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조용한 신부대기실에 홀로 앉아 있으니 찬숙이 올라왔다.
은하보다 더 꾸민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했다.
“우리 하객도 제법 왔네.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찬숙이 신이 나서 중얼거렸다.
은하는 아빠 없이 이런 결혼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파서 하객은 크게 관심이 생기지도 않는 반면, 찬숙은 아니었다.
아침부터 식장에 나와 자신을 찾아오는 하객들을 일일이 확인하는 중이었다.
제일그룹이야 이름값이 있으니 당연히 정재계 인사들이 총출동했지만 은하네는 올 사람이 한정적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은표 몰래 사교생활을 하면서 발을 넓힌 사람들이 찾아오니 신나서 은하에게 생색을 내는 중이었다.
“재벌집과 결혼하니 좋긴 좋구나. 다들 나한테 줄 서지 못해 안달이야.”
찬숙은 원래 주목받고 화려하게 살기를 원하던 사람이었다.
하늘식품에서 경리를 하다가 대표인 은표를 꼬셔서 결혼한 것도 그래서였다.
당시만 해도 그녀가 유혹할 수 있는 가장 돈 많고 잘나가는 남자가 은표였으니까.
하지만 은표는 사업을 더 확장시키기는커녕, 신제품 개발에만 공을 쏟았다.
그러니 찬숙은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돈을 더 많이 벌어서 가져다줘도 시원찮을 판에 돈이 있어도 기술개발에 다 투자하고 자신에게는 쥐꼬리만 한 월급뿐이었으니.
그나마 여 대표의 아내로 여기저기 얼굴 보이며 사교계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낙이었다.
그마저도 하늘식품이 망하면서 그런 생활이 어려워지고 아는 사람들과도 연락이 끊기다시피했는데…….
은하의 결혼으로 다시 자신에게 줄을 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지니 찬숙은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신혼여행 다녀오면 언제 집에 들를지 상의해서 미리 연락해. 나도 준비를 해야 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최 서방한테 내 얘기 잘 하는 거 잊지 말고.”
찬숙은 강조하듯 말하고는 신부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간 뒤 은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찬숙이 조금 변했다고는 하나, 같이 있으면 긴장되는 건 사실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신부대기실 문이 다시 열리며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은하는 들어오는 사람을 확인한 순간, 행동을 멈추고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성우 오빠…….”
은하는 성우를 보고 처음에는 너무 놀랐다가 이윽고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그날 이후 몇 번이나 전화를 해도 받지 않던 그였다.
얼마나 실망했을지 알지만, 정식으로 사과도 하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식에 나타나니, 은하는 너무 감격해서 말이 다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볼 거 없어. 아직도 난 너 미우니까.”
“그래도 와줘서 너무 고마워요.”
성우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은하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저릿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은하가 불행해지는 것을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계약으로 이용당하는 이 결혼은 말이 안 되는 거라고.
그런데 도훈의 말을 듣고 보니, 그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은하가 다른 누구와 결혼을 한다고 했더라도 충격을 받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어리게만 봤기에 그녀가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결혼 소식을 들었던 그날, 왠지 그대로 보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주차장까지 쫓아갔지만, 그곳에서 도훈과 은하가 키스하는 걸 보고 성우는 제 마음을 완벽히 깨달았다.
이건 분명히 은하를 좋아하는 거였다. 그것도 여자로.
키스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너무 아파서 한동안 숨을 쉴 수조차 없었으니까.
그렇게 제 마음을 깨닫고 나니 몇 날 며칠을 잠을 못 잘 정도로 괴로운 날들이었다.
서른두 살이 되도록 제 마음 하나도 못 알아채다니.
그걸 이제야 깨달은 자신이 너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은하의 전화도 받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가 너무 혼란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니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주 절망적인 건 아니었다.
은하가 정말로 도훈을 좋아해서 결혼하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도훈은 몇 년만 살다가 이혼할 여자를 찾는 상황이었으니, 은하는 몇 년 후면 자유로워질 몸이었다.
그러면 몇 년 뒤에는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너 결혼 축하해주러 온 거 아니야. 그럴 결혼도 아니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어.”
“하고 싶은 말이요?”
은하가 촉촉이 젖은 눈을 반짝이며 성우를 바라보았다.
“기다릴게.”
“네?”
“이 결혼, 정상적으로 하는 거 아니잖아. 나 다 이해할 수 있어. 네가 얼마나 절박한지도 알았고.”
왜 이전에는 못 깨달았을까.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바보처럼 도훈에게 은하를 보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성우는 이제라도 바보같이 굴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까…… 너 이혼할 때까지 기다린다고, 나.”
