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집에 들어온 도훈은 찬숙과 은하를 정원에 있는 다이닝 공간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준비돼 있었고, 고용인들이 바쁘게 오가며 부지런히 맛있는 음식을 세팅하고 있었다.
찬숙은 열심히 내부의 모습을 훑었다. 건물도 몇 채나 있었고, 정원도 학교 운동장 크기는 족히 될 터였다.
다시 한번 은하가 이런 집에 시집간다니 배가 아팠다.
하지만 어쩌랴. 못마땅해도 빨리 해치우고, 받을 거 받는 게 자신에게도 더 이익이었다.
찬숙이 그렇게 집 안 풍경에 감탄하며 머리를 굴리는 사이.
도훈이 은하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섰다.
“긴장돼?”
“조금이요.”
긴장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었다.
게다가 도훈은 연인처럼 대하는 연기가 어쩜 이렇게 자연스러운지.
저를 사랑스럽게 쳐다볼 때마다 은하는 이것이 연기라는 것도 잊고 심장이 덜컥덜컥 내려앉았다.
게다가 찬숙 앞에서까지 예쁘다는 말을 들었으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자꾸만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만 참아. 최대한 금방 끝낼 테니.”
“감사해요.”
어차피 오래 끌어봤자 서로 불안한 자리였다.
그래서 빨리 끝내겠다는 말일 텐데, 은하는 도훈이 자신을 챙겨주는 것처럼 들려서 또다시 심장이 쿵쾅댔다.
잠시 후, 이학과 일준 그리고 선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훈과 하리까지는 굳이 참석할 필요 없다고 생각한 듯 따로 부르지 않은 것 같았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학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눈매는 날카로웠다.
찬숙은 어쩐지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지만 웃으면서 대꾸했다.
“아이고. 아닙니다, 회장님.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찬숙이 뒤에 서 있던 은하를 불렀다.
“뭐 해, 얼른 인사하지 않고.”
“안녕하세요. 여은하입니다.”
“그래, 앉거라.”
이학이 자리에 앉자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가로로 긴 테이블에 이학을 중심으로 일준과 선주가 오른쪽에 앉고, 맞은편에는 찬숙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찬숙의 옆으로 각각 도훈과 은하가 자리를 잡으며 여섯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은하는 경직된 분위기가 익숙지 않아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었다.
이학은 한 기업의 총수답게 카리스마가 대단해 보였다. 일준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도훈과는 조금 다른 잘생김으로, 부드럽고 나약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도훈이 아버지가 여성편력이 심한 건 알고 있지?’
역시 사람은 겉으로 보는 거랑은 다른 건가.
은하는 사람 좋아 보이는 일준을 마주한 채 선주의 말을 떠올렸다.
선주는 여전히 냉랭하고 못마땅한 시선으로 은하를 보았다.
자리가 어려워서인가 누구 하나 편한 사람이 없었다.
“결혼식은 최대한 서둘러 했으면 합니다.”
도훈은 빨리 끝내겠다는 말을 실천하듯, 양가의 간단한 인사가 오고 간 뒤 바로 본론을 꺼냈다.
“말 나온 김에 빨리 해치우는 게 서로 좋을 테니까요.”
“그래, 나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이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혼집은 지금 제가 사는 곳에 몸만 들어오라고 할 작정입니다. 어차피 있을 거 다 있으니 혼수도 생략하고요.”
“그래도 혼수를 아예 생략하는 건 아니지 않아요, 아버님?”
옆에서 듣고 있던 선주가 끼어들었다.
“그래도 결혼이잖아요. 아무리 집안이 망했어도 명색이 재벌집에 시집오면서, 빈손으로 오는 건 아니죠. 세훈이 때는 집안의 가구 정도는 다 바꿨는데, 그렇게 차이 나면 들어올 새아가에게도 좋을 건 없고요.”
선주가 찬숙과 은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주변 사람들 보는 눈도 있고 격식은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버님.”
“결혼으로 장사하는 정략결혼도 아니고, 우리가 없어서 사돈댁 덕 볼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도훈이 예의를 갖춰 고고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선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도 인륜지대사야. 집안끼리 결합이고. 각자 도리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
“저는 제가 좋아서 하는 결혼에 도리 따져가면서 이런저런 조건을 달고 싶지 않습니다, 어머니.”
기분 나쁜 기색이 드러나는 말이 아니어도 도훈의 고집이 묻어나는 단호한 음성이었다.
“그냥 도훈이 말대로 해. 힘들어하는 사돈댁에서 뭘 받아도 부담스러울 게 아니냐.”
“아버님, 그래도 도리는…….”
“됐대도.”
이학이 잘라 말하니, 선주도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주가 제 편이 되어줄까 싶어 일준을 보았으나 그는 이런 일에 아무 관심 없다는 듯 초월한 표정이었다.
