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상견례가 끝나고 도훈과 은하는 본가를 나서는 찬숙을 배웅했다. 그녀를 데리고 왔던 운전기사가 다시 차를 대기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들어가세요.”
“그래, 그럼. 나 들어가네. 최 서방.”
지금까지 ‘본부장’이라고 부르며 도훈을 어려워하던 찬숙은 상견례가 끝난 뒤 최 서방이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대했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신이 나 보였다.
분명 아침에 집 앞에서 만날 때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는데 갑자기 변덕을 부리니 은하는 얼떨떨하기만 했다.
“우리도 그만 가지.”
“네.”
찬숙이 가고 나서 도훈이 말했다. 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차에 올라탔다.
불편한 그의 집에서 나와 찬숙마저 집으로 돌아가자 은하도 이제야 제법 숨이 쉬어졌다.
“고생했어.”
“제가 뭘요. 도훈 씨가 고생 많으셨어요.”
자신과의 결혼 때문에 다들 도훈에게 뾰족하게 구는데 은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괜히 은하가 끼어들어 도훈을 더 곤란하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도훈에게 이미 얘기를 들어서 환영받지 못할 건 알았지만, 그래도 씁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제 결혼하면 더 하겠지.
그나마 이학이 은하를 크게 싫어하는 느낌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결혼생활이 순탄하려면 이학에게라도 잘 보여야 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은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아침부터 도훈과의 정사도 있었고, 긴장이 풀리니 노곤해진 탓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뜨니 낯선 차고지였다.
그사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심지어 시트도 내려가 있고 몸 위에는 얇은 담요도 덮여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잔 걸까.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4시가 넘어 있었다.
상견례가 끝난 것이 2시쯤이었는데, 차 안에서만 2시간을 넘게 자버렸다는 말이었다.
은하가 꼼지락거리며 일어나 차 시트를 올리자 그제야 은하가 깬 걸 알아챈 도훈이 물었다.
“일어났어?”
“깨우지 그러셨어요?”
“너무 곤히 자길래. 오늘 아침에 내가 지은 죄도 있고.”
안 그래도 부끄러운데 도훈의 말이 심장에 콕 와 박히면서 심장박동수를 또 높이고 있었다.
“근데…… 여기가 어디예요?”
은하는 괜히 도훈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아침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아랫배가 조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얼른 화제를 돌렸다.
차고지가 낯설어서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이곳이 어디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기도 했다.
“저, 병원으로 데려다주는 거 아니었어요?”
“앞으로는 여기서 지내.”
“네?”
“아버님 걱정되는 거 알지만, 이제 결혼식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몸 관리해야지. 난 누구든 아픈 거 딱 질색인 사람이라. 당신 몸은 당신이 챙겨.”
은하는 괜히 뜨끔했다. 안 그래도 어제 오늘 쉬어보니 은하도 알 것 같았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는 것을.
병원에서 지낼 때와 컨디션이 확실히 달랐다.
게다가 아직도 피로가 안 풀렸는지 차에서 내리 두 시간을 또 자버렸다. 이게 정상은 아니니 은하도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기에 지내라고 하는 걸까.
은하가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리자 도훈이 친절히 설명했다.
“내 집이야.”
은하가 당황하여 도훈을 쳐다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신혼집이 되겠네.”
“아…….”
“만약 마음에 안 들면 말해. 다른 데 알아보라고 할 테니까.”
아무래도 같이 살 집과 관련된 일인데 혼자서 정한 게 마음에 걸렸는지 도훈이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도훈은 상견례 때 다른 집을 구하지 않고 자신이 사는 집에 들어왔으면 한다고 밝혔다.
은하 역시 이견은 없었다. 까다로운 성격도 아니었고, 어차피 3년이면 끝날 결혼생활에 또 다른 집을 얻는 것도 불필요한 일처럼 느껴졌다.
“아니에요. 전 이 집으로도 좋아요.”
“보지도 않고?”
“네? 아…….”
정곡을 찔리자 은하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가 살고 있는 집에 엄청난 하자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내려. 집 보여줄 테니까.”
“네…….”
도훈은 그 말만 남기고 차에서 먼저 내렸다. 은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뒤따라 내렸다.
차고지를 나와 집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잔디밭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도훈의 집은 놀랍게도 마당이 달린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
은하가 입을 떡 벌린 채로 잘 다듬어진 정원을 보고 있으니 도훈이 손을 잡아끌었다.
“놀랄 거 없어. 마당 있는 집을 좋아하는 것뿐이니까.”
도훈도 알고 있었다. 젊은 남자 혼자서 정원 달린 독채에 사는 게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지.
