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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도 없이 결혼-17화 (17/72)

17화.

“이미 알겠지만 도훈이는 무뚝뚝하고, 딱히 여자에게 잘해주는 타입이 아니야. 외모만 봤다가는 상처받기 딱 좋지. 안 그래?”

“저에게는 잘 해주세요.”

“그래?”

“네. 저도 무뚝뚝하고 차가운 분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세심한 분이시더라고요.”

은하는 진심이었다. 아빠에게 먼저 인사를 온 것도 그렇고, 의식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깍듯하게 챙겼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감동적이었으니까.

선주 역시 은하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정말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된 건가?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결혼해도 이혼당하면, 후계자 경쟁에 있어 도훈에게 더 안 좋을 거라는 세훈의 말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주가 여유롭게 덧붙였다.

“그래, 그 마음이 변치 않아야 할 텐데. 근데 도훈이 아버지가 여성편력이 심하다는 건 알고 있니?”

“……네?”

하필 이 타이밍에 갑자기 도훈의 아버지, 일준이 거론되는 게 은하는 이해가 안 돼서 눈을 깜박였다.

“심지어 아직까지 바람을 피고 다니지.”

선주는 자조적으로 피식 웃음을 보였지만 은하는 웃지 못했다.

“그런 거, 유전이라고 하더라고.”

“…….”

설마, 도훈도 결혼해서 바람을 필 거라는 얘긴가…….

은하가 그 생각을 곱씹을 때 선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유전이라고 하니까 또 생각났는데 도훈이가 어릴 때 정신과 약도 엄청 먹었어. 정신착란도 일으키고.”

이것도 몰랐던 일이었다.

도훈이 정신착란을 일으켰다고? 지금은 너무 강해 보여서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 말이었다.

“정신병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낫는 게 아닐 텐데, 또 언제 발병할지 모르지. 혹시라도 결혼해서 도훈이가 그런 모습 보이면 언제든 나한테 상의하고.”

“…….”

“그럼 가봐.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다 했으니.”

선주가 거실에서 나가자 홀로 남겨진 은하는 어안이 벙벙한 채 앉아 있었다.

***

고급 한정식집의 조용한 밀실.

세훈이 불안한 얼굴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짜증이 나는지 시계를 보며 얼굴을 찌푸리는 순간,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나타났다.

큰 덩치에 삭발한 머리, 야비한 눈을 가진 찬우는 밀실에 들어서자마자 세훈을 보고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팀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세훈의 얼굴이 못마땅하게 구겨졌지만, 이런 데서 감정을 드러내봤자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해 얼른 표정을 냉철하게 바꾸었다.

“장찬우 씨.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합니다. 제가 만만하십니까?”

“아이고, 그럴 리가요. 제가 미국에 좀 나갔다 오느라 연락이 늦었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제가 주기적으로 미국에 간다는 것을요.”

심각한 도박 중독으로 해외 원정을 나가는 게 뭐 자랑이라고, 재밌다며 낄낄대고 있는 찬우를 보니 세훈은 새삼 소름이 끼쳤다.

이런 인간과는 처음부터 엮이질 말았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이런 인간이란 걸 미리 알았어도 아마 그 유혹은 뿌리치지 못했을 것이다.

찬우는 여섯 달 전, 어렵게 세훈을 찾아가 하늘식품 신제품 기술자료를 내밀었다. 돈이 될 거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세훈도 자료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중소기업에서 구현할 수 있는 기술력이 아닌 데다 출시되기만 한다면 파급력이 상당할 것으로 보였다.

당시 제 입지를 만들어 보여야 한다는 압박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세훈에게는 피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 제품은 지금 제일푸드 신제품으로 둔갑해 개발되었으며, 시제품에서 이미 뜨거운 반응을 보이며 정식 출시를 앞두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난 제일그룹 사람입니다. 만약 나를 갖고 장난치는 거라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당신 한 명쯤 땅에 묻는 거, 일도 아니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저도 정말 억울합니다. 저도 그년이 최도훈 본부장님과 결혼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니까요.”

찬우가 억울하다는 듯 비굴하게 눈알을 굴리며 설명했다. 아무리 봐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 우연이라는 건가?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믿어주십시오. 이 일이 까발려지면 저 역시 살인미수죄로 잡혀가는데, 제가 왜 그 집에 그 원수 같은 조카를 밀어 넣겠습니까? 그년이 따로 눈치를 채고 복수를 계획했는지는 몰라도, 저는 절대 이 결혼에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팀장님.”

세훈이 봐도 찬우가 그렇게까지 머리를 굴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차라리 돈이 필요했다면 직접 더 달라고 자신을 협박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한편으로 안심이 되면서도, 여전히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처럼 불안했다.

“장찬우 씨. 당신의 결백은 믿어드리죠. 하지만 형님은 눈치가 아주 빠르고 집요한 사람입니다. 분명 작은 단서라도 잡게 되면, 바로 이 일을 알아차릴 겁니다.”

“그건 걱정 마세요. 증거가 없을 테니까요. 당시 핵심인력도 다 입막음 시켰고, 자료도 다 없애버렸으니까요. 이럴 때를 대비해 제가 직접 여 대표까지 처리하지 않았습니까?”

