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은하가 당황해서 머뭇거리자 선주가 신경질적으로 덧붙였다.
“뭘 봤냐니까?”
“아무것도 본 거 없어요. 어차피 다 서류철로 돼 있어서 보기도 힘들 정도였어요.”
“정말이지?”
“네.”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혀 있던 그 조금 수상한 종이 한 장 본 게 다였다.
굳이 그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
그것도 하필 찬우의 이름이라 잠시 멈칫했던 거지, 아니었으면 신경도 안 쓰고 관심도 없었을 것 같았다.
“그럼 됐어. 앞으로 내가 부를 때까지는 본가에 당분간 오지 마.”
제가 시킨 일을 묵묵히 해내는 걸 보고 미련하다 싶었지만, 눈치까지 없을 줄이야.
아니면 정말로 뭔가를 눈치채고 염탐이라도 하는 걸까.
이래저래 켕기는 것이 있으니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30분 전, 세훈은 전화를 걸어서 선주에게 다짜고짜 짜증을 냈다. 은하로 인해 화가 많이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머니, 신경 좀 쓰세요! 아니, 형수가 집안을 돌아다니게 만들면 어쩝니까? 지금 별채 골방에서 떡하니 마주쳤는데 제 서류를 뒤진 것 같습니다.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저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이 집에서 무사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제발, 좀! 정신 차리시라고요!
선주는 다른 걸 다 떠나 세훈이 저에게 함부로 대한 게 가장 충격이었다.
세훈은 확실히 은하가 시집오고 난 뒤 뭔가 불안하고 초조해했다. 그래서 선주도 같이 불안했다.
어찌 됐건 은하가 이 집에서 돌아다녀서 좋을 게 없으니, 당분간은 집안일 시키는 걸 멈추는 게 맞았다.
고생 좀 시키고 싶었는데, 도대체가…….
시키는 걸 묵묵히 하는 것도 짜증 나고, 이렇게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백기를 드는 것도 짜증 났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한편 은하는 이제 시댁일을 안 해도 돼서 속이 편하면서도 찝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그 방이 뭐라고. 아니, 그 서류들이 뭐라고.
그렇게 잘못한 것 같지는 않은데 선주와 세훈 둘 다 길길이 날뛰니 확실히 기분이 이상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은하는 내내 머릿속에서 그 생각이 지워지지가 않았다.
하필 그곳에서 본 게 외삼촌 찬우 이름이라서…… 그게 가장 걸렸다.
“무슨 일 있어?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은데?”
집에 돌아온 도훈이 옷을 갈아입으면서 말했다.
은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도훈을 보았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불안감이 표정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별거 아니에요.”
은하가 얼른 표정을 수습하며 대답했다. 도훈까지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힘든 일 있으면 얘기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해 줄 테니까.”
은하도 알고 있었다. 만약 도훈에게 말한다면 지금 본가에서 겪는 일쯤은 금방 해결된다는 걸.
하지만 대신 도훈이 선주와 껄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았다.
게다가 오늘 겪은 일은 자신의 일이었고, 이제는 본가의 집안일에서 해방도 됐으니 그에게 더 걱정 끼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요. 하지만 정말 별일 없어요.”
은하는 문득 도훈에게 처음 계약결혼을 제의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도훈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알고 보니 누구보다 세심하게 배려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도훈을 좋아하게 된 걸지도 몰랐다.
도훈은 은하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제 용건을 꺼냈다.
“내일부터 미국 출장이야.”
“아…….”
“한 열흘쯤 걸리는 일정이고.”
“가방 싸놓을게요.”
은하의 목소리가 바로 가라앉았다.
워낙 바쁜 사람이니 갑작스런 출장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럴 때마다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열흘이라니. 너무 길었다.
한편 도훈은 은하의 표정이 어두운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은하는 입이 무거운 편이었다. 본가에서 시키는 집안일이 분명 힘들 텐데도 도훈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혼자서 감당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분명 본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을 다그칠 수도, 걱정된다고 티를 낼 수도 없었다.
그러면 은하가 더 신경 쓰는 것을 알기에.
결국 지금으로서는 은하는 눈치 못 채게, 선주에게 선을 넘지 않도록 경고한 뒤 지켜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아침 식사는 준비할 필요 없어. 본가에서 먹을 거니까.”
“본가에서요?”
막 알람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은하가 멈칫했다.
“오늘 미국 출장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회장님께 보고도 드릴 겸 본가에서 아침 먹겠다고 어제 기별 넣었어.”
“아…… 네.”
언제 기별까지 넣었을까.
은하는 다소 부담스럽긴 했지만 이미 약속된 상황이라니 할 수 없었다.
“8시까지만 가면 되니까 천천히 준비해.”
“알겠습니다.”
은하가 대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필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오늘 본가에서 아침을 먹는다니 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도훈은 천천히 준비하라고 했지만, 아침 시간에 늦을까 싶어 은하는 괜히 마음이 급해져서 서둘러 씻고 도훈의 출장 가방부터 챙겼다.
“속옷이랑 양말, 세면도구. 여벌 옷이랑 구두……. 그리고 또 뭐가 있으려나.”
도훈을 열흘 동안이나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서운한 마음만큼, 짐 가방을 붙들고 있는 시간도 길어졌다.