하지만 그의 취향은 한결같았다. 집에서나마 사계절을 뚜렷이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취향이었기에 더 놓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정원에는 어머니와의 추억이 참 많았으니까.
“와…….”
은하는 도훈을 따라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거듭 감탄사를 내뱉었다.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적당한 규모에 블랙과 화이트로 꾸민 심플한 인테리어도 마음에 쏙 들었지만, 거실 한쪽을 전부 차지하는 통유리창이 은하의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그 창을 통해 안에서 내다보는 바깥 풍경도 너무 예뻤다. 봄이라서 그런지 새싹들이 자라는 것까지 다 보였다.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군.”
“너무…… 정말 너무 예뻐요.”
도훈이 다가온 것도 그제야 깨달은 은하가 감탄하며 내뱉었다.
그냥 마음에 든다는 말로는 다 표현이 되지 않았다.
집 안에 있는데 이렇게 싱그러운 기분이라니.
솔직히 그가 사는 곳이니 당연히 좋은 집일 거라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어떤 집이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사는 데 불편하지만 않으면 되니까.
그런데 은하는 통유리창에 비친 정원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나 이런 집 좋아한다고. 딱 내 취향의 집을 찾았노라고.
“그럼 오늘부터 여기서 지내. 짐 가져올 거 있으면 박 실장님께 알려주고.”
“오늘부터 당장이요?”
은하가 당황하여 도훈에게 물었다.
“지낼 곳이 있는데 굳이 병원에 있을 필요 없잖아.”
“…….”
은하는 뜨끔했다. 도훈은 마치 제 마음을 다 알고 있는 듯 말했다.
아빠 은표 핑계를 대고 있지만, 실은 찬숙이 있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더 병원에서 버티고 있었다는 걸.
하지만 그녀가 여기로 들어온다는 것은 결혼하기 전부터 같이 살자는 말인데, 그래도 되는 걸까 망설여졌다.
게다가 이렇게 바로 들어오면 침실은 같이 쓰게 되는 걸까, 아니면 따로?
이런 생각부터 하는 게 우스웠지만 은하로서는 심각한 고민이었다.
그때 도훈이 또 한 번, 은하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입을 열었다.
“침실은 같이 써야지. 고용인들이 수시로 드나드니까.”
“아…….”
하긴 그랬다. 아무리 결혼 전이라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각방을 쓸 리 만무하니까.
마음의 준비도 없이 당장 이 남자와 같은 방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침의 일이 절로 떠오르면서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그 고용인들이 우리를 감시할 거고.”
“네?”
감시라는 말에 은하가 놀라서 도훈을 보았다. 하지만 도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붙인 사람들이니까. 날 감시하는 용으로.”
은하는 충격으로 머릿속이 멍했다. 그럼 이곳에 살면서 계속 감시를 받았다는 건가.
“아니, 왜……?”
“글쎄…….”
도훈이 옅게 웃었다.
그도 선주가 자신에게 왜 그렇게 억하심정을 갖고 있는지 잘 이해는 되지 않았다. 자신이 그런 감정을 가지면 몰라도.
“도둑이 제 발 저린 걸 수도 있겠지.”
멀쩡한 가정을 파탄 낸 장본인이니 언젠가 도훈에게 허를 찔릴까 두려운 걸 수도.
“그걸 왜 보고만 있어요? 거부하고 다른 사람을 뽑으면 되잖아요.”
은하는 그렇게 감시를 당하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도훈이 이해가 안 돼 물었다.
도훈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봤자, 새로 구한 사람들은 매수 안 될 것 같아?”
“아…….”
“오히려 그런 짓을 하면 내가 저 몰래 무슨 짓을 꾸미는구나 확신을 갖고 더 감시하겠지.”
이번에도 도훈의 말이 맞았다. 감시를 하겠다 마음먹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테니까, 책만 잡히는 꼴이 될지도 몰랐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하게 두고, 나는 나대로 살면 편해. 나 역시 원하는 걸 얻으려면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니까.”
도훈은 그들을 떠올리며 조소했지만, 은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재벌가의 권력다툼은 다 이런 걸까.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고.
제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데다 집에서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도훈이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제 당신과 결혼하면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지.”
“……어떻게요?”
“나 혼자 있을 때야 거리낌이 없지만, 아내가 있으면 조심스럽겠지. 특히 우리가 시도 때도 없이 같이 뒹군다면 그들이 오는 시간을 줄일 수도 있고.”
은하의 얼굴이 홧홧하게 타올랐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자주 뒹굴자는 말처럼 들려서였다.
“그게 신혼이니까. 물론 우리는 그렇게 노력해야 하는 사이기도 하고.”
도훈이 은하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은하는 그 집요한 눈빛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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