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당연하게도 선주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은하가 고용인에게 주 5일에서 주 2일 출근으로 근무일을 줄여 통보한 날, 바로 은하를 호출했다.
마음 같아서는 아예 해고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선주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자제한 거였다. 그래도 시어머니가 붙여준 사람인데 대놓고 해고하면 당연히 자신을 무시한다 생각할 테니까.
“아주 기고만장하구나?”
본가에 들어서자 선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래, 고용인을 일주일에 두 번만 오라고 했다고?”
“네. 두 번 정도는 도움을 받고 나머지는 제가 직접 해보려고요.”
“네가? 사돈 말씀이 그동안 공부만 했다고 하던데, 네가 그 큰 집 살림을 어찌 다 하려고?”
선주가 눈을 뾰족하게 만들어 쏘아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다른 속내가 있지 않나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계속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기회가 아예 없으니까요. 제가 바깥일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 천천히 하나씩 배워가면서 해보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무엇보다…… 앞으로 도훈 씨는 제가 직접 챙기고 싶어서요.”
그게 은하의 진심이었다. 비록 계약결혼이라고 해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도훈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지금껏 기댈 데 없이 혼자 살아온 남자가 아닌가.
어머니 대신까지는 어려워도, 적어도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옆에서 잘 뒷바라지하며 챙겨주고 싶었다.
“허……!”
선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쯧쯧 혀를 찼다.
도훈을 향한 은하의 사랑이 아주 절절해서 낯간지러울 지경이었다.
“당돌한 건 알았다만, 무모하기까지 하네.”
“……네?”
“너 좋을 대로 해. 나야 너 편하라고 고용인을 붙여준 것뿐이니까.”
이렇게 쉽게 허락한다고?
엄청난 후폭풍을 생각했던 은하는 다소 쉬운 허락에 맥이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돼서 만족했다.
특히 매번 도훈에게 받기만 했는데, 이번 일로 조금은 도움이 된 것 같아 기뻤다.
“함양댁!”
그때 선주가 본가의 집안 살림을 맡아서 하는 고용인을 불렀다.
고용인은 선주의 부름이 들리자마자 앞치마를 맨 채로 부엌에서 달려 나왔다.
“네, 사모님. 부르셨습니까?”
“우리 며느리가 살림을 좀 배우고 싶다는데.”
“네?”
함양댁이 놀라서 은하와 선주를 번갈아 보았다.
굳이 여기서 배우고 싶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살짝 놀란 은하가 난처한 표정으로 선주를 쳐다보자 그녀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제가 심어 놓은 고용인이 은하의 뜻대로 행동반경이 좁아지는 것이 영 못마땅했지만, 그렇다고 집주인이 사람을 부리는 것까지 간섭할 수는 없었다.
다만, 빌미가 잡힌 만큼 은하를 힘들게 할 순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아까 아침 먹은 설거지랑 오늘 청소할 거, 그리고 빨래할 것도 다 내어줘요.”
“아, 사모님. 그래도 그건 너무 많은데요…….”
“내어줘요. 그 정도 각오도 안 하고 살림을 배운다 했을까. 그리고 빈 몸으로 시집왔으면 원래 알아서 더 하고 그러는 거니까.”
“아니, 그래도…….”
함양댁이 난처함에 안절부절못했다.
그럼, 그렇지. 선주는 쉽게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어쨌든 선주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이 정도는 겪을 수 있는 일이었다.
오히려 쉽게 허락해주는 것보다 이게 나았다. 정말로 제 힘으로 얻어 낸 결과 같으니까.
“주세요. 괜찮아요.”
은하가 함양댁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하지만 선주는 어려서 뭘 모르는 애송이 보듯 은하에게 차갑게 일갈했다.
“당분간은 도훈이 출근하고 나면 너도 본가로 출근해서 함양댁한테 살림 배워라. 그렇게 소원이라는데 이 시어미도 동참해야지.”
선주는 그 말만 하고 밖으로 나가버렸고, 은하는 그때부터 함양댁이 가져다주는 시댁일을 도맡아 하게 됐다.
고용인들이 혀를 내두르며 도와주려고 해도, 선주는 나이 어린 며느리에게 살림 가르치는 거라고 절대 도와주지 못하게 했다.
은하 역시 도움 받지 않고 혼자서 하는 게 편했다.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피해 보는 건 원치 않으니까.
그리고 이게 마치 선주에게 치르는 신고식 같아서 잘 해내고 싶었다.
그런데 의외의 복병이 있었다. 바로 동서 하리였다.
사람이 나쁘진 않은데 단순하고 푼수 같은 면이 있어서 선주가 나가고 나면 제 옆에서 수다를 떨곤 했다.
“형님. 시집오자마자 이렇게 힘드셔서 어떡해요? 제가 도와주고 싶어도 네일아트 붙인 지도 얼마 안 됐고, 또 그런 잡일 하다보면 근육이 이상한 데 붙더라고요. 애써 완벽하게 만들어놓은 몸인데, 망가지면 속상하잖아요.”
