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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도 없이 결혼-20화 (20/72)

20화.

오랜만에 푹 잤다. 아침 햇살에 눈을 뜨면서도 온몸이 개운해 기분 좋은 기지개가 절로 나왔다.

한국에 오고 나서 이토록 잘 잔 적이 있었던가?

안 그래도 불편한 집은 아빠가 없으니 더 바늘방석이었고, 그마저도 병원에 누워 있는 아빠를 생각하면 늘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 잠을 자도 자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아주 잘 자고 일어난 것이다. 참 별일이었다.

찬숙이 오고 나서는 집에서 이렇게 안락함을 느낀 적이 거의 없었는데. 오늘따라 이렇게 충만하게 만족스럽다니.

그러다 은하는 눈을 번쩍 떴다. 이곳이 집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 것이다.

그럼 이곳은…….

“잘 잤어?”

은하는 그 목소리 하나로 그녀가 있는 곳을 바로 알아차렸다.

제일호텔 2301호.

도훈과 함께 밤을 보냈고, 도훈이 불러서 다시 오게 된 곳.

그러니까 지금 여기는, 도훈과 함께 있는 곳이었다.

은하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런데 덮고 있던 이불이 내려가니 휑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숙여 몸을 보니, 가슴이 드러나 있었다.

이제 보니 옷을 입지 않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

은하가 얼른 이불을 끌어 올려 목까지 덮었다. 얼굴은 금세 벌겋게 달아올랐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두려움이었다.

‘설마 자는 동안 날 어쩌진 않았겠지?’

아무리 결혼할 사이라 하지만, 자는 동안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니까.

설마 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은하의 눈이 절로 뾰족하게 변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도훈은 어이가 없어서 픽, 헛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딱 봐도 자신을 오해하는 것 같은데, 차마 말은 못 하고 눈으로 노려보는 중이었다.

‘저러니까 진짜 고양이 같네.’

지금 은하의 모습은 마치 제 영역을 침범한 맹수에게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기분 나쁘다며 티를 팍팍 내고 있는 새끼 암고양이 같았다.

문제는 그런 고양이들이 너무 귀엽다는 거였고, 마찬가지로 은하도 귀엽게 느껴졌다.

어떤 상황인지 몰라 이불을 꼭 그러잡은 채 자신을 경계하는 모습이.

솔직히 지금까지는 취미가 없어서 몰랐는데, 어리니까 더 귀여워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상한 가학 심리인지 그 모습이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랬다간 당장이라도 경찰에 신고당할 것 같아 도훈이 입을 열었다.

“뭐지, 그 눈빛은?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 난 파렴치한이 아니라고.”

은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만졌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도훈의 화법을 이해하지 못한 듯 그녀는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결국 도훈이 깔끔하게 상황을 전달했다.

“당신이 상상하는 그런 일 없었다고.”

“그럼, 옷은 왜……?”

“샤워가운을 입고 자는 사람은 없지 않나. 불편해 보여서 벗겼어. 아무것도 안 입고 가운만 입고 자고 있던 사람은 당신이고.”

“아…….”

은하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붉게 타올랐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가 올 줄 알면서도 그렇게 무방비하게 잠들었으니.

그런데도 그를 오해하며 이상한 눈초리를 보낸 것이 부끄럽고 민망했다.

그나저나, 분명 소파에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 그럼 소파에서 침대까지 나를 옮긴 사람도…….

은하는 그 생각에 미치자 다시 도훈을 쳐다보았다.

“물론, 내가 안아서 옮겼어. 옮긴 뒤에 가운을 벗긴 거고.”

도훈이 은하의 생각을 읽은 듯 대답했다.

은하는 표정을 무너뜨리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의 팔에 안겨 침대에 옮겨졌을 생각을 하니 그것도 그것대로 민망했고, 가운이 벗겨진 제 알몸을 그가 아무 거리낌 없이 봤을 거라는 사실도 부끄러워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쉬라고 부른 거긴 한데, 그래도 너무 잘 자니까 당황스럽더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쉬라고…… 부른 거라뇨?”

은하가 빨개진 얼굴을 적당히 감춘 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도훈이 오기 전에 그만 잠들었던 탓에 부끄럽고 민망한 상황이 돼버렸지만, 어쨌든 그가 호텔로 부른 이유가 궁금했던 그녀였다.

“말 그대로야. 상견례 전날이니까 호텔에서 편하게 먹고 자고 하면서 쉬라고. 그래서 일부러 늦게 들어왔더니, 그사이에 잠들었을 줄이야.”

도훈이 어젯밤을 생각하며 한 번 더 피식 웃음 지었다.