“할 거면, 제대로 했어야죠. 불씨가 남았으니 하는 말 아닙니까? 지금도 만에 하나 깨어나서 이 일을 불기라도 하면…….”

“절대, 깨어나는 일 없을 겁니다. 제가 장담하죠.”

“…….”

찬우가 미소를 지으며 세훈을 보았다. 세훈은 여 대표가 절대 깨어나지 않을 거라는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사람 일은 또 모르는 거니까 자만하지 말고 확실히 처리하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찬우가 호언장담을 했고 세훈은 그의 말을 한 번 더 믿기로 했다.

***

찬숙은 장롱 안의 옷들을 뒤적이며 짜증을 한가득 냈다.

“도대체가 입을 옷이 하나도 없잖아! 이게 다 언제 적 옷이야?”

오늘 저녁 사교모임에 입고 갈 옷이 없어서였다.

허영이 많은 찬숙은 은표와 결혼하고 나서 쭉 정재계 사모님들이 모이는 사교 모임에 참석해왔다.

물론 찬숙의 위치로는 1군 사모님들과는 절대 어울릴 수 없었고 주로 2, 3군 사모님들과 교류를 가졌지만,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위상이 올라간 것 같아서 만족했다.

그러다가 은표가 쓰러지면서 그것마저 한동안 못 나갔다. 남편이 다쳐서 정신없다는 건 핑계고, 아무래도 보는 눈들이 있으니 자제한 것이다. 그만큼 찬숙은 이 사교모임에 진심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카드빚을 내서라도 쇼핑부터 해야지. 사위가 제일그룹 본부장인데 이렇게 싸구려 옷을 입고 다닐 순 없지.”

찬숙이 쇼핑할 생각에 신이 나서 외출 준비를 하는데, 누군가 집안으로 들어서는 발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혹시라도 은하가 온 걸까봐 찬숙이 잔뜩 날선 표정으로 거실로 나갔다.

“누님, 잘 지내셨습니까?”

“어머, 찬우야!”

찬숙은 그제야 제집에 들어온 사람이 동생, 찬우인 걸 알고 반가워하다가 놀라서 목소리를 낮췄다.

“너 근데 여기 와도 돼? 아직 네 매형 뺑소니 사고 종결 안 됐어.”

“우리 누님, 겁이 많아지셨네. 보험금 타겠다고 사고 내는 것도 괜찮다고 언질 줄 땐 언제고.”

“그거야…….”

찬숙이 입을 다물었다. 은표를 사랑해서라기보다 돈을 보고 결혼했던 그녀에게 어쨌거나 은표의 사고는 실보다 득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한국엔 웬일이야?”

“은하년 결혼 때문에요.”

“은하? 걔가 왜? 아…… 맞아. 걔 제일그룹 남자 꼬셔서 결혼해. 곰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남자 꼬시는 재주는 또 있었던 모양이야.”

제일그룹과 사돈이 되는 건 좋지만, 은하가 잘 사는 꼴은 보기 싫었던 찬숙이 못마땅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거기 제일그룹이, 제가 작업한 데에요, 누님.”

“뭐라고?”

“여 대표 기술 빼돌려 갖다주고 돈 받은 곳이 제일그룹이라고요.”

찬숙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전혀 생각도 못 했다.

사실 찬숙도 찬우가 벌인 일을 대충 알고 있었다. 찬우가 은표에게 복수하기 위해 일을 꾸민다고 했을 때, 찬숙은 크게 반대하지 않고 허락했다.

찬숙도 이 집이 지긋지긋해진 데다, 은하의 모함으로 은표가 찬우를 내칠 때마다 자신도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었다.

은표가 사고를 당하고 찬우가 몸을 피한 이후로는, 사고 보험금도 타고 은하 또한 재벌집으로 시집가게 됐으니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하필 찬우가 손잡고 일을 벌인 데가 제일그룹이라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가?

“그럼 은하가 알고 있단 말이야? 네가 그 일을 꾸민 걸?”

“그건 아닌 것 같고, 정말 우연히 겹친 것 같아요. 얻어 걸린 거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찬숙은 도둑이 제 발 저린 심정으로 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해? 결혼식을 못 하게 해야 하나? 들키면 끝장이잖아?”

“아뇨.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잘됐어요.”

“왜? 뭐가 잘돼?”

“어차피 그년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테니까. 대신 은하를 핑계로 제일그룹에 돈을 더 뜯어낼 수 있잖아요.”

“그러다 이 일이 밝혀지기라도 하면…….”

“그럴 리는 없죠. 여 대표가 죽어준다면.”

“……찬우야.”

찬숙이 동생의 말뜻을 알아듣고 놀라서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여 대표도 참 복이 없어요. 어차피 죽을 목숨, 저렇게라도 연명하게 봐줄까도 생각했는데 이렇게 죽어야만 하는 이유가 생기니.”

찬우가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누님. 이제 곧 매형 사망보험금도 타실 테니, 어디다 돈 쓸지나 생각해두세요.”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주소|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역로3길 40-36 B동 710호 (신내동)

전화|02)906-7768 / 팩스|02)906-7769

값 100원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와이엠북스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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