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가 뜨거운 사이라는 것이 본가에 들어갈 테니, 아주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네요…….”
무슨 말을 더할 수 있단 말인가. 은하는 그저 도훈이 하자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의 눈빛 하나에도 옴짝달싹 못 하는 중이니까.
“물론 결혼 후의 얘기야. 당장 그런다고 하면, 부담스러워 이 집에 들어오지도 않을 거잖아.”
아…….
은하는 아쉬움인지 안도감인지 모를 탄식을 속으로 내뱉었다.
그의 말이 맞는데, 왜 갑자기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지 저도 제 속을 알 수 없었다.
“일이 많아서 평소에도 집에는 잘 못 들어왔어. 결혼까지 하려면 앞으로 더 바쁠 테고.”
은하는 충분히 상황을 짐작했다. 그처럼 바쁜 사람이 집에 꼬박꼬박 들어온다는 게 더 이상했다.
“그래서 당분간 회사와 가까운 호텔에서 지낼 생각이야. 당신은 집에 적응한다고 생각하고 여기서 편하게 지내.”
도훈의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은하는 여전히 갈팡질팡했다. 자신 때문에 그를 불편하게 만들 순 없었다.
게다가 그녀도 지금은 도훈과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은하가 용기를 내어 도훈을 불렀다.
“저기 도훈 씨…….”
“응?”
“저…… 부담스럽지 않아요.”
“뭐가?”
“도훈 씨랑 지금부터 같이 지내도 좋다고요.”
이 얘기가 뭐라고 은하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도훈은 의외다 싶어 당황하면서도 기분 좋은 미소가 입가에 피어났다.
“어차피 결혼해야 할 사이고, 당신과 같이 있어서 불편할 건 없어요. 오히려 제가 이 집에 들어와서 당신이 불편할까 걱정이…….”
“불편할 텐데.”
“네?”
“아까 말 못 들었어? 이 집에서 시도 때도 없이 당신을 안을 거라는 말.”
“…….”
“그래도 괜찮나?”
“……네.”
은하의 양 볼이 또다시 빨갛게 물들었다. 이런 얘기는 해도 해도 적응이 안 됐다.
도훈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은하가 사랑스러워 가슴이 뻐근해져 왔다.
“그렇다면 실망시킬 순 없지.”
“네?”
은하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이, 도훈은 이미 그녀를 번쩍 들어 안고 소파에 뉘였다.
“도훈 씨…….”
“지금부터 하려고.”
“지금 당장이요?”
어느새 도훈 아래에 깔린 은하는 이채가 도는 그의 짙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얼굴이 아까보다 한층 더 달아올랐다.
“아침에 안 그래도 더 하고 싶었는데, 참았거든.”
“그래도, 지금 당장은 좀…….”
“왜?”
“밖이 너무…… 환해요.”
은하가 부끄럽다는 듯 밖으로 시선을 잠깐 돌렸다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직 오후였다. 게다가 통창이라 밖이 훤히 보였다.
물론 개인 정원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부끄러웠다. 고용인들도 쉽게 들락거려 언제든 들어올 수도 있는 데다, 왠지 정원에 가득한 나무와 꽃들이 그들을 흥미롭게 지켜볼 것만 같았다.
“난 그래서 더 좋은데, 오히려 더 흥분돼.”
“그러지 말고, 커튼이라도 치면 안 될까요?”
도훈이 짓궂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은하가 저도 모르게 울상을 짓자, 도훈은 더 흥분이 됐다.
“벌써부터 울상을 지으면 안 되지. 이제부터 제대로 울려줄게.”
도훈은 은하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며 빠르게 그녀의 옷을 벗겨냈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두 사람은, 통창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오후햇살을 받으며 빠르게 엉켜들었다.
***
월요일 아침부터 도훈은 업무에 파묻혀 있었다.
결혼식을 최대한 당기기로 한 데다 창립기념일도 곧이었다. 그래서 짧은 시간도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은하만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저…… 부담스럽지 않아요. 도훈 씨랑 지금부터 같이 지내도 좋다고요.’
깜찍하기도 하지. 어떻게 그런 말을…….
불편할까봐 집을 양보하려 했는데, 순식간에 동거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솔직히 그녀를 놀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하겠다는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말이 진짜가 돼 버렸다.
그녀랑 같이 지내게 되면서 도훈은 정신을 못 차리고 폭주 중이었다. 그래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고, 점점 더 안고 싶으니 정말로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안을 때마다 마음 한편으로는 불안이 올라왔다.
아직 세훈과 하늘식품이 관련됐다는 정황은 잡지 못했다.
아직까지는 제보만 있을 뿐 하늘식품의 기술자료를 빼돌렸다는 증거도 없고, 심지어 신원이 확실한 증인도 없었다.
이렇다 할 증거가 없으니 세훈이 정말로 하늘식품 제품을 카피했는지 확인할 길도 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그저 자신의 기우이기를, 도훈도 바라는 바였다.