20년이나 이 집에서 살았건만, 이럴 때마다 이방인이 되는 기분에 선주는 자존심도 상하고 면도 서지 않았다.
한편 찬숙은 그렇게 일그러지는 선주의 표정을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
***
선주는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부엌에 들어와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도저히 표정 관리가 안 됐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집구석이야. 하나같이 다 마음에 안 들어.”
그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컵을 탁 내려놓을 때였다.
“저기, 사부인.”
“아, 깜짝이야.”
돌아보니 찬숙이 부엌 입구에 서 있었다. 선주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뾰족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사람 놀라게.”
“아휴, 놀라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전 그냥 사부인이랑 따로 할 얘기도 좀 있고 해서.”
“저랑요?”
“네.”
찬숙이 능글맞게 웃으며 선주를 보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어, 선주의 얼굴이 잔뜩 찡그려졌다. 하지만 할 말이 있다는 사람을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오세요.”
결국 선주는 찬숙을 데리고 별채로 갔다. 별채에는 손님방들이 많았는데 일이 있지 않고는 가족들이 잘 오지도 않을 뿐더러 조용히 얘기하기에 좋았다.
“얘기하세요. 무슨 일이신데요?”
선주가 잔뜩 경계를 하면서 물었다.
딱 봐도 허영심이 가득한 돈만 아는 여자 같은데 사돈이랍시고 친하게 구는 게 못마땅했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나 들어나 보자는 심정이었다.
“사돈, 제가 아까부터 쭉 지켜봤는데…… 저희 애가 마음에 안 드시죠?”
“네?”
이건 또 무슨 개념 없는 소리인가.
설마, 이런 걸로 트집 잡으려는 건가?
선주가 이마를 짚으며 찬숙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봐요!”
“그렇게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걔가 참 싫거든요.”
찬숙이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선주가 당황하여 찬숙의 얼굴을 살폈다. 이 여자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였다.
“친엄마가 아니라서 그렇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어릴 때부터 제 아빠 빽만 믿고 저한테 얼마나 함부로 했는지 몰라요.”
“…….”
몸서리를 치며 이야기하는 걸 보니 진심인 듯했다.
자신도 도훈의 새엄마로 살며 힘들었던 생각이 나면서 선주의 경계심이 조금은 풀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이 여자의 말을 언제까지 들어줘야 하나 점점 짜증스러워졌다.
“그래서 말인데, 사부인께서 데리고 지내면서 사람 좀 만들어주세요.”
“네?”
“혼수도 못 해가고 빈 몸으로 가는데 몸으로라도 때워야죠. 뭐든 시키세요. 걔는 그런 고생 좀 해봐야 하거든요.”
선주는 그제야 찬숙의 속내를 파악했다. 그러니까 자기 보고 못된 시어머니가 돼서 은하를 구박하라는 말이었다.
이제 보니 찬숙은 은하가 시집가서 사랑받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그만큼 미워한다는 뜻이고.
아마 자신이 도훈을 미워하는 것과 같으려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이가 없었다. 제가 뭔데 이래라저래라인지.
선주 또한 은하를 예뻐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명령하는 듯한 찬숙의 말투와 태도가 영 거슬렸다.
이 집 사람들이 자신을 만만히 보니까 이 여자까지 그러나 싶어서 열이 확 받았다.
“그 댁 딸을 어떻게 대할지는 제가 알아서 합니다. 당신이 왈가불가할 일은 아니에요. 도대체 어디서 감히…….”
“그럼요. 어련하시겠어요? 알아서 하시겠죠. 하지만 우리 도도하고 우아한 사모님께서 속은 타 들어가도, 겉으로는 티를 내지 못하실 거 아니에요? 아무튼 적어도 저는 걔 시집살이하는 거 찬성하니까 편하게 대하시라고 알려드리는 거예요.”
“허.”
뭐지? 이 거슬리는 말은?
왠지 자신을 비꼬는 듯해, 선주가 눈을 뾰족하게 만들어 찬숙을 보았다.
“그럼 저는 할 말 다 했으니까 나가보겠습니다, 사부인.”
황당해하는 선주를 내버려 두고, 찬숙이 빙그레 웃으며 먼저 일어났다.
별채를 나선 찬숙은 아주 통쾌했다. 선주를 보아하니 은하는 이곳에서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살고 싶은 사람들은 없을 터.
그렇게 은하의 시집살이가 따놓은 당상이라는 것도 즐거웠고, 늘 도도한 척하며 찬숙을 사람 취급도 안 하던 선주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것도 마음에 들었다.
은하가 재벌가로 시집가는 게 달갑잖던 마음은 어디를 가고 어느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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