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겁도 없이 결혼-19화 (19/72)

19화.

그 시각, 은하는 병원에서 은표를 케어하고 있었다.

깨끗한 물수건으로 몸도 닦아주고,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시트도 갈고, 옷도 새 옷으로 갈아입혔다.

간병인을 써도 되지만, 그동안 받은 아빠의 사랑을 이렇게라도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제 결혼하면 어쩔 수 없이 간병인을 쓸 텐데 벌써부터 아빠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진 않았다.

“다 됐다. 우리 아빠 완전 인물 나는데?”

깨끗해진 은표가 보기만 해도 좋아서 은하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빠, 몸도 깨끗하게 닦고 옷도 갈아입으니까 좋지?”

은하는 누워 있는 은표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의식은 없지만 주변의 소리에 반응하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작은 이야기라도 은표에게 해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이었다.

“우리 아빠 찝찝한 거 잘 못 참는데, 더 자주 못 해 줘서 미안해.”

마음 같아서는 매일 해주고 싶지만, 은하도 무리고 병원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라 만류했다.

그래도 쾌적한 VIP 병실에 돈 걱정 안 하고 치료에 필요한 검사를 모두 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상견례네…….”

문득 도훈이 떠올라서 날짜를 되짚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상견례가 바로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병원에만 지내다 보니 날짜 개념이 사라져서 자칫하면 깜박할 뻔했다는 생각이 들자 뒷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놀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긴장감이 몰려왔다.

양가 가족들에게 계약결혼임을 들키지 않게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도 그렇고, 도훈을 다시 만난다는 것도 무척 떨리는 일이었다.

“아빠, 내일 나 상견례 해. 그때 봤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

은하는 은표의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상견례 이야기를 전했다.

아무리 은표가 의식이 없다고 해도 계약결혼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다. 그래서 은표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제일그룹 알지? 거기 손자야. 아빠 딸 출세했어.”

은하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빠가 사고를 당하지 않고, 자신도 정말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하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절로 마음이 씁쓸해진 탓이었다.

“아빠가 건강해서 상견례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잘 하고 올게. 책잡히지 않도록 잘해서 무사히 결혼까지 가면 좋겠어.”

그건 지금 은하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계약결혼을 들킬까봐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혹시라도 제일가에서 자신을 반대하면 어떻게 하나.

아니면, 찬숙이 실수를 해서 책잡히면 어떻게 하나. 별별 것이 다 고민이고 걱정이었다.

제발 그런 거 없이 잘 지나가서. 무사히 결혼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 은표의 치료도 계속 받을 수 있고, 자신도 찬숙에게서 벗어나 숨통이 좀 트일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은하가 은표에게 내일 있을 상견례에 대해 조곤조곤 얘기하고 있을 때, 진동음과 함께 메시지가 도착했다.

[최도훈]

도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였을까, 발신인에 그의 이름만 떠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런데 메시지의 내용을 보는 순간, 그 심장이 뛰다 못해 쿵 하고 내려 앉아버렸다.

[오늘 저녁 7시까지. 제일호텔 2301호로 와.]

은하는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다. 갑자기 호텔로 오라니, 누구든 그럴 터였다.

심지어 제일호텔 2301호는 도훈에게 계약결혼을 제의하고 난 뒤 함께 밤을 보낸 곳이기도 했다.

그때의 뜨거웠던 밤이 생각나 호텔 룸 번호만 봐도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전화해서 무슨 일인지 물어봐야 할까?

아니면, 그냥 찾아가야 하나…….

것도 아니면…… 메시지로 물어봐?

은하는 마치 풀기 어려운 문제를 맞닥뜨린 사람처럼 혼자서 입술을 짓씹으며 메시지를 한참을 노려보았다.

그러는 와중 전화벨이 울려서 보니 도훈이었다. 은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전화를 받았다.

“네. 은하예요.”

-방금 메시지 보냈어. 확인해.

“……봤어요.”

-그럼 이따 만나지.

은하는 도훈이 직접 전화까지 하자 궁금증이 더 커졌다.

“저기, 근데 도훈 씨.”

전화가 끊길까봐 은하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다행히 전화는 끊기지 않고 도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해.

“무슨 일로 보자고 하신 건지…… 궁금해서요.”

게다가 왜 하필 장소가 호텔인지도 궁금했지만 차마 그건 묻지 못했다.

혼자 오버하는 것도 싫고, 그를 오해하는 것도 싫었으니까.

그런데 그의 대답이 예상 밖이었다.

-연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야 만나는 건 아니지 않나.

“…….”

-7시까지 와.

아무리 연기라지만, ‘연인’이라는 말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도훈이 은하는 신기했다.

심지어 확인차 전화를 한 건지, 강요하는 느낌이 아니라 정말로 연인을 대하듯 부드럽게 어르는 말투였다.

***

결국 은하는 7시가 되기 전, 제일호텔 로비에 서 있었다.

도훈이 직접 전화까지 걸어서 확인한 사안이니 안 올 수도 없는 노릇.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화려한 제일호텔의 위용에 다시 한번 감탄하며, 도훈이 시키는 대로 키를 받아 바로 2301호로 올라갔다.

-회의가 좀 늦을 것 같으니, 저녁 먹고 쉬고 있어.

