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방금까지 웃고 있던 세훈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도 한순간이었다.
“제 나이가 있다 보니, 늦춰서 좋을 건 없겠더라고요. 노력 중입니다.”
도훈이 은하를 사랑스럽게 보면서 대꾸했다.
은하는 예고 없이 훅 들어온 그의 눈빛에 가슴이 떨렸다.
게다가 노력 중이라는 말은 얼굴을 홧홧하게 만들었다.
이학은 아주 흡족해하며 덧붙였다.
“당연하지. 지금부터 노력해도 언제 들어설지 모르는 게 아이다.”
“잘 생각했네.”
평소 말이 거의 없는 일준까지 격려를 보탰다.
“아니, 형님. 아무리 급해도 신혼생활도 없이 바로 아이를 가지시려고요? 그래도 신혼도 좀 즐기셔야죠.”
세훈이 챙겨주는 척 한마디 끼어들었다. 어느샌가 표정을 수습해서 입매는 웃고 있지만 눈은 여전히 매서웠다.
“형수님 생각도 하셔야죠. 형님이야 급할지 모르지만, 형수님은 이제 스물다섯, 한창인데요.”
“이 사람이 원하는 일이야.”
“네?”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은하에게 몰렸다.
은하가 민망해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제가 아이를 좋아해서요. 저는 하루빨리 도훈 씨 아이를 낳고 싶어요.”
언제고 어른들이 물어볼 때를 대비해서 준비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은하는 진심이었다. 언제부턴가 도훈을 마음에 담게 되면서 그의 아이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 같지 않아서 좋구나. 아이를 가지려면 몸 관리도 잘 해야 하는 건 알고 있겠지?”
“네, 할아버님. 신경 쓰겠습니다.”
은하가 제 뜻을 잘 따르는 기분이 들자 이학도 기분이 좋은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선주를 불렀다.
“에미야. 김 원장에게 전화해서 한약 좀 지어 보내라고 해.”
“……네, 아버님.”
선주가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새아가 스트레스 주지 말고.”
그 순간 선주의 눈이 무심하게 앉아 있는 일준에게 향했다.
은하를 부려 먹는 게 이학의 귀에 들어가면 세훈에게 좋지 않을 거라고 말한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일준이 이학에게 직접 이르진 않았을 터.
이학이 넘겨짚은 것뿐이겠지만 기분은 상했다.
아이 얘기도 그랬다.
며칠 은하를 괴롭혔다고, 도훈이 그만하라고 보내는 경고처럼 들렸다.
게다가 손주를 기다리는 이학에게 한 번 더 어필할 수 있으니 좋을 테고.
평소 작은 이야기도 허투루 하지 않는 도훈의 성미로 봐서는 그러고도 남을 일이었다.
‘아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절대 은하가 먼저 아이를 갖도록 지켜보진 않을 것이다.
세훈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밥그릇만 노려보고 있었다.
***
도훈이 미국으로 출장을 간 지 사흘.
역시나 그의 빈자리는 컸다. 은하는 집이 텅 비어버린 느낌에 며칠을 심란하게 보냈다.
혼자 있으니 생각도 많아지고 꿈자리도 사나웠다. 어젯밤에도 꿈속에 찬우가 등장해 밤새 시달렸다. 평창동에서 찬우의 이름을 본 뒤로 몇 번째였다.
‘동명이인이겠지’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의식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스무 살 때, 라스베이거스에서 겪었던 일은 정말 끔찍했다. 그날 찬우의 손에 이끌려 도박꾼에게 팔려 갔다면 은하의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그때 도훈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 무서운 상상이 현실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각할수록 도훈과의 인연이 새삼 신기하고 특별하다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 찬우의 찝찝함을 도훈의 생각으로 덮고 하루를 시작했다.
그날 늦은 오전, 은하가 막 병원에 도착했을 때였다.
은하는 도훈이 없는 동안 은표의 병실에 매일 들르고 있었다.
“왜 나를 막는 거야? 나 여기 입원 중인 여은표 씨 처남이고, 면회 왔다니까?”
VIP 병동 입구가 여느 때와 다르게 시끄러웠다.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여은표 씨는 현재 보호자로 되어 있는 여은하 씨 외에는 면회가 금지됩니다.”
“뭐가 어째? 누구 마음대로? 여기 병원 책임자 누구야?”
“여은표 씨 보호자 요청에 의한 면회 방침이라 양해 부탁드립니다.”
한 사람은 점잖지만 또랑또랑하게, 한 사람은 잔뜩 흥분한 채 말투가 거칠었다.
누가 VIP 병동까지 와서 소란을 부리는 듯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그 소란의 중심에 영철이 있었다.
은하는 깜짝 놀라 영철에게 다가갔다.
“박 실장님, 무슨 일이에요?”
“사모님, 일찍 나오셨네요.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고 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은하의 모습에 영철이 난처해하는 게 느껴졌다.
