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겁도 없이 결혼-18화 (18/72)

18화.

지방으로 출장을 갔다 서울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넘어 있었다.

도훈은 집으로 가지 않고 바로 회사로 들어왔다.

어차피 계속 바쁠 예정이고, 내일도 일이 바쁘니 출장을 다녀온 보고서를 미리 작성해놓을 심산이었다.

또한 마음이 심란하여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아침에 받은 영철의 보고 때문이었다.

‘하늘식품과 최 팀장님이 아무래도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연관이라뇨?’

‘아직 더 알아봐야겠지만, 최 팀장이 이번에 출시한 제품이 하늘식품이 최근에 심혈을 기울여 개발하던 신제품과 똑같다는 이야기가 있어서요.’

하루아침에 연구 개발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던 하늘식품 신제품이, 제일푸드의 신제품으로 탈바꿈 돼 출시되고 있다는 소리였다.

영철은 도훈의 지시로 하늘식품과 여 대표의 사고를 알아보던 중, 익명의 제보를 받았다. 그래서 지금 그 말의 진위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는데 관련 증거나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도훈은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설마…… 더러운 편법을 쓴 것인가.”

하루아침에 좋은 기획력이 나오고, 그것을 구현하는 기술과 방법까지 술술 나오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그동안 세훈이 노력한 결과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부당한 방법으로 하늘식품의 아이디어와 기술을 빼돌린 것이라면…….

게다가 왜 하필 하늘식품인지.

생각에 잠긴 도훈에게 왠지 모를 찝찝함과 불안감이 동시에 엄습했다.

만약 은표의 사고가 정말로 세훈과 연관돼 있다면, 은하와 자신이 계약결혼을 하게 된 것이 인연일까, 악연일까. 아니면 어떤 운명의 장난일까.

그러다 문득 낮에 은하에게 메시지가 온 것이 생각났다. 바빠서 나중에 확인해야지 하고서는 깜박한 것이다.

도훈은 휴대폰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상견례 때문에 연락드렸어요. 어머니가 토요일 괜찮다고 하세요. 어디로 몇 시까지 가면 될까요? 아, 그리고 어머니께서 상견례에 누가 오시는지도 궁금해하세요.]

며칠 전에도 평창동에 불려갔다 온 걸로 아는데, 은하는 상견례 얘기만 했다.

할 말이 없다는 건가, 아니면 하기 싫은 건가.

어쨌든 말을 아끼는 여자라 도훈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작은 거 하나라도 시시콜콜 알려야 하고 확인받아야 하는 여자들은 피곤하다고, 늘 생각해왔으니까.

도훈은 피곤해서 관자놀이를 누르며 잠시 고민했다.

메시지를 보낼까, 전화를 할까…….

결국 도훈은 전화를 택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이, 그냥 그러고 싶었다.

가는 신호음을 들으며 도훈은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

은하는 이제 은표의 병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낮에 찬숙에게 불려갔다 시달렸더니 평소보다 더 피곤했다.

상견례 일정을 물어보려고 전화했더니 찬숙은 다짜고짜 집으로 오라고 했다.

어차피 은하도 며칠 병원에서 지낸 탓에 속옷이며 간단한 짐을 챙겨 와야 해서 할 수 없이 집으로 갔다.

그런데 은하를 만나자마자 찬숙은 도훈과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어쩌다가 결혼까지 하게 됐는지 꼬치꼬치 물었다.

이렇게까지 제 결혼에 관심이 많은 줄 몰랐는데, 이상하게 하나부터 열까지 알고 싶어 했다. 피곤했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도훈과 말을 맞춘 대로 최대한 포장해서 말해주었더니,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나중에야 조금은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은하의 자존심을 꺾는 소리를 잊지 않았다.

‘도대체 네가 뭐가 잘났다고 최도훈이 너랑 결혼하냐고. 난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말이야.’

자신도 의문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받아주는 게 고마웠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를 받아줄 이유가 딱히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선주의 말은 사실이었을까.

은하는 사실 평창동에 다녀온 이후 선주의 말이 뇌리에 남아 도훈의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처럼 도훈이 바람을 피우거나, 정신착란을 일으킬까 걱정이 돼서가 아니었다.

그냥…… 안타까웠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찬바람이 쌩쌩 부는 차가운 새어머니와 밖으로 도는 무심한 아버지, 일만 하는 할아버지 사이에서 홀로 버텨냈을 도훈을 생각하니 측은하다고 해야 할까.

은하 역시 새엄마와 관계가 좋지 않아서 더욱 제 일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자신은 아버지가 곁에서 든든히 버텨주었기에 크게 힘들지 않았었는데, 도훈은 정말 혼자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은하가 도훈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휴대폰에 진동음이 느껴졌다.

은하가 놀라서 발신인을 확인하니 도훈이었다.

밤 10시가 넘은 야심한 시각.

도훈에게서 전화가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전화통화는 처음이었기에 긴장되어 괜히 심장 소리도 커졌다.

