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아침부터 회의의 연속이었다.
계열사 경영평가 보고를 시작으로 임원진 회의, 그리고 이학과의 점심 독대까지 마치고 나서야 집무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도훈이 얕은 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은하 때문에 잠을 설쳤더니 더 피곤했다.
도훈은 요즘 거의 매일 은하 꿈을 꿨다. 그것도 매번 자신을 유혹하는 꿈을.
스스로가 생각해도 미쳤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평소 다른 여자는 거들떠도 본 적 없는데, 은하에게만 유독 욕망이 발현된다는 것이 도훈도 신기했다.
그렇게 은하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영철이 보고서를 들고 들어왔다.
“하늘식품 관련 보고서입니다. 재정 상태와 경영 능력, 그리고 기술 보유권 등을 수치화하여 투자 가능성을 정리해봤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도훈이 흡족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받아 들었다. 투자든 인수합병이든 하려면 데이터와 자료조사는 기본이었다.
“그런데 본부장님. 하늘식품을 조사하다 보니 조금 이상한 게 있었습니다.”
“이상한 거라뇨?”
“여 대표의 사고 전후로 퇴사한 직원이 꽤 되는데, 대부분 제품 연구 개발자들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직원들 말로는 여 대표가 곧 출시될 신제품 때문에 바빴다고 하는데, 관련 자료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었고요.”
“그래요?”
확실히 뭔가 석연치가 않았다.
“조금 더 자세히 알아봐 주세요. 찜찜한 건 해결하는 게 나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여 대표의 사고도 같이 조사 부탁드립니다.”
“여 대표의 사고요?”
“네, 제가 보기에는 그 사고도 뭔가 이해 안 되는 구석이 많아서요.”
하필 은표가 갈 이유가 전혀 없는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말을 들어서일까.
아니면 대표가 사고를 당한 직후에 회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망해서일까. 생각할수록 뭔가 찝찝했다.
아직까지 뺑소니 범인을 못 잡은 것도 마음에 걸렸다.
결혼 소식을 전했던 날, 세훈과 선주는 하늘식품 얘기에 왜 그렇게 당황했을까.
그것도 자꾸만 도훈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과제였다.
‘파 보면 알겠지. 하늘식품도, 여 대표의 사고도.’
도훈이 잡생각을 털어내고자 고개를 짧게 저었다.
영철이 할 말이 있는 듯 잠시 머뭇거렸다.
“참, 본부장님.”
“네. 말씀하세요.”
“평창동에서 사모님께 따로 연락을 하실 것 같습니다. 다짜고짜 저에게 전화하셔서 번호를 물어보셨거든요.”
“그래요?”
도훈은 크게 표정 변화가 없었다. 마치 예상했다는 반응이었다.
“시어머니 노릇이 하고 싶으신가 봅니다. 그러도록 두세요.”
“아직 어리신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영철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영철은 도훈과 은하가 서로 필요에 의한 모종의 계약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훈이 그에게는 모든 사실을 말했으니까.
그러다 보니 혹시라도 선주가 은하와 만나고 나서 그 사실을 눈치챌까봐 걱정스러운 것이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덤빈 일일 거예요.”
“그럴까요?”
“네. 괜찮을 겁니다. 생각보다 강단이 있는 성격이라. 표정도 잘 감추고요.”
도훈은 은하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제게 결혼을 제의하던 당찬 모습이나 자존심이 상해도 아닌 척 표정을 바꾸고 앉아 있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은하도 결코 만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선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쉽게 기가 죽거나 함부로 넘어갈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박 실장님.”
“알겠습니다.”
도훈의 말에 그제야 영철도 안심했다.
***
“여긴가 보네.”
평창동 자택의 번지수를 보고 은하는 호흡을 골랐다.
동네가 워낙 넓다 보니 버스정류장에서도 한참이었다.
“와, 진짜 으리으리하네.”
심호흡을 하고 주변을 둘러보던 은하는 높고 커다란 담벼락을 보고 절로 감탄이 새어나왔다.
“재벌집은 다르긴 다르구나.”
이런 집은 TV에서나 봤지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나저나 잘 버텨야 할 텐데.”
은하에게 전화가 걸려온 건 두 시간 전이었다.
낯선 번호기에 몇 번이나 거부하다가 받고 보니, 도훈 씨 어머님의 비서라는 사람의 전화였다.
-사모님께서 얼굴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주소 보내드릴게요.
그게 끝이었다. 은하는 할 수 없이 부랴부랴 병원을 나와서 평창동으로 달려왔다.
“휴.”