꼼꼼히 챙겨서 그를 흡족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면 혹시나 가방을 열 때마다 내 생각을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도 있었다.
“캐리어 한번 확인해보시겠어요? 필요한 것들을 넣긴 했는데 혹시나 빠진 게 있는지.”
은하는 씻고 드레스룸으로 들어온 도훈에게 캐리어를 가리키며 말했다.
“없는 건 가서 사면 돼. 나갈 준비해.”
하지만 도훈은 은하의 속마음도 모른 채 짧게 대답하더니 옷을 갈아입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은하는 캐리어를 닫으며 입꼬리를 올려 대꾸했다.
그러게, 캐리어의 짐이 뭐라고.
열흘 동안 헤어지는 것이 저만 서운한가 싶어 잠시 뾰로통해졌지만 별거 아닌 걸로 서운해하는 자신이 우습다는 생각에 그만 픽 웃고 말았다.
“준비됐으면 가지.”
“네.”
도훈의 말에 은하가 조금은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
선주는 아침부터 두통이 밀려왔다.
안 그래도 어제 일 때문에 스트레스인데 갑자기 도훈과 은하가 밥을 먹으러 온다니, 속내를 알 수 없어서였다.
은하는 분명 어제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세훈의 말에 따르면 은하가 들고 있던 서류가 중요한 건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도훈이 집에 온다 하니 또다시 불안해졌다.
이상하게 도훈과 함께 있으면 늘 그런 감정이 들곤 했다.
뭔가 제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 때문일까.
이제 보니 여자도 하필 저랑 비슷한 여자를 골랐다.
어리다고 만만히 봤는데, 은하는 전혀 비굴하게 굴거나 주눅 들지도 않았다.
어제저녁 도훈과 은하가 온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선주는 세훈과 의논했다.
‘별말이야 했겠어요? 어머니가 끼어 있는 일인데. 아무리 버릇이 없어도 이 집에서 며느리로 살고 싶음 그 정도 사리판단은 하겠죠.’
다행히 세훈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고, 그런 세훈을 보자 선주도 조금은 안심이 됐다.
‘그나저나 빨리 이 집에서 내쫓을 궁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이대로 두고 봤다가는 어디까지 기어오를지 모르니까.’
세훈은 어제 일보다는 앞으로 은하를 내쫓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선주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도훈이 집을 드나드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당신, 요즘 새아가 집안일 시켰다며?”
안 그래도 신경이 날카로운데 일준이 아는 체를 하자 선주가 돌아보았다.
“시어머니 노릇하는 건 좋은데, 적당히 해. 도훈이는 진심인 것 같으니까.”
일준은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도훈이 결혼해서 잘 사는 게 보기 좋았다.
그런데 선주가 가끔 도훈에게 억하심정이 있는 것처럼 굴 때는 꽤 신경이 쓰였다.
세훈과 경쟁하는 것 때문에 경계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도를 넘으면 선주에게도 좋을 건 없었다.
“제가 뭘 했다고 그래요? 그리고 시어머니가 그 정도도 못 해요? 지난번 상견례 때 사부인도 제발 자기 딸 일 좀 가르쳐주라고 사정하던데.”
“그러다 아버지 귀에라도 들어가면 세훈이한테 더 마이너스라는 것만 알아둬.”
선주를 움직일 수 있는 건 세훈이 얘기밖에 없다는 걸 일준도 알고 있다. 그래서 세훈을 언급하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선주는 일준까지 나서서 저를 타박하는 느낌이 들자 더 이를 갈았다.
세훈이를 꼭 제일가 꼭대기에 올려놓고, 이 집에서 20년 공들인 보상을 꼭 받겠다고.
***
본가에 오자 특유의 냉랭한 집 안 공기가 은하의 숨을 막히게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한 거라고 은하는 마음을 다잡았다.
대놓고 무시하거나 싫은 티를 팍팍 내며 피를 말리는 경우도 많이 봤으니까.
그런데 겨우 다잡아놓은 평정심은 얼마 안 돼 무너지고 말았다.
“형수님이 들어오시고 확실히 집 분위기가 밝아진 것 같습니다. 형님도 훨씬 편해 보이시고요.”
다 같이 모여 식사하는 도중 세훈이 도훈과 은하를 보면서 아주 기분이 좋다는 듯 말을 꺼낸 것이다.
“자주 좀 오세요. 다 같이 식사하니까 좋네요.”
다정한 말투와 부드러운 미소, 심지어 아주 호감의 눈빛까지.
은하는 입맛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좋게 생각하자 싶으면서도 어제 은하를 쥐새끼 취급하듯 쫓아낸 세훈의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리 시시각각 변할 수 있는 게 사람이라도, 세훈은 도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결혼이 그렇지. 남자고 여자고 결혼을 해서 안정이 되면 다른 일도 훨씬 잘 할 수 있는 법이다.”
이학이 세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아이도 바로 가질 거라고?”
“네. 할아버지.”
갑자기 튀어나온 아이 얘기에 선주와 세훈이 동시에 도훈과 은하를 돌아보았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주소|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역로3길 40-36 B동 710호 (신내동)
전화|02)906-7768 / 팩스|02)906-7769
값 100원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와이엠북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