티 내지 않으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받았더니 도훈의 목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야.

“네.”

그냥 들을 때도 듣기 좋은 중저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수화기를 통해서 들으니 더 독보적이었다. 외모에도 적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목소리마저 완벽한 사람이었다.

-너무 늦은 건가?

“아뇨…….”

밤은 깊었지만 자고 있지는 않았으니 너무 늦은 건 아니라고 대답해 보았다.

-상견례 메시지 봤어. 내일 연락하려다가 혹시나 기다릴까봐.

“아.”

-평소에도 바빠서 메시지는 잘 보지도 못하고, 답장도 바로 못 해. 그러니까 앞으로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 전화해. 당장은 못 받아도 부재중 전화를 보면 연락할 테니까.

그렇게 도훈은 전화를 건 용건을 설명했다. 그 친절한 설명에 은하의 가슴이 괜히 싱숭생숭했다.

은하는 도훈이 막연히 차갑고 무심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임신과 아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은 것도 그렇고, 결혼해도 자신에게 기댈 생각하지 말라며 선을 긋는 것도 그렇고.

그녀에게는 누구보다 냉정한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그러나 생각해 보면 자신에게 달려들 때는 누구보다 뜨거운 남자였으며, 이럴 땐 또 세상 세심한 사람이었다.

은표에게 인사하는 걸 먼저 챙기고, 혹시라도 자신이 기다릴까봐 늦더라도 연락을 해주는 마음이 너무 세심하고 따뜻했다.

은하는 자꾸만 그 괴리감에서 널뛰는 제 감정이 낯설었다.

-그래서, 어머님은 정말로 그 날짜가 괜찮다고 하셨나?

일이 지금 끝난 걸까? 목소리에서 미묘하게 피곤이 묻어났다.

‘굳이 지금 연락 주지 않았어도 되는 일이었는데.’

하지만 은하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와 하는 통화가 묘하게 기분 좋았기 때문이었다.

“네, 제가 어떻게든 더 빨리 결혼하기를 바라시는 분이라서요.”

-그래, 그럼. 시간은 토요일 오후 1시. 장소는 평창동 본가에서 할 거야. 너무 격식 차려서 하는 상견례라기보다는 밥 한 끼 먹는다고 생각하면 돼.

“아, 알겠습니다.”

-그럼 시간 맞춰서 차를 보내도록 하지.

“네…….”

왠지 이대로 전화가 끊긴다는 것이 아쉬워서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릴 때였다.

도훈이 물었다.

-혹시 이 결혼을 후회하나?

“네? 아뇨……. 아니에요.”

은하가 고개를 내저었다. 후회는커녕,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그와의 결혼이 점점 기대가 됐다. 스스로가 미친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나도 후회 안 해. 이렇게 된 것도 다 인연이라고 생각하니까.

“아…….”

-그러니까 일찍 자. 심란해하지 말고.

혹시나 결혼을 앞두고 심경이 복잡할까봐 신경 써주는 걸까.

그렇다 하더라도 예의상 챙겨주는 말일 텐데…….

은하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인연’이라는 말이 제법 설레어서였다.

***

“내일이 상견례인데 여은하 씨는 아직도 병원에서 기거 중입니까?”

“네. 오전에도 그렇게 보고 받았습니다.”

도훈은 은표의 건강 상태를 매일 아침 보고받고 있었다. 은표를 VIP 병실에 옮겨만 놓고 무심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명색이 장인어른인데, 매일 상태를 체크하고 안위를 챙기는 게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보고에 은하가 등장했다. 그녀가 요즘 매일 병원에서 지낸다는 보고였다.

“간병인은 어떻게 됐습니까?”

“일이 있을 때만 잠깐씩 쓰시고 직접 케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간병인을 못 구해서 그러는 줄 알고, VIP 의료서비스라는 명목으로 간병인까지 붙여주었다.

그런데도 은하는 여전히 병실에서 지내고 있으며, 잠깐씩 일 있을 때만 쓴다는 얘기였다.

고집이 센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답답하고 미련한 성격은 아니겠지?

어쨌거나 일주일 가까이 병원에서만 지내고, 간병인도 쓰지 않는다면 몸이 많이 축났을 터.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오늘 저녁 스케줄은 하나 정도로만 줄여주세요. 상견례와 관련하여 여은하 씨와 얘기를 좀 나눠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미처 챙기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도훈이 제일그룹의 핵심인재다 보니 꼭 만나야 할 사람들만 추리는데도 늘 저녁 약속이 두 세 개씩은 기본이었다. 당연히 퇴근시간도 12시를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상견례 전날에 그렇게 빡빡한 스케줄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영철은 자신이 먼저 챙기지 못해 죄송하다며, 얼른 스케줄을 조정하러 밖으로 나갔다.

영철이 나가고, 도훈은 의자 깊숙이 몸을 뉘이며 은하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주소|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역로3길 40-36 B동 710호 (신내동)

전화|02)906-7768 / 팩스|02)906-7769

값 100원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와이엠북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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