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몰랐다. 그가 자신을 그렇게까지 찾았을 줄은.
그 이유가 궁금해진 은하는 괜히 심장박동수가 빨라졌다.
“아니, 왜…….”
“모르겠어, 이유는.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고, 당신이 누군지 궁금했을 수도 있고.”
도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집착할 일도 아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스토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런데 직접 나타났으니…… 황당했겠네요.”
은하는 그제야 성우의 소개로 만난 날, 도훈의 반응을 이해했다. 자신을 기억 못 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 기우였다.
그가 그렇게까지 자신을 찾아다녔다니.
그것도 모르고 다시 만났던 날, 시치미 떼고 모른 척 앉아 있었다는 걸 생각하니 이번에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홧홧해졌다.
“신기했지. 매니저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고.”
도훈도 이 인연이 참으로 신기하다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은하의 입에서 당황스러운 탄식이 새어나온 것은.
“아, 이걸 어떡해……!”
“무슨 일이야?”
도훈이 쳐다보니, 은하는 캐리어를 열다 말고 당황해하고 있었다.
“캐리어가 바뀌었나봐요.”
“뭐?”
“저랑 똑같은 거라서 헷갈렸나봐요. 어쩌죠?”
은하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잠금장치의 비밀번호가 안 맞아서 이상하다 생각하며 캐리어를 보니,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모양이 똑같아서 방심하고 끌어내린 것이 문제였다.
“여권은?”
“그런 중요한 건 따로 챙기긴 했어요.”
“그럼 됐어.”
도훈이 그 와중에 다행이라는 듯 은하를 안심시켰다.
“항공사에 전화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다른 쪽에서도 제 캐리어가 아니면 연락올 테니까.”
“하지만 당장 입을 옷도 없는데…….”
“그것도 걱정 말고.”
도훈은 일사천리로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은하는 도훈에게 면목이 없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실수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
호텔 입구에서 만났던 매니저가 찾아온 것은 도훈이 나가고 한 시간쯤 뒤였다.
“급한 대로 준비했습니다.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도훈은 매니저에게 연락해 은하에게 당장 필요한 물품을 챙겨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은하가 직접 쇼핑을 가도 된다고 했지만, 도훈이 반대했다.
지금은 저녁이고 제 아내가 혼자서 쇼핑센터를 돌아다니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그래서 할 수 없이 마음을 접고 매니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와서까지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다니. 은하는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니 매니저의 물건을 받아 들었다.
“참, 라운지에서 8시부터 공연이 있습니다. 원하시면 자리 만들어 드릴게요.”
“아…….”
은하는 잠시 망설였다. 안 그래도 혼자서 씁쓸하던 참이라 반가운 제의였지만, 혼자 돌아다니면 도훈이 싫어하는 건 아닐까 고민이 돼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훈이 없을 때마다 호텔에 혼자 남아 그를 기다리는 건 너무 쓸쓸할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쇼핑센터와 달리 라운지는 호텔 안에 있고, 조용히 공연만 감상하고 오는 거니까 뭐라고 하진 않을 것 같았다.
결국 은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보러 갈게요.”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매니저가 나가자 은하는 조금 기운이 돌았다.
여기서 도훈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밖으로 나가서 공연을 본다니 설레기도 했다.
은하는 얼른 옷을 갈아입기 위해 매니저가 준 쇼핑백을 열어 보았다. 그러고는 놀라서 중얼거렸다.
“이걸…… 입는다고?”
다른 것은 그렇다치고 외출복으로 구해온 옷이 문제였다.
하나같이 앞뒤가 깊게 파인 드레스였다.
게다가 슬리브리스에 다리 쪽도 허벅지까지 트임이 있는 롱드레스였다.
옷은 너무 예쁜데 입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지금 입고 있는 옷을 계속 입기에는 지저분하기도 하고, 라운지와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이긴 했다.
“그래, 여긴 미국이니까. 이 정도 노출은 아무것도 아닐 거야…….”
한참을 고민하던 은하는 결국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잠시 후, 은하가 매니저가 갖다 준 옷으로 갈아입고 룸을 나섰다.
평소 노출 있는 옷을 거의 입지 않아서인지 이 정도로 가슴이 드러나는 드레스는 정말 처음이었다. 그래도 예쁘긴 너무 예뻐서 은하가 보기에도 잘 어울렸다.
