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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도 없이 결혼-33화 (33/72)

33화.

영철과 함께 지방으로 출장 가는 길.

“고용인 오는 시간을 줄였다더군요. 본가에서 쉽게 허락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박 실장님 뭐 아시는 거 있습니까?”

아무래도 고용인 문제가 계속 마음에 걸린 도훈이 영철에게 아는 게 있나 물었다.

“요즘 사모님께서 매일 아침, 본부장님이 출근하시면 본가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말할 타이밍을 찾고 있던 영철은 그동안 전해 들은 은하의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래요?”

“따로 집안일을 시키시는 것 같던데, 두고 보시겠습니까?”

도훈의 얼굴이 구겨졌다.

어쩐지, 그냥 허락할 리 없는데.

무리하지 말랬더니 결국은 자신한테 말도 안 하고 선주에게 불려 다니고 있었던 건가.

하지만 지금은 그가 나설 명분이 없었다.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걸 보면 은하는 혼자 해결하고 싶은 듯했으니까.

“우선은 지켜보죠. 제게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데, 굳이 아는 척 해서 마음 상하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도훈은 본가에 티 나지 않게 경고하는 방안을 벌써부터 생각 중이었다.

영철은 그런 도훈을 호기심 있게 바라보았다.

계약이라더니, 진심인 건가?

도훈은 영철에게 은하와의 관계를 서로 필요에 의한 계약으로 설명했다. 처음에는 놀랍기도 하고, 가족들에게 들킬까 걱정이 되긴 했으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도훈은 은하에게 계약관계 이상의 호감을 갖고 있는 듯했다.

도훈을 오래 지켜본 영철만이 느낄 수 있는 예민한 촉이었다.

“그나저나, 장찬우 쪽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계속 도박장만 전전하는 것 같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계속 감시하세요. 그리고 저 미국에 출장 가 있는 동안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도훈이 영철에게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

은하는 오늘도 본가에 와 있었다.

사실 처음 본가에서 집안일을 했을 때는 근육이 너무 놀라서 며칠을 혼자서 끙끙 앓느라 혼났다.

도훈에게 들키면 걱정할 것 같아 아프다는 말도 못 했다.

하지만 며칠 사이 굳은살이 박였는지 이제는 제법 할 만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며칠은 더 버틸 만하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선주도 만만치 않았다. 은하가 군소리 없이 해내자 독이 올라서 점점 더 강도를 높였다.

어제는 봄맞이 그릇 청소를 한다며 있는 그릇, 없는 그릇 다 꺼내서 하루 종일 설거지를 하게 만들더니.

오늘은 별채 청소를 시키려는 모양이었다.

은하는 한숨 반, 어이없어서 나오는 웃음 반을 뱉으며 제 앞에 놓인 청소도구를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작은 사모님.”

함양댁은 은하에게 매번 일을 시키면서도 미안해서 안절부절못했다.

“괜찮아요. 그래도 설거지보다는 낫네요.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어서.”

은하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옅게 웃으면서 청소도구를 빼 들었다.

“여기에 이런 방이 다 있었네.”

대문에서 바라보면 정면에 보이는 것이 본채, 그리고 그 옆으로 제법 거리가 있게 떨어진 또 다른 건물이 별채였다.

은하는 별채도 청소하라는 말을 듣고 오후 내내 별채를 청소하고 있었다.

그런데 줄지어 늘어선 방 중 마지막 방에 들어갔을 때였다.

마치 골방처럼 이것저것 잡동사니가 뒤섞인 채 쌓여 있었다.

“여기는 어떻게 청소하라는 거지?”

어차피 바닥에는 잡동사니가 많은데, 함부로 정리할 수도 없었다.

괜히 정리하려다 오히려 사고만 칠 것 같아 책상 정리만 하기로 했다.

그렇게 책상 위를 치우고 있는데, 뒤섞인 서류뭉치 사이에서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흰 종이 한 장이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은하가 대수롭지 않게 그 종이를 주워 다시 서류뭉치에 끼워 넣으려는데 문득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은하는 놀라서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종이에 적혀 있는 것은 은하가 아는 이름이었다.

<장찬우 010-XXXX–XXXX>

장찬우……?

어릴 때부터 자신을 음흉한 눈으로 훔쳐보고, 나중에 라스베이거스에서 만났을 때는 도박빚에 팔아버리려고 했던 찬숙의 동생. 그러니까 은하의 외삼촌 이름이 찬우였다.

세상에 동명이인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에서 그 이름을 볼 줄이야.

은하가 겪은 일을 알게 된 은표가 찬우와 연을 끊었기 때문에 최근 전화번호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름이 같다는 것만으로도 은하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냥 동명이인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찬우의 이름이 이 집 서류더미에서 나온 게 이상했다.