은하는 한숨을 깊게 내쉰 뒤 초인종을 눌렀다.
삐-
초인종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이런 집은 초인종 소리도 위협적이었다.
-누구세요?
잠시 후, 고용인인 듯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여은하라고 합니다. 최도훈 본부장님과 결혼할 사이이고요.”
-아, 잠시만요.
고용인은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더니 이내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오세요.
대문이 철컹거리며 열리는 소리에 은하는 다시 한번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밖에서는 그냥 눈짐작으로 집이 크구나 생각했다면, 안에 들어오니 구체적인 규모가 눈에 들어와 더 입이 떡 벌어졌다.
웬만한 학교 운동장보다도 더 넓은 잔디밭이 두 개의 건물 사이를 잇고 있었고, 잘 가꾸어진 나무와 꽃들은 마치 도심 속 공원에라도 들어온 듯 싱그러움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은하는 보면 볼수록 도훈의 집안이 가진 엄청난 재력에 놀라는 중이었다.
현관문 앞에 서자 인터폰을 받은 고용인이 뛰어나와 은하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사모님 곧 나오실 겁니다.”
“네.”
은하는 손님맞이용 거실로 안내되었다. 거실에도 각종 도자기부터 그림까지 고가품이 즐비했다.
그런 걸 눈으로 훑고 있자니 인기척이 들려왔다. 은하가 천천히 일어났다.
선주는 집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치장을 한 채, 우아하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은하 앞에 섰다.
은하는 그녀가 도훈의 새어머니라는 것을 단숨에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가 도훈이랑 결혼할 아이라고?”
“네. 여은하입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알면 다행이구나. 앉아라.”
선주는 초면부터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하지만 은하는 도훈의 집안 분위기를 많이 숙지해 놓고 있었던 터라,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고 선주가 권하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선주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은하를 훑어보았다. 생김새며 분위기며,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은 확실했다. 심지어 나이도 어려 보였다.
“근데 많이 어려 보이네. 몇 살이지?”
“아……. 올해 스물다섯입니다.”
“허……!”
선주가 픽 웃음을 흘렸다.
도훈도 아닌 척하더니, 결국은 속칭 남자들이 환장한다는 다 갖춘 여자를 골랐다.
예쁘고 여리고, 어리기까지 한 신붓감이라.
만약 두 사람이 정말 좋아하는 사이라면 도훈의 취향을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래, 나이는 뭐, 중요하지 않을 수 있지.”
개인의 취향이니까.
선주가 속으로 비웃으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근데 나는 도훈이가 여자를 만난다는 자체가 너무 신기해서.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일만 하는 사람인데.”
사실 선주는 두 사람의 관계를 캐려고 은하를 불렀다. 말하다 보면 작은 꼬투리라도 잡힐지도 모르니까.
직접 만나니 나이도 어리고 만만해서 김이 샜다.
하지만 그렇다고 취조를 안 할 수는 없는 일. 선주가 은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만났을까?”
“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만났습니다. 저는 그때 일이 있어서 잠깐 들른 거고요. 그때 도훈 씨는 휴가차 나오신 거라고 하더라고요.”
“라스베이거스?”
“네. 그때부터 연락하고 지내다가 올해 들어 제가 한국에 오면서 자주 연락하게 되었습니다.”
은하는 도훈과 말을 맞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개인사나 오해 살 만한 요지는 빼고, 기본 토대에서 살을 붙였다.
선주는 매의 눈으로 은하를 살폈다. 한 치의 거짓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는 듯했다.
어차피 사실에 조금 살을 덧붙인 거라 은하는 당당할 수 있었다.
선주는 주눅 들지 않는 은하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꽤 용감하네.”
“네?”
“아니면 겁이 없는 아가씬가.”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집안은 함부로 볼 데가 아닌데, 결혼까지 생각한 게 대단하다 생각이 들어서.”
“아…….”
은하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안 그래도 선주의 시집살이는 각오하고 있었다. 그리고 차별대우도.
그래서 부족하지만 열심히 하겠다고 대꾸하려고 할 때였다.
선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만큼 도훈이를 사랑한다는 건가?”
은하는 그 질문에서 잠시 멈칫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
혹시나 이런 데서 당황한 티가 나면 어쩌나 싶어서, 은하가 얼른 감정을 추스르고 웃으면서 천천히 대답했다.
“네……. 본부장님을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그 말이 뭐라고, 왜 이렇게 긴장되고 손끝마저 떨리는지.
은하는 볼이 발그레해진 채 손을 맞잡아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겁도 없이 결혼]
출판등록|2021년 5월 27일 (제2021-0000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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