은하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몰라서 눈을 끔벅였다.
“오빠, 그게 무슨…….”
“도훈이랑 결혼해서 원하는 거 얻고, 다시 돌아와. 그리고 그땐 내가 너 이렇게 괴롭게 안 만들어.”
사실 성우도 내로라하는 집안의 아들이었다. 스스로 티를 안 내서 그렇지.
그러니 은하가 원한다면 돈도 충분히 줄 수 있었다.
도훈과는 다르게 자신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니까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 뭐든 다 할 각오가 돼 있었다.
“우선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도훈이가 속 썩이거나 말 안 듣거나 할 때 연락해. 내가 힘이 돼 줄 테니까.”
“아……. 그럼 날 용서해주는 건가요?”
“용서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네 선택을 존중할 거고, 다만 나중에 이혼하게 되면 나에게도 기회를 줘.”
은하는 여전히 성우의 말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자신을 용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덕분에 은하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
결혼식이 끝난 뒤 두 사람은 바로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도훈의 출장이 미리 잡혀 있어 어쩔 수 없이 온 곳이었다.
하지만 은하는 오히려 특별하게 느껴졌다.
5년 전, 그와 처음 만났던 라스베이거스라니.
사실 외삼촌인 찬우를 생각하면 당연히 다시 오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이곳에서 도훈과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나름 애틋한 곳이기도 했다.
그때는 상상이나 했을까.
그 남자와 결혼을 해서 라스베이거스로 다시 신혼여행을 올 거라는 걸.
그것도 서로의 필요에 의한 계약결혼을 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기막힌 인연에 은하는 씁쓸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어? 여기…… 네요.”
“왜, 싫어?”
하필 호텔도 그날 도훈과 밤을 보낸 그곳이었다.
“아뇨. 그럴 리가요.”
라스베이거스 중에서도 아주 화려했던 호텔이라 기억을 하고 있었다.
도훈이 미리 연락을 해놓았는지 호텔에 도착하니 한국인 매니저가 쫓아나왔다.
“본부장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깍듯했지만 꽤 친분이 있어 보였다.
매니저가 뒤에 서 있는 은하를 보고 잠시 놀라서 도훈을 쳐다보았다.
“결국 찾으셨군요.”
“네. 직접은 아니지만.”
도훈이 피식 웃으면서 대답을 했다.
은하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두 분이 인연은 정말 인연이었나 봅니다. 결혼까지 하시고. 따라오시죠.”
매니저는 웃으면서 앞장서서 걸었다.
도훈이 따라가며 은하를 챙겼다.
“가지.”
“아, 네.”
세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룸으로 이동했다. 이곳 호텔에서도 최고층에 만들어진 VIP 룸이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매니저가 가고 나니, 단숨에 적막이 흘렀다.
결혼까지 한 사이인데도 그와 룸에 단둘이 있는 게 사뭇 긴장이 됐다.
나름 신혼여행이라 그런 걸까.
은하는 긴장된 마음을 풀기 위해 밖이 환히 내다보이는 통유리창으로 향했다.
화려한 라스베이거스가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너무 예뻐서 한동안 시선을 고정하고 보고 있으니 도훈이 뒤에서 말했다.
“저녁은 룸서비스로 간단히 먹지. 내가 바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도훈은 출장을 온 거였는데, 은하는 잠시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당연히 가짜 결혼보다는 중요한 일이 먼저였다.
“대신 최대한 일찍 오도록 하지.”
도훈은 괜히 마음이 안 좋아서 덧붙였다. 어쨌거나 신혼여행이라고 왔는데, 오자마자 혼자 둬야 하는 게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괜찮아요. 천천히 일 보고 오세요.”
“그래.”
이번에도 은하는 괜찮다고 태연히 대답했다.
도훈은 그게 더 마음이 쓰였다. 정말 괜찮은 건지, 아닌지 헷갈려서.
“참, 그런데 아까 그 얘기는 뭐예요?”
“무슨 얘기?”
“절 찾았다는 얘기…….”
은하는 제 입으로 옮기면서도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도훈이 날 찾았다고? 그럴 리가.
혹시 그렇게 사라진 게 괘씸해서 혼내려고 찾은 건가?
은하의 머릿속에 별별 상상이 그려지는데, 도훈이 입을 열었다.
“맞아. 내가 당신을 찾았거든. 며칠 동안 이 일대를 다 뒤졌지.”
“네?”
“심지어 CCTV도 확보해서 몇 시에 나갔는지도 확인했으니까.”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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