은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 종이를 서류철 사이에 다시 잘 끼워넣었다.

천천히 그것을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놓으려고 할 때, 뒤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 뭐 하세요, 형수님?”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세훈이 자기영역을 침범당한 맹수처럼 사나운 표정으로 은하를 보고 있었다.

세훈은 성큼성큼 걸어와 은하가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빼 들었다.

“설마, 형님이 아내가 아니라 쥐새끼를 맞아들인 건 아니겠죠?”

쥐새끼라니. 지금 이 말을 농담이라고 하는 걸까.

은하가 황당해서 세훈을 쳐다보았다.

세훈은 입꼬리만 올려 웃는 채로 은하에게 대답을 강요하고 있었다. 입매만 웃었지 눈매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왜 허락도 없이 여기 들어왔냐는 의심과 취조의 눈빛이었다.

“저는 그냥 여기 청소하러 왔을 뿐이에요.”

은하가 대답했다. 설사 그의 방이라고 해도 이런 눈초리까지 받아야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해는 풀어야 했다.

“청소요?”

“네. 어머님이 별채 청소를 하라고 하셔서요.”

그제야 세훈은 은하 주변에 늘어져 있는 청소도구를 보았다. 그리고 슬쩍 다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도무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 은하의 미간이 살포시 구겨졌다.

“청소를 하시려면 제대로 하셔야지. 여기는 청소하는 사람이 들락거리는 방이 아니에요.”

은하는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아무리 선주의 지시로 청소하고 있는 입장이지만, 세훈에게는 은하가 손윗사람인데 진짜로 청소하는 아주머니쯤으로 대하는 것 같았다.

은하가 잠시 입술을 꾹 깨물고 서 있자 세훈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어머님이 이번에는 실수하신 것 같네요. 형수님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이렇게 본가를 돌아다니게 만드시는지.”

“네?”

“걱정 마세요. 제가 말씀드려서 앞으로는 이런 일 안 하게 해드릴 테니까.”

“전 괜찮아요.”

“제가 안 괜찮아서 그래요, 형수님. 또 언제, 어느 방에서, 뭘 훔쳐보고 계실지 모르잖아요?”

“……네?”

은하가 기가 막혀 그를 보았다. 세훈은 지금 저를 염탐이나 하러 다니는 여자로 보고 있었다.

이 집에 염탐할 게 뭐가 있다고?

재벌집은 다 이런 건가 싶어서 불쾌한 표정으로 쳐다보니 세훈이 덧붙였다.

“그러니까 서로 신경 쓰이는 일 없게 그만하시라고요, 이런 일.”

순간적으로 세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자 아주 비열하고 무서운 표정이 드러났다.

뒤집듯 바뀐 표정에 은하는 놀라서 숨을 멈췄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찰나였고, 세훈은 언제 또 그랬냐는 듯 다시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안 나가고 뭐 하냐는 듯이.

은하도 더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서 청소도구를 챙겨 밖으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참, 사돈어른은 좀 어떠세요? 의식이 없으셔서, 형수님이 속이 많이 타시겠어요.”

세훈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뜬금없이 은표 이야기를 물었다.

은하는 솔직히 더 말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시동생으로 3년을 더 지내야 한다 생각하니 대꾸를 안 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많이 호전되고 계세요.”

“그래요?”

세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지만, 은하는 눈치채지 못했다.

은표는 여전히 의식은 없었지만 그래도 수술 부위의 염증이나 뇌파 수치들도 빠르게 안정되고 있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은하는 좋았다. 몸이 나아지면 의식도 분명히 돌아올 거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은하는 마지막까지 시동생에 대한 예우로 깍듯하게 대하고 그 방을 빠져나왔다.

생각할수록 께름칙했다.

얼마나 비밀스러운 서류들이기에 자신을 쥐새끼로 취급했을까 싶다가도, 은하는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찬우의 이름도 그냥 동명이인이겠지 하며 가볍게 생각하고 넘겼다.

하지만 힘들게 별채 청소를 마치고 돌아가자마자, 은하는 선주에게 불려가 다시 한번 취조를 당했다.

“너, 별채에 가서 돌아다녔니?”

“네. 청소해야 하는 줄 알고요.”

선주가 이마를 짚었다. 별채 청소를 시키긴 했지만 이렇게나 눈치 없이 이 방 저 방 다 들어가서 기웃거렸을 줄 몰랐다.

게다가 그 방은 딱 봐도 잡동사니들이 많아서 건너뛰겠거니 한 게 불찰이었다.

청소를 시켜도 눈속임으로 대충하고 말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벌어진 일. 선주는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래서, 그 방에서 뭘 봤어?”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주소|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역로3길 40-36 B동 710호 (신내동)

전화|02)906-7768 / 팩스|02)906-7769

값 100원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와이엠북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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