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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도 없이 결혼-26화 (26/72)

26화.

도훈이 찬숙을 보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제가 깍듯하게 대하고, 생활비를 약속드린 이유는 은하 씨 어머니라서입니다. 어머니 같지도 않은 사람을 어머니라 부르며 챙겨드릴 이유는 없다는 거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도훈은 제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방금까지 비위를 맞춰주며 깍듯하게 웃던 모습을 얼굴에서 싹 지워냈다.

찬숙은 황당해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너무 치욕스러워 속으로 은하 욕이 절로 나왔다.

도대체 도훈에게 무슨 말을 했기에 그가 이렇게 나오나 싶어서.

어쨌거나 장모 자리인데, 이렇게 막말하는 것은 분명 은하의 농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은하가 그래? 내가 자기 괴롭혔다고? 도대체 뭐라고 하던가?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어릴 때부터 키워준 은혜를 고마워하기는커녕 이렇게 뒤통수를 치네. 이러니 내가 걔가 곱게 안 보이는 거야.”

찬숙은 억울한 만큼 길게 울분을 토해냈다.

하지만 도훈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보다 한껏 더 차가워진 미소로 찬숙을 보며 대꾸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마주 앉아 이런 서류를 내미는 일도 없었겠죠. 제가 그런 파렴치한에게 생활비를 줄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서요.”

도훈이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찬숙은 소름이 쫙 돋는 기분이었다.

앞으로는 정말로 은하에게 조금이라도 잘못했다가는 생활비는커녕, 아예 어머니로 인정도 안 해 줄 분위기였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엄만데, 딸에게 예의를 갖추라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이제 내 여자이기도 하니까요. 누가 내 것을 건드리는 것을 제가 아주 싫어해서요.”

찬숙은 억울하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할 수 없었다.

도훈이 건넨 종이에는 매월 500만 원의 생활비를 지원한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매월 500만 원이면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다만 은하와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만 유지되며, 찬숙이 은하에게 함부로 대하거나 은하가 원하는 경우 모든 지원이 끊긴다고 돼 있었다.

찬숙은 모욕감에 입술을 말아 물며 속으로 생각했다.

‘여은하, 네가 언제까지 이렇게 떵떵거리며 사는지 보자.’

어차피 은표가 죽으면 천애 고아에다가 제일가에서 바로 버림받을 게 뻔했다.

물론 도훈은 진심인 듯 했지만 세훈이 차기 후계자가 되기라도 하면, 그 역시 끈 떨어진 연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불쌍한 애 봐준다 생각하고 가식적으로 조금 잘해주는 것쯤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러다 은하가 시궁창에 빠지면, 그때 제대로 비웃어주면 되니까.

생각만 해도 고소해서 기분이 한결 나아진 찬숙은 마침내 도훈이 내민 서류에 사인했다.

“좋아. 그러지.”

“그럼, 앞으로는 내 아내에 대한 예우를 기대하겠습니다, 어머님.”

도훈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

결혼 준비는 착착 진행됐다. 혼수는 생략했기에 은하는 예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하루, 도훈이 불러서 나가 보니 주얼리 매장이었다. 그것도 아주 고급스럽고 화려한 브랜드로, 딱 봐도 평범한 예물을 취급하는 곳은 아니었다.

“여긴 왜……?”

“다 생략해도 예물은 맞춰야지.”

은하는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는데 그에게 예물을 받는 것이 민망해서 작게 속삭였다.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도훈의 고집이 만만치 않았다.

“반지도 없이 결혼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하물며 제일가의 며느리가 되면서.”

“아…….”

당연히 반지 정도는 형식상 맞출 수도 있겠지만, 직원들이 내놓은 제품들은 하나같이 너무 고가인 데다 반지와 목걸이, 심지어 팔찌와 귀걸이까지 세트 구성이었다.

“원하는 거 골라. 가격 생각하지 말고.”

“그냥…… 간단한 거 하고 싶어요.”

은하는 진심이었다. 제 눈에 보이는 이런 화려한 것들 말고, 심플한 링 반지 하나면 족했다.

“안 되겠군. 이걸로 하겠습니다.”

결국 도훈이 직접 한 세트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게 직원이 보여준 것 중 가장 비싸고 화려한 거여서 은하는 깜짝 놀랐다.

“도훈 씨, 이건 너무 비싸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 정도도 못 받아서 절절매면, 앞으로 내 아내 노릇은 어떻게 하려고 하지?”

비록 계약결혼이지만, 재벌가 후계자의 아내답게 행동하라는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주의할게요.”

은하는 할 수 없이 도훈이 사준 예물을 받아 들었다. 잘 간직했다가 3년 뒤 돌려준다고 생각하면, 나름 괜찮을 거라며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앞으로 조금 더 바빠질 거라 본식 외에 다른 건 다 생략할 거야.”