“본부장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손님?”
도훈이 세훈 생각으로 복잡한 머리를 겨우 식히고, 다시 업무에 착수하려고 할 때였다.
문 앞을 지키는 양 비서가 들어와 손님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장모님이시랍니다.”
“장모님?”
도훈은 찬숙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은하를 대하는 모습이 매번 신경 쓰여서 바쁜 일 끝나면 따로 한번 만나야지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연락도 없이 막무가내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들 생각은 전혀 안 하는, 안타깝게도 도훈이 제일 싫어하는 부류 중에 하나였다.
“들여보내요.”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은하의 새어머니고, 이제는 장모님이니까.
어차피 할 말도 있었으니 마침 해결하면 딱일 듯했다.
왠지 그 일 때문에 찾아온 것 같지만.
“알겠습니다.”
양 비서가 나가자 도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만졌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짐이 있으면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똑똑.
그러고 나서 곧이어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도훈의 수락과 함께 양 비서가 찬숙을 데리고 들어왔다.
“최 서방.”
찬숙은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들뜬 목소리로 도훈을 불렀다.
그러면서 그녀의 눈은 자연스레 넓고 고급스러운 집무실을 훑고 있었다.
방금 전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정말로 대단한 집안과 사돈이 되었음을 다시 한번 느끼고 있었다.
다만, 명색이 장모 체면에 대놓고 좋아하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는 중이었다.
“어쩐 일로 연락도 없이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내가 우리 사위 찾아오는데 일이 있어야만 오는 건 어쩐지 좀 삭막하네. 지나가다 들렀어. 회사도 궁금하고 우리 사위 일하는 모습도 궁금하고.”
찬숙은 소파에 앉으며 대꾸했다. 사실은 도훈의 입지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위해 온 거였다. 귀로 듣는 거랑 눈으로 보는 거랑은 다르니까.
또한 선주와 세훈이 저지른 짓을 도훈은 알고 있나 궁금하기도 했다.
찬숙은 요즘 불난 집 불구경하듯, 제일가 사람들을 기웃거리는 게 왜 이리 재밌는지 모를 일이었다.
도훈이 맞은편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차는 뭐로 드시겠습니까?”
“난 녹차로 줘. 요즘 은하 결혼문제로 신경을 많이 썼더니 피부가 좀 까칠해져서.”
찬숙의 말에 도훈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일부러 결혼문제를 거론하며 자신의 노고를 어필하는 찬숙 같은 스타일을 도훈은 많이 봐왔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지도 알고 있었다.
“양 비서님.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양 비서가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갔다가 이내 녹차를 두 잔 가져왔다.
잠시 후 다시 둘만 남게 되자 도훈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안 그래도,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서 만나 뵙자고 할 참이었습니다.”
“드릴 말씀?”
“네.”
도훈은 책상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다가 테이블 위에 뒤집어 놓았다.
서류 내용이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게 뭔데?”
찬숙이 호기심이 발동하여 서류를 집으려고 하는데 도훈의 손가락이 먼저였다.
도훈은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을 종이 위에 올리고는 엄지로 다시 톡톡 두드렸다.
“일종의 계약서입니다. 생활비조로 어머님께 돈을 보내드리겠다는.”
찬숙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머, 우리 최 서방 일 처리가 정말 시원하네. 안 그래도 생활비를 준다고는 하는데 어떻게 주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은하도 별말도 없고 말이야.”
찬숙이 신이 나서 다시 한번 서류로 손을 뻗었지만, 도훈은 종이를 제 쪽으로 슬쩍 끌어다 놓았다. 그러고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네.”
도훈이 느긋하게 소파 뒤로 몸을 기댔다.
“뭔데?”
찬숙은 어쩐지 조바심이 일었다. 관계가 역전된 느낌을 받은 건 그 순간이었다.
“이제부터라도 은하 씨에게 예의를 갖춰 대하세요.”
“뭐?”
찬숙이 기가 막혀 도훈을 쳐다보았다.
“지난번 ‘설향’에서, 그리고 상견례 때 저희 집 대문 앞에서 하시는 걸 봤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식으로 은하 씨를 모욕하고 함부로 말씀하시는 거, 제가 용납 안 합니다.”
도훈은 사실 벼르고 있었다. 은하와 찬숙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이미 ‘설향’에서 상황을 듣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안 좋다는 것을 상견례 자리에서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찬숙은 그곳이 상견례라는 것도 까먹은 듯 은하를 싫어하는 티를 팍팍 냈고, 은하는 그걸 느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도훈은 그게 더 용납이 안 됐다. 얼마나 많이 겪었으면 그 정도로 무감해질까 싶어서.
그런 모욕을 겪으면서도 견디는 이유는 아마도 은표 때문이겠지.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찌 됐건 내 사람이니까 더 두고 보기 싫었다.
제대로 챙겨주지도 않으면서, 어머니란 이유로 그녀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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