도훈은 은하가 도착하기 10분 전, 전화를 걸어 그렇게 말했다.

은하는 맥이 탁 풀리면서도 오히려 반가웠다.

이유 없이 잔뜩 긴장됐었는데 그가 올 때까지는 마음 편히 혼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와, 이런 곳이었구나.”

그렇게 2301호에 도착하니 도훈과 왔을 때는 못 봤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드넓은 거실하며, 확 트인 통창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도시의 전망,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까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욕실도 뭔가 달라 보였다. 그때는 씻기 급급해서 눈여겨보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황금빛 수전과 어우러진 대리석 욕조가 너무 멋스럽고 예뻐서 당장이라도 물을 받아 씻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서는 잠깐씩 하는 샤워도 사치였는데, 여기는 천국이 따로 없었다.

‘어차피 도훈 씨도 늦게 온다고 했으니까, 씻고 쉬고 있어야겠다.’

은하는 여유 있게 룸을 둘러본 다음,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부터 담갔다.

이렇게 여유 있고 편안한 상태가 언제였던가 싶을 정도로 피곤이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피로를 풀고 욕실에서 나와 야경을 보고 있자니, 누군가 벨을 눌렀다.

“누구지?”

도훈이라면 벨을 누를 리가 없을 테니, 다른 사람일 터였다.

은하는 샤워가운을 깊게 여미며 문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룸서비스입니다.

“아, 죄송한데 저는 룸서비스를 시킨 적이 없어요.”

은하가 잘못된 배달이라고 생각해서 가볍게 대꾸하고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최도훈 본부장님이 주문하셨습니다.”

도훈의 이름이 불리자 은하가 놀라서 발걸음을 멈췄다.

저녁을 먹고 온다더니…… 아니었나?

어쨌든 도훈이 시킨 거라면 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은하가 문을 열자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직원이 트레이를 밀고 들어와 테이블 위에 음식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하니 순식간에 배고픔이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점심도 제대로 못 먹은 데다 시간이 벌써 저녁 8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은하는 테이블 위에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보면서 침을 삼켰다.

무슨 음식이길래 이렇게 냄새가 좋지?

뚜껑만이라도 열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아 넘기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도훈에게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룸서비스로 저녁 시켰으니 먹어.]

응? 뭐야…….

그럼 나 혼자 먹으라고 이 많은 음식을 시켰다는 건가?

메시지는 분명 혼자 먹으라는 것 같은데, 눈앞에 보이는 요리의 가짓수는 무려 9가지였다.

“어쨌든 배가 고프니까 먹고 보자. 버릴 수도 없으니까.”

사실 도훈이 없으니 더 편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은하는 배가 고픈 만큼 아주 설레는 표정으로 음식의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

뚜껑을 열고 음식을 확인할 때마다 그 정갈함과 먹음직스러움에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와……. 이래서 제일호텔인 건가.”

요즘은 명성이 많이 죽긴 했지만 한때는 최고의 호텔로 치던 곳이었다.

룸서비스부터 시중의 다른 호텔과는 급이 다르다 느껴졌다.

음식은 정확하게 양식과 한식, 그리고 분식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양식은 스테이크와 파스타 그리고 감바스. 한식은 김치찌개와 불고기, 비빔밥. 분식은 떡볶이와 순대 그리고 앙증맞은 만두였다.

양식과 한식은 손님들이 많이 시키는 호텔의 대표메뉴인 것 같았고 분식은 다소 생뚱한 느낌이 들었지만, 은하는 분식을 좋아하기에 아주 만족스러운 구성이었다.

양도 1인분보다 더 적게 주문했는지, 은하가 모든 메뉴를 다 맛봐도 기분 좋게 먹기에 딱 좋은 양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래도 아홉 개의 가짓수를 다 먹을 수 있을지는 자신 없었지만.

“진짜 맛있겠다.”

은하는 이제 아예 대놓고 꼬르륵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자리에 앉아서 하나씩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양식으로 시작해 조금 느끼하다 싶으면 한식을 먹고, 한식을 먹다 텁텁하다 싶으면 분식을 먹었더니 조화가 최고였다.

“아, 배부르다. 너무 맛있게 잘 먹었어.”

먹고 보니 언제 양이 많았나 싶을 만큼 거의 다 비우고 말았다. 적당히 맛있어야 남기든지 말든지 할 텐데 하나같이 너무 맛있고, 양도 많지 않아서 감칠맛이 나니 접시를 다 비우고도 크게 힘들지 않았다.

“도훈 씨는 언제쯤 오려나…….”

분명 호텔로 오라고 한 이유가 있을 텐데 도훈은 안 오고 혼자 밥까지 먹고 있으니 어쩐지 이상했다.

하지만 마음만 조금 불편할 뿐, 몸은 너무 편했다.

오랜만에 너무 잘 먹어서였을까, 가만히 앉아 있었더니 잠이 솔솔 쏟아졌다.

“잠깐만 눈 좀 붙일까. 그래도 되겠지?”

자꾸만 감기는 눈을 어쩌지 못하고 은하는 소파에 모로 누워 그만 잠이 들었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주소|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역로3길 40-36 B동 710호 (신내동)

전화|02)906-7768 / 팩스|02)906-7769

값 100원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와이엠북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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