“아…… 네.”

“그런데 이런 것까지 생략하면 결혼하는 기분이 안 날 테니까.”

혹시나 내가 서운해할까봐 배려해주는 걸까.

어차피 진짜 사랑해서 하는 결혼도 아닌데…….

그런 건 하나도 바라지 않았고 서운하지도 않았는데 도훈은 혼자 마음을 쓴 모양이었다.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많은 감정이 스쳤지만 은하가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였다.

이후 정말로 본식 외에 다른 건 모두 생략되었다. 신혼여행도 도훈의 해외 출장과 맞물리게 조정해서 라스베이거스로 정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이 가까워질수록 도훈의 얼굴은 점점 보기 힘들어졌다.

안 그래도 업무가 많은데 결혼식과 신혼여행으로 며칠을 빼는 게 쉬운 일이 아닌 듯했다.

넓은 집에 혼자 지내는 날이 많아지자, 은하는 도훈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그가 보고 싶은 건 물론이요, 잠깐이라도 들르는 날에는 기분이 좋아지고, 아예 들어오지 못하는 날은 심란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문득 은하는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를 깨닫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러지 말자. 도훈 씨와 나는…… 서로 계약결혼일 뿐이야. 그러니까 이런 감정을 느끼면 안 돼.”

***

그렇게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은하와 도훈은 아침부터 서둘러 메이크업을 받고,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다음 결혼식 장소로 이동했다.

제일그룹 장손과 망한 식품 회사 딸이 결혼한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는 이슈거리였고, 덕분에 비공개로 진행되는 오늘 결혼에도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그래서 평소 잘 떨지 않는 은하도 오늘은 무척 떨렸다.

은하는 떨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제발 오늘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렇게 떨 거 없어. 비공개로 하는 데다 금방 끝내 달라고 부탁해놨으니까.”

“네.”

사실 은하가 떨리는 이유 중에는 도훈도 있었다. 그를 오랜만에 보는 데다 턱시도 입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도훈이 시간을 많이 못 내는 관계로 예복을 맞출 때 따로 갔기 때문이었다.

워낙 몸이 좋으니 어떤 옷을 입혀놔도 잘생겼지만, 예복을 입은 모습은 정말 가슴 떨리게 멋있었다.

평소 은하는 남자를 볼 때 얼굴을 보지도 않고, 나이 차이가 나는 남자는 마음에 둔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도훈을 만난 뒤부터 기준이 달라진 느낌이었다.

오히려 연상 쪽이 어른스러워서 좋은 것 같고, 제 또래 남자들은 눈에 차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도훈이 그런 마음을 알 턱이 없으니, 은하는 혼자서 심호흡을 하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뿐이었다.

“오늘 예쁘군.”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도훈의 칭찬 한마디에 은하의 심장은 속절없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도 은하가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은하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겨우 대답했다.

“결혼준비는 장모님과 같이했다고?”

“네.”

사실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스트레스를 받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별거 아닌 걸로 찬숙과 벌일 신경전이 예상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찬숙은 모든 것을 은하가 원하는 대로 오케이를 했다.

사소한 걸로도 괜히 시비를 걸던 사람인데 갑자기 바뀐 찬숙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쨌든 은하는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결혼식을 준비할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도 신경을 좀 더 썼어야 했는데. 웨딩드레스 보러도 같이 못 가고, 신혼여행도 원하는 데로 가지 못해서 서운하겠군.”

“아뇨. 그렇지 않아요. 바쁜 거 다 아는데요.”

은하가 그렇지 않다며 바로 대꾸했다.

요즘 은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다잡았다. 도훈과의 결혼에서는 그런 사사로운 걸 바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서운하지 않았다. 그 역시 바빠서 함께하지 못했을 뿐 챙겨주려던 마음이 전해졌으니까.

하지만 도훈은 은하의 말에 멈칫하고 말았다.

그래도 내심 서운해할 줄 알았는데.

자신은 은하와 같이 결혼을 준비하지 못해서 아쉬웠기 때문일까. 시간을 내려고 해도 쉽지 않았던 상황이 미안했기도 했다.

그런데 은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니, 이상하게 그 사실이 거슬렸다.

하지만 그런 미묘한 감정을 티 낼 수도 없는 노릇. 도훈이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다행이고. 얼른 끝내고 쉬도록 하지.”

“네.”

은하도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했습니다.”

때마침 운전기사가 결혼식장에 도착했음을 알렸고, 은하는 도훈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주소|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역로3길 40-36 B동 710호 (신내동)

전화|02)906-7768 / 팩스|02)906-7769

값 100원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와이엠북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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