은하는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했다가 곧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이곳에서 소란을 피우는 사람의 정체가 찬우였던 것이다.
그는 여전했다. 답답하고 미련해 보이는 육중한 몸에, 사정없이 번들거리는 얼굴. 그리고 강압적이면서도 비열하게 빛나는 눈매까지.
그런데 찬우가 왜 여기에 나타난 걸까.
은표와 인연을 끊은 지가 언젠데…….
결국 이렇게 만나려고 며칠 동안 꿈에 시달린 걸까.
은하가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자, 찬우가 먼저 은하를 알아보고 말을 건넸다.
“어, 여은하. 오랜만이다.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어.”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은하도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물었다. 그녀는 찬우와 안부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은하의 딱딱한 태도에 찬우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하여간 싸가지 없는 년. 너는 외삼촌을 보고도 안부도 안 묻냐?”
“말조심하시죠!”
영철이 찬우를 저지하자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기 싸움이 장난 아니었다.
“왜 오셨는지 모르지만, 소란 그만 피우시고 돌아가세요.”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은하가 직접 나섰다.
어쨌거나 여기는 공공장소였다. 그가 소란을 피우는 것은 막아야 했다.
“내가 못 올 데 왔어? 매형이 아프대서 면회를 온 건데, 사람을 완전 파렴치한을 만들어버리네? 기분 더럽게.”
보는 눈이 많은데도 찬우는 가래를 퉤 뱉더니 욕지거리를 덧붙였다. 더러운 짓을 하던 버릇은 그대로였다.
“아빠는 반가워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만 가주세요.”
“그것도 다 네년 때문이잖아. 네가 모함해서. 몸 한 번 주는 게 뭐 대수라고, 그 난리를 쳐서 네 아빠한테 돈도 못 받게 하고, 누님이랑도 생이별하게 만들어? 알고 보면 이 모든 게 다 네년 때문에 시작된 일이야. 그러게, 인생을 잘 살아야 하는데 말이야.”
찬우는 알 수 없는 말을 혼자 지껄이더니 뭐가 재밌는지 낄낄댔다.
“어린 조카의 인생을 함부로 생각한 건…… 당신이잖아요.”
외삼촌이라는 말도 붙이기 싫었다.
초등학생 시절, 새어머니 찬숙을 통해 처음 찬우를 만났을 때도 자신을 쳐다보던 눈길이 너무 끔찍해서 소름 끼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그게 네 팔자야. 지금 재벌가에 시집가서 눈에 뵈는 게 없나 본데, 원래 도둑도 팔자는 못 훔치는 거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곧 알게 될 거야.”
찬우가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또 한 번 낄낄댔다.
은표가 죽고 도훈과 이혼하면 은하는 퇴물이 될 테니, 그때 가서 이리저리 돌리면 된다는 생각에 찬우는 벌써부터 신이 났다.
“그만하시죠. 한 번만 더 사모님을 욕보이시면 제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이야, 여은하 출세했네.”
영철이 은하를 경호하듯 앞으로 나서며 이야기하자 찬우가 야유를 보냈다.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영철이 뒤에 서 있는 경호원들을 가리키며 찬우를 위협했다. 무데뽀인 찬우도 영철과 경호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큰일을 앞두고 괜히 소란을 피워서 계획을 망치면 안 되니까.
“근데 무슨 VIP병동에 경호원들이 이렇게 많아? 누가 보면 대기업 회장님이라도 입원하신 줄 알겠네.”
찬우는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경호원들에게 괜히 짜증을 부리고는 발길을 돌렸다.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굳이 예의 차릴 필요가 없지. 나도 바쁜 몸이라. 여은하, 언젠가 또 보자.”
찬우가 가고 나서 은하는 복도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모님,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영철이 걱정하며 은하를 챙겼다. 은하는 괜찮다는 듯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오늘 감사합니다. 그 사람 병실에 들여보내지 않고 막아주셔서요. 박 실장님께서 안 계셨다면 너무 끔찍했을 거예요.”
찬우가 당장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몰랐고, 아직 회복 중인 은표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았다.
“이분들은 며칠 전부터 보이시던데, 저희 아빠 병실도 지켜주시는 건가요?”
은하는 병동에 꼼꼼하게 배치된 경호원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도훈이 미국으로 출장 가고, 은하가 은표에게 매일같이 오면서부터 보이던 걸로 기억했다.
오늘도 저 사람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네, 사모님. 걱정 마세요. 여 대표님에게 불필요한 사람이 접근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은하가 그제야 안심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참, 박 실장님. 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그 사람…… 전화번호 좀 알아봐 주세요.”
“장찬우 씨, 전화번호를요?”
“네. 제가 좀 확인할 게 있어서요.”
“알겠습니다. 알아보고 말씀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은하는 놀란 가슴을 애써 누르며 영철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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