「사모님. 이쪽입니다.」
라운지에 도착해 룸 번호를 말했더니, 직원이 은하의 자리를 안내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커플이 많았고, 여자들은 다들 은하가 입은 것과 비슷한 느낌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제가 입을 때는 너무 야한 것 같은 옷이었는데, 남들이 입은 걸 보니 크게 야해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 내가 너무 예민해서 그래. 자신감을 가지자.’
은하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향했다.
VIP 룸 손님이라서 그런지 공연이 열리는 무대 바로 앞쪽 자리였다.
그렇다고 너무 중앙도 아닌, 한눈에 바깥 야경 조망까지 가능한 일등석 자리였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음……. 마티니 한 잔 주세요.」
「알겠습니다.」
은하는 술을 잘 못하기도 하고, 칵테일도 잘 몰랐다.
그나마 미국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마셔본 것이 마티니였다.
미국에서 공부를 할 때만 해도 이렇게 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은하가 추억에 젖어 들던 중, 때마침 마티니가 나왔고 공연도 시작됐다.
여자 보컬이 노래하는 재즈 밴드 공연이었다.
바로 앞에서 감상하는 음악은 너무 황홀하고 듣기 좋았다.
공연은 한 시간 정도 계속됐고, 은하는 공연을 들으며 칵테일을 한 잔 더 마셨다.
두 번째 잔까지 비우고는 살짝 한기가 들었다. 날씨 탓보다는 술에 취해서 그런 것 같았다.
더 있고야 싶었지만 혼자 온 데다 더 취하면 룸까지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을 듯했다.
‘도훈 씨랑 같이 왔다면 더 있을 수 있었으려나.’
사실 공연을 보는 내내 조금은 처량 맞은 생각이 들었다. 이 좋은 공연을 혼자서 보고 있으니 커플끼리 웃으면서 즐기는 다른 사람들이 부러웠던 것이다.
술에 취해서 더 감성적이 된 걸까.
신혼여행도 당연히 크게 기대하지 않았고, 도훈이 바빠도 혼자서도 충분히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술에 취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해졌다.
은하는 결국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취기가 오른 뒤라서 그런지 일어서자마자 조금 비틀거렸다.
「괜찮으세요?」
그때 한 남자가 은하의 팔을 붙잡고 일으켜주었다.
은하가 쳐다보니 키가 훤칠히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잘생긴 외국인이었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은하가 그의 손에 잡혀 있는 팔을 부담스러워하며 얼른 대꾸했다.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이 호텔에 혼자 머무는 건 아닐 테고. 남자친구는 어쩌고 혼자예요?」
남자는 눈치가 빨랐다. 결혼반지를 봤는지 은하가 솔로가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아채고는, 무슨 사정으로 혼자 나와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은하는 그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이럴 거면 그냥 룸에 있을 걸 그랬나.
은하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바람맞았어요?」
「네?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그이가…… 바빠서요.」
그것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 빨리 답을 주고 이곳을 벗어나는 게 상책이었다.
「이 정도 미인을 혼자 두고 바쁘면 안 되는데.」
「이제 그만 들어가봐야 할 것 같아요. 이 손 좀 놔주실래요?」
남자는 아직까지 은하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은하 역시 여전히 비틀대고 있긴 했지만, 그의 팔 힘을 빌려야 할 만큼 크게 취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지 말고 나랑 한 잔 더 할래요?」
「네?」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혼자 술 마시는 거 별로니까 친구로서.」
그의 말대로 다른 의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낯선 남자와 단둘이 술을 마시는 건 안 될 것 같았다.
어쨌든 그녀는 이제 막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온 새신부니까.
물론 자신만 그런 걸 크게 의미를 두는 걸 수도 있겠지만, 괜히 오해를 살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죄송해요. 안 되겠어요. 전 이미 취하기도 했고요.」
「아쉽네요. 그러면 내가 룸까지라도 모셔다 드릴게요.」
「아뇨. 그건 제가 부담…….」
부담스럽다고 말하며 거절하려 할 때였다.
「그 손 놓으시죠.」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하가 놀라서 쳐다보니 도훈이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에게 잡혀 있는 그녀의 팔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훈 씨. 그게…….”
「아, 바쁘다는 그 남자친구?」
남자가 호기심 가득한 미소로 도훈을 보았다. 하지만 도훈은 웃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남자친구 아니고 남편입니다. 그러니까 내 여자 몸에서 손 떼시죠.」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주소|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역로3길 40-36 B동 710호 (신내동)
전화|02)906-7768 / 팩스|02)906-7769
값 100원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와이엠북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