도와주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 이렇게 옆에 알짱거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하리는 은하가 주는 눈치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도 푼수 같은 그녀 덕분에 집안 사정은 좀 더 알 수가 있었고, 한동안 본가만 오면 숨 막히던 기분도 한결 나았다.
“전 진짜 이런 집인 줄 모르고 결혼했잖아요. 저는 세훈 씨가 저를 좋아해서 결혼하자고 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후계자가 되고 싶어서 빨리 결혼한 거더라고요. 그때 얼마나 충격이었던지. 저 배우 욕심도 버리고 결혼한 건데.”
하리는 틈만 나면 남편 세훈을 욕했다.
사실 은하는 다 알고 한 결혼이지만, 하리는 모르고 했으니 충격받을 만했다.
“그거뿐이면 다행이게요. 이 사람이 결혼하고 나니 태도가 180도 바뀐 거 있죠? 완전 찬밥신세예요. 아주버님은 안 그러세요?”
“아, 네. 뭐…….”
도훈은 당연히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럴 게 없는 계약결혼이니까.
오히려 임신계약을 맺어서 그런가, 더 자주 그의 품에 안기고 있었다.
도훈의 이야기에 은하가 얼굴을 붉히자 하리가 부러워하며 말했다.
“저도 이상형이 아주버님 같은 분이었거든요. 잘생겼지, 능력 있지, 카리스마 있지. 근데 여자는 평생 옆에 두신 적이 없는 분이라고 해서 단념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꼬신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여자를 옆에 둔 적이 없다뇨?”
“아, 몰랐어요?”
“네.”
당연히 몰랐다. 그의 과거를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당연히 경험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밤마다 저를 만족시켜주는 스킬이 장난 아니었으니까.
“친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요?”
“네…….”
은하는 불길한 예감에 하리를 쳐다보았다.
하리는 누가 들을세라 조용히 말했다.
“자살했잖아요. 아버님이 지금 어머님 데리고 들어와서.”
은하는 충격으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도훈의 친어머니가 자살을 했다니.
“그래서 어릴 때 한동안 정신과 약도 먹고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어린 나이에 안됐죠. 그래서 어머님이 지금도 아주버님 싫어하잖아요. 혹시나 아주버님이 복수할까봐.”
은하는 그제야 이해가 됐다. 왜 선주가 도훈을 감시하는지. 도훈이 왜 그녀가 감시하도록 내버려두는지도.
“열두 살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바람 펴서 어머니가 자살했으니, 여자를 옆에 두고 싶었겠어요? 저는 이해해요.”
“…….”
“그동안 연애도 한번 제대로 안 하셨다는데, 떡하니 형님을 좋아하는 여자라고 데리고 왔으니, 집이 발칵 뒤집힌 거죠.”
“그렇겠네요.”
은하는 이 결혼이 얼마나 의심을 받는지 알 것 같았다.
들키지 않으려면 잘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하던 도훈의 말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
그날 저녁, 은하는 신혼집 부엌에서 열심히 음식을 조리 중이었다.
이제 고용인도 오지 않으니까 요리나 부엌살림은 필수였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오늘은 제 손으로 만든 맛있는 음식을 도훈에게 먹이고 싶었다.
본가에서 하리에게 들었던 말 때문이었다.
열두 살이면 정말 어린 나이인데, 혼자서 어떻게 버텼을까.
갑자기 나타난 냉랭한 새어머니도 힘들었을 것 같은데, 친어머니가 돌아가신 정황까지 들으니 도훈이 가진 상처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도훈에게 그런 상처가 있는 게 안타까웠고, 그의 마음을 이제라도 보듬어주고 싶었다.
그러다 생각해낸 것이 요리였다. 티 나지 않게 그를 챙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맛있고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음식을 먹는 것만큼 행복한 건 없으니까. 열심히 노력하면 식사하는 동안만이라도 그를 조금은 행복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미국에서 자취 생활도 했었기 때문에 은하는 요리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도훈이 좋아하는 음식 취향을 모른다는 거였다.
하리에게 혹시 아는 게 있냐고 물어보자 아주 단순한 답변이 돌아왔다.
‘고기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그 탄탄한 몸 좀 보세요. 무조건 단백질이에요. 하아…… 생각만 해도 섹시해.’
하리는 도훈의 몸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짜릿하다며 침까지 삼켰다.
하리의 마음은 충분히 알겠으나 전혀 신빙성이 없어 보였다.
은하는 결국 영철에게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내 조언을 구했다.
[박 실장님. 바쁘신데 연락드려 죄송해요. 혹시 도훈 씨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아시나요?]
잠시 뒤, 영철은 바로 답변을 보내왔다.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영철의 문자를 본 은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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