자격조차 없는 것 같아서.
하지만 도훈은 그런 은하의 마음과는 별개로 돈을 모두 지급하려고 했다.
할 수 없이 은하는 지급받는 날짜와 처음 받는 금액만 조정했다.
돈을 지급받는 날짜는 혼인신고 이후로, 처음 받는 금액은 5억.
나머지 5억은 3년 뒤 헤어질 때 달라고 했다.
초반에 돈을 다 받아버리면 가짜 부부 연기에 충실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고, 조금이라도 힘들면 포기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그를 설득한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증여세 문제도 해결이었다.
혼인신고는 신혼여행 다녀와서 곧바로 진행됐고, 도훈은 바로 약속을 지켰다.
그래서 지금 은하의 통장에는 5억이라는 거금이 들어 있었다.
이걸로 찬숙의 생활비를 어느 정도 지원하고, 하늘식품 직원들에게 밀린 월급도 얼른 정리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못 본 사이 찬숙은 어딘가 변해 있었다.
‘또 손을 댄 건가?’
처음 만났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점점 허영과 사치가 심해진 찬숙은 성형수술도 자주 하곤 했다. 은하가 결혼한 뒤 또 손을 댄 모양이었다.
눈도 커지고 주름은 팽팽해졌다. 피부는 마사지숍을 다녀온 듯 윤기가 흘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꾸민 티를 팍팍 냈다.
돈이 없어서 아빠의 병원비를 못 대고, 자신에게 결혼을 강요하던 사람치고 너무 돈을 흥청망청 쓰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무슨 돈으로 이렇게 치장하고 다니는 걸까.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나 약속 있어서 나가봐야 해.”
찬숙이 바쁜 티를 내며 은하에게 본론만 말하기를 종용했다.
은하는 우선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어제 외삼촌을 봤어요. 혹시 아시는 거 있으세요?”
“찬우를? 어디에서?”
찬숙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은하가 그런 찬숙을 살피며 한 번 더 물었다.
“외삼촌이 서울에 있는 거 모르셨어요?”
“내가 어떻게 알아? 네 아빠 때문에 연 끊고, 나도 걔한테 원망만 듣는데.”
찬숙이 눈알을 굴리며 은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럼 됐어요.”
“설마 그거 물으려고 바쁜 사람 찾아온 거야?”
은하가 일단 한 발짝 물러서며 넘어가자 찬숙이 신경질을 버럭 냈다.
하지만 은하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앞으로 어머니 생활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드리려고 왔어요.”
은하 역시 그녀를 오래 붙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솔직히 지금 찬숙이 하고 다니는 꼴을 봐서는 한 푼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 또 무슨 스트레스 받는 상황이 생길지 모르기에 결혼 전에 뱉어놓은 말은 수습하고 싶었다.
그런데 찬숙의 입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생활비를 어떻게 하냐니? 이제 겨우 두 달 줘놓고, 벌써 생색이라도 내고 싶은 거니? 아니면 또 그걸로 날 협박하려는 거야?”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은하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찬숙을 쳐다보았다.
“왜? 몰랐다고 하고 싶니? 알고 있으면서 한 번 더 내 목을 죄려고 온 건 아니고?”
“설마, 그동안…… 그 사람에게 생활비를 받으셨어요?”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다.
“그래. 그 돈 받으려면 대신 너한테 잘 해야 한다고 하더라.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못해줬다고. 어쨌든 그래서 내가 자존심도 버려가며 너한테 맞춘 거잖니? 근데 이제 와서 뭐? 생활비를 어떻게 하냐고?”
찬숙이 기가 찬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얼마나 치욕스럽게 그 계약서에 사인을 했는데.
이제 와서 다른 말을 하니 짜증이 치솟았다.
은하는 그제야 결혼식을 준비하는 동안 찬숙이 왜 히스테리를 덜 부렸는지 알 것 같았다.
결혼하고 나서도 생활비나 다른 문제로 연락이 올 법한데, 따로 연락이 없었던 것도 다 그래서였구나.
그것도 모르고, 찬숙이 조금은 변했나 생각했으니.
은하는 헛웃음이 다 나왔다.
그런데 찬숙이 하고 있는 반지와 팔찌, 목걸이도 하나하나 눈에 띄었다. 전부 못 보던 거였다.
‘설마…….’
은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말도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확인은 해야 했다.
“혹시 생활비 말고 다른 것도 받으셨어요?”
찬숙이 멈칫했다. 은하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어머니!”
은하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찬숙은 당황한 표정은 감추고 뻔뻔하게 대꾸했다.
“그래, 받았다. 뭐, 날 위해서 받았겠니? 너 제일가로 시집갔다고 동네방네 소문 다 났는데, 사돈댁에서 받은 게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쪽팔리는지 알아?”
“우리도 해준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서로 그렇게 하기로 한 거고요.”
은하는 이번 결혼을 하면서 도훈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었다.
반지나, 시계, 하물며 양복 한 벌도.
그의 수준에 맞출 돈도 없었지만, 계약결혼이기 때문에 최소한 간단하게 한 거였다.
그래서 집안끼리 주고받는 혼수도 예단도 모두 생략하기로 합의했고, 은하는 도훈의 압박에 못 이겨 간소한 예물만 받았다.
그 예물도 부담스러워서 3년 뒤에는 돌려줄 각오로 받은 거였다.
그런데 찬숙이 집안끼리의 룰을 깨고 몰래 도훈에게 뭔가를 더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은하는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건 그거고. 아무리 간소하게 한다고 한들, 나도 사람들에게 내세울 게 있어야지. 그리고 내가 해달라고 협박했겠니? 서운하다 했더니 알아서 해준 거야. 준다는 걸 그럼, 내가 마다해?”
“생활비도 받으신다면서요. 사람이 어쩜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나요?”
“뭐, 뻔뻔?”
찬숙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하지만 은하 역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찬숙을 쳐다보았다. 찬숙의 뻔뻔함이 너무 싫었다.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부잣집에 시집가고 남자를 등에 업으니 눈에 뵈는 게 없는 거야?”
“제가 얼마나 곤란할지,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지금 제가 얼마나 황당한지 아시냐고요. 적어도 사리 분별은 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은하는 정말이지 도훈을 볼 면목이 없었다.
찬숙이 돈을 밝히는 여자인 것도 알고, 허영심이 많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적당히 할 줄 알았다. 이렇게까지 도훈을 물주 삼아 지냈을 줄이야.
“생활비 문제는 조금 더 생각해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은하는 찬숙을 차갑게 일갈하고 집을 나왔다.
홀로 남겨진 찬숙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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