도훈은 요즘 은하가 병원에서 지낸다기에 호텔에서 피로도 풀고 편하게 쉬라고 룸을 잡아서 연락했다.

어제 저녁 일정은 예상보다 일찍 끝나서 시간 맞춰 올 수 있었지만, 생각해 보니 자신이 없는 편이 은하가 더 편하게 쉴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식사 시간을 넘겨 호텔로 왔다. 혼자서, 편하게 밥 먹으라고.

그런데 그사이에 은하는 벌써 잠이 들어 있었다.

쉬라고 불렀으니 목적은 달성했는데, 그게 그를 아주 괴롭혀서 문제였다.

왜 하필 샤워가운만 입고 잠이 든 건지.

심지어 그가 안아 올려도, 침대에 뉘여도, 심지어 가운을 벗겨내는데도 너무 잘 자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밤새 안고 싶고, 만지고 싶은 걸 얼마나 참고 또 참았는지 모른다.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는 탓에 잠을 자고 싶어도 잠이 올 리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 욕망에 나약한 인간이었는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결국 도훈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자신은 그렇게 밤새 고행의 길을 걷는 동안, 은하는 한 번을 깨지도 않고 푹 자고 일어나다니.

제가 생각해도 지금 이 상황이 우스웠다.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설명을 듣고 보니 은하는 도훈에게 더 미안해졌다.

물론 상견례가 그만큼 중요해서 그런 거겠지만, 어쨌든 은하는 그의 배려 덕분에 어젯밤에 잘 먹고 잘 잘 수 있었으니 고마운 마음도 컸다.

그래서 도훈에게 감사 인사부터 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 깍듯한 감사 인사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을 텐데? 결혼할 여자가 아빠를 간호하느라 매일 병실에서 지낸다고 하면, 어느 누구라도 나처럼 했을 테니까.”

아, 역시 알고 있었구나…….

은하는 도훈과 얘기하는 도중, 혹시 그가 자신이 병원에서 지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닌가 의구심을 가졌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쉬라고 호텔까지 잡아줄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더 고맙게 느껴지는 걸 도훈만 몰랐다.

“그래도 감사해요.”

은하는 옅은 미소로 한 번 더 인사했다. 그게 그녀의 마음이었으니까.

피로가 풀리니까 확실히 기분도 상쾌하고 몸도 가벼운 느낌이었다. 이게 모두 도훈 덕분이었다.

하지만 도훈은 그런 은하를 보는 게 괴로웠다.

그녀의 미소를 보는 순간, 머릿속이 멍해진 기분이었다.

한 가닥 남은 이성으로 겨우 눌러놓았던 욕망을 더 이상은 버텨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도훈은 결국 침대로 걸어가 은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은하는 당황하여 잡고 있던 이불을 두 손으로 더 꼭 그러쥐었다.

도훈은 픽 웃고는, 은하와 눈을 마주쳤다.

까맣고 깊은 그의 눈동자가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은하는 괜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런데도 도훈은 전혀 미동도 없이 은하의 눈만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고마우면, 키스해도 되나?”

“네?”

“섹스는?”

“그건…….”

“하지 말래도 자꾸 인사하는 걸 보니, 나도 하고 싶은 걸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도훈 씨…….”

“밤새 안고 싶은 것도 겨우 참았거든.”

은하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그 눈을 마주하며 도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거절해도 돼. 오늘만큼은.”

상견례 날 아침에 관계를 맺는 게 싫을 수도 있으니까.

꼭 그렇지 않다고 해도, 오늘만큼은 은하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

멋대로 달려들었다가 지난번처럼 그녀의 상처받은 얼굴을 또 보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말하고 나서 도훈은 바로 후회됐다.

이렇게 간절한데 괜히 허세를 부려서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천년보다 더 긴 듯했다.

그리고 그 대답이 거절일까봐 속에서는 조바심이 일었다.

“아뇨……. 해도 돼요.”

은하가 그의 눈을 수줍게 바라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어차피 임신……. 읍.”

어차피 임신을 해야 하니까 해도 된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은 성급한 도훈의 잇새로 삼켜지고 말았다.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메우고 있었다.

밤새 참았다는 말이 사실인지 밀고 들어오는 도훈의 혀가 어느 때보다 뜨겁고 정열적이었다.

그는 은하의 입 안을 미친 듯이 헤집으며 정신을 쏙 빼놓았다.

도훈이 은하의 허리를 바짝 당겨 그의 다리 위에 앉혔다. 그 바람에 은하의 몸을 가리고 있던 이불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말았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주소|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역로3길 40-36 B동 710호 (신내동)

전화|02)906-7768 / 팩스|02)906-7769

값 100